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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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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결국 각자의 것, 내가 사는 이 삶이 진짜”

‘버닝’ 시나리오작가 오정미가 쓴 규정할 수 없는 책 ‘내 모든 것’ 그리고 그의 플레이리스트
등록 2025-11-13 22:02 수정 2025-11-16 17:22
영화 ‘버닝’의 시나리오 작가이자 책 ‘내 모든 것’을 쓴 오정미 작가. 오정미 제공

영화 ‘버닝’의 시나리오 작가이자 책 ‘내 모든 것’을 쓴 오정미 작가. 오정미 제공


어떤 책들은 입소문으로 먼저 도착한다. 처음 ‘내 모든 것’(무제 펴냄)의 존재를 들은 건 영화제 뒤풀이 자리였다. “이창동 감독 ‘버닝’ 시나리오작가가 평범한 사람들의 인생 영화를 묻는 인터뷰집을 냈는데 재밌대.” 처음엔 흘려들었다. 그러다 지인의 인스타그램 스토리에서 다시 그 책을 만났다. “어떤 책들은 분명히 나와 내 삶을 이해하고 있다. 내 고통을 이해하고 있다. 그것만큼 위로가 되는 건 없다. 그런 책은 꼭 필요한 시기에 만난다.” 어떤 고통일까. 책을 펼쳤다. 읽을수록 약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자기계발서를 읽으며 애써 쥐고 있던 악력이 풀려나가는 느낌. 맞다, 사실 우리… 사람이었지. ‘들키지 않으며 살 뿐, 평생 감추고 싶은 비밀을’ 지닌. 그러다 궁금해졌다. 이런 이야기를 하나씩 모은 사람은 누굴까. “그냥… 이런 겁 많고 느린 사람인 거죠.” 2025년 11월8일 실제로 만난 오정미 작가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실패하는 인간에 관한 이야기

처음 그가 글을 쓰게 된 건 몸이 좀 안 좋아서였다. 20대 중반, 러시아문학 석사를 마칠 무렵 돌발성 난청이 왔다. 그땐 대화도 힘들 정도여서 혼자인 시간이 길어졌다. 단편소설 등 글을 쓰기 시작했다. 번역 일을 하며 도서관에서 장편 시나리오를 쓰던 어느 날, 극장에서 한 영화를 보게 됐다. 이창동 감독의 ‘밀양’이었다.

“그전까진 영화를 보며 분석하기 바빴는데, ‘밀양’을 보고선 ‘이게 뭐지?’ 싶은 거예요. 진짜 같은 거예요. 시나리오가 아닌 진짜. 영화 속 신애(전도연)와 종찬(송강호)을 보면서 ‘이 세상 어딘가에 또 다른 신애가 있겠구나, 진짜 신애들’ 이런 생각이 들자 ‘지금 나를 짓누르는 고민들, 이거 아무것도 아니구나’로 이어졌어요. 그날 제 안에 뭔가가 씻겨 내려갔어요. 집에 와 블로그에 ‘시크릿 선샤인’(‘밀양’의 영어 제목)이란 제목의 글을 썼어요. 그 비밀스러운 햇빛이 제 안에 들어온 날이었죠.”

그렇다고 바로 ‘저런’ 영화를 쓰겠다는 기개가 생기진 않았다. 대체 어떤 삶이어야 저런 영화를 만들 수 있을지 견적이 안 나왔으니까. 늘 그랬듯 혼자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데 같이 연극하던 선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이창동 감독님이 시나리오 가르치니까 영상원에 원서나 한번 내봐.’ “그래서 단편소설하고 이것저것 끌어모아 포트폴리오로 내고 자기소개를 썼어요. 내 인생의 실패담에 관해서. 서사에 대한 공부를 하기 전이었는데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 같아요. 서사는 실패하는 인간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요.”

성공은 종종 보편의 언어로 설명된다. “열심히 했다.” “이뤄냈다.” “정답을 찾았다.” 하지만 실패는 언제나 개별적이다. 같은 상황에서도 누구는 포기하고, 누구는 미쳐가고, 누구는 웃는다. 서사는 바로 그 불규칙하고 예측 불가능한 차이를 포착하는 예술이기에 실패를 통해 인간의 고유함을 드러낸다.

“우리가 닮고 싶은 이야기는 철학이나 종교, 그 밖의 훌륭한 학문들에서 제시하죠. 하지만 서사는 그 관념 안에 담기지 않는 ‘우리 각자의 이야기’인 것 같아요. 인간은 이해할 수 없고, 사는 데는 답이 없고, 신이 있는지도 없는지도 알 수 없는. 이 모든 게 서사인 것 같거든요. 예전에 저는 어떤 영화나 책을 보면 꼭 뭔가를 배우고 닮으려 했는데, 이젠 알아요. 그건 그냥 하나의 이야기일 뿐이라는 것을요. 세상에 있었던 것 같은 이야기, 있을 수 있는 이야기. 그러나 내 삶은 또 다른 이야기. 그 하나하나가 다 달라서 소중한 거구나, 그래서 세상엔 이렇게 많은 이야기가 있고 끊임없이 계속되는 거구나. 그래서 내가 친구를 만나 커피를 마시고, 자꾸 사랑을 하고 싶고, 영화를 보는 거구나. 그 다름은 만나야만 확인되는 거니까.”

진짜 서사를 만나기 위해 들어야 했다

결국 영상원에 들어가 만난 이창동 감독과 졸업 이후 10년 넘께 함께 시나리오를 써왔다. 2026년 넷플릭스에서 공개될 전도연·설경구·조인성·조여정 주연의 ‘가능한 사랑’ 각본도 함께 썼다. 하지만 마음속엔 늘 숙제가 남았다. 한 사람의 작가로 홀로 서서 나만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늘 그랬듯 일기장을 뒤적일 게 아니라면 밖으로 나가야 했다. 실패한 사람들, 이해받지 못한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진짜 서사를 만나기 위해.

“이 책을 쓰며 목표는 두 개였어요. 저만의 이야기를 찾는 것, 그 과정을 글로 남기는 것. 또 하나는, 영화가 정말 사람들에게 필요한가? 지금 시대에 영화가 의미 있나? 별로 의미도 없는데 내가 이렇게 힘들게 살고 있는 게 아닌가? 매체에서 홍보하는 영화를 위한 말 말고 진짜 사람들이 영화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알고 싶었어요.”

그 여정이 담긴 책 ‘내 모든 것’은 한 장르로 정의하기 어렵다. 인터뷰집처럼 시작해 에세이처럼 흐르다, 때론 단편소설이 되었다가 결국엔 기나긴 편지 한 통이 되어 도착한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가도 끝내 다 알 수 없는 타인의 삶이 끝없이 펼쳐진다.

“러시아문학이 저에겐 원체험이었어요. 인상 깊게 읽은 책들이 있어요. ‘닥터 지바고’를 쓴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40살 무렵에 쓴 자서전 ‘안전 통행증’이 그중 하나예요. 보통 자서전은 시간순으로 쓰지만, 이 책은 기억과 인상 속에서 자기가 만났던 사람들이 흘러가요. 타인을 통해 자신을 비추는 방식으로 썼다고도 볼 수 있어요. 또 하나는 연말에 재출간되는 번역서예요. ‘롤리타’를 쓴 러시아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자서전인데요. 자기 이야기인데도 픽션이 섞여 있어요. 제목이 ‘말하라, 기억이여’예요. 인간의 기억이 불완전하잖아요. 그 기억을 더듬어 쓰는 과정 자체에 픽션이 들어갈 수밖에 없죠. 원래는 제목을 ‘말하라, 므네모시네’로 하려 했대요. 므네모시네는 기억의 여신이고 그녀의 딸들이 뮤즈, 즉 예술의 여신들이에요. 결국 이 말은 모든 창작의 어머니는 ‘기억’이라는 거죠. 이런 책들이 내 몸에 남아 있어 ‘내 모든 것’을 쓸 때도 영향받은 것 같아요. 굳이 에세이나 인터뷰라는 틀에 가두지 말자고.”

 

끝없이 펼쳐지는 타인의 삶

 

긴 여정의 끝에 그는 배웠다. 영화라는 건 결국 우리들 각자의 것임을. “전 예전부터 영화는 결국 잔상이 된다고 생각했어요. 영화가 남긴 잔상을 관객은 각자의 몸 안에 품고 살아가고, 그게 뭐가 되지는 각자에게 맡겨진 일이겠죠. 그래서 저는 영화 자체가 아무리 반짝여도 그리 위대하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아무리 위대한 영화를 만든 작가나 감독이라고 해도 내가 사는 이 삶을 알 수도, 살아낼 수도 없으니까.”

 

정성은 비디오편의점 대표PD·‘궁금한 건 당신’ 저자

 

*남플리, 남들의 플레이리스트: 김수진 컬처디렉터와 정성은 비디오편의점 대표PD가 ‘지인’에게 유튜브 영상을 추천받아, 독자에게 다시 권하는 칼럼입니다. 격주 연재.

 

오정미 작가의 플레이리스트

 

① 김연아의 어릿광대를 보내주오

https://youtu.be/LrsH9vWq0Xg?si=3QUK7eh-jymsRnTy

그 시절 김연아의 피겨스케이팅은 영원하고 유일무이한 작품. 그중에서도 ‘어릿광대를 보내주오’는 볼 때마다 이유를 알 수 없이 자꾸 울고 싶어진다. 단 배경을 싹 지워버린 채로 온전히 그녀의 스케이팅에 집중하고 싶기는 한데, 인공지능이 조금만 더 발달하면 곧 가능해지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까만 밤하늘을 배경으로 김연아가 ‘어릿광대를 보내주오’를 춤추는 모습을 보고 싶다.

 

② 비 오는 날 시골 아궁이 장작

https://youtu.be/s3SmMjfetYM?si=jpH-_J5_KhW52pRa

빗소리와 장작 타는 소리 듣는 걸 좋아해서. 근데 두 소리를 같이 듣는 경험은 귀해서. 실제 마이크를 들고 나가 진짜 빗소리와 장작 타는 소리를 담았다 한다. 올겨울 마지막 작업인 책 번역을 끝내면 꼭 여행 가야지. 꼬옥.

 

③ 동물을 위한 노래 모음집

https://youtu.be/8HvKQZL-A1c?si=z9xn34hBAjsasFLB

누군가 그랬다. 음악이란 건 현존하는 모든 예술 형식 중에 다른 모든 차원을 뛰어넘는 가장 원초적이고 순수한 무엇이라고. 나는 책 ‘내 모든 것’을 쓰면서, 누군가 ‘삶에 영향을 준 음악이나 노래’에 대해 책을 쓴다면 그것 또한 참 재미와 의미가 있는 작업이겠다란 생각을 문득문득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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