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버닝’의 시나리오 작가이자 책 ‘내 모든 것’을 쓴 오정미 작가. 오정미 제공
어떤 책들은 입소문으로 먼저 도착한다. 처음 ‘내 모든 것’(무제 펴냄)의 존재를 들은 건 영화제 뒤풀이 자리였다. “이창동 감독 ‘버닝’ 시나리오작가가 평범한 사람들의 인생 영화를 묻는 인터뷰집을 냈는데 재밌대.” 처음엔 흘려들었다. 그러다 지인의 인스타그램 스토리에서 다시 그 책을 만났다. “어떤 책들은 분명히 나와 내 삶을 이해하고 있다. 내 고통을 이해하고 있다. 그것만큼 위로가 되는 건 없다. 그런 책은 꼭 필요한 시기에 만난다.” 어떤 고통일까. 책을 펼쳤다. 읽을수록 약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자기계발서를 읽으며 애써 쥐고 있던 악력이 풀려나가는 느낌. 맞다, 사실 우리… 사람이었지. ‘들키지 않으며 살 뿐, 평생 감추고 싶은 비밀을’ 지닌. 그러다 궁금해졌다. 이런 이야기를 하나씩 모은 사람은 누굴까. “그냥… 이런 겁 많고 느린 사람인 거죠.” 2025년 11월8일 실제로 만난 오정미 작가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처음 그가 글을 쓰게 된 건 몸이 좀 안 좋아서였다. 20대 중반, 러시아문학 석사를 마칠 무렵 돌발성 난청이 왔다. 그땐 대화도 힘들 정도여서 혼자인 시간이 길어졌다. 단편소설 등 글을 쓰기 시작했다. 번역 일을 하며 도서관에서 장편 시나리오를 쓰던 어느 날, 극장에서 한 영화를 보게 됐다. 이창동 감독의 ‘밀양’이었다.
“그전까진 영화를 보며 분석하기 바빴는데, ‘밀양’을 보고선 ‘이게 뭐지?’ 싶은 거예요. 진짜 같은 거예요. 시나리오가 아닌 진짜. 영화 속 신애(전도연)와 종찬(송강호)을 보면서 ‘이 세상 어딘가에 또 다른 신애가 있겠구나, 진짜 신애들’ 이런 생각이 들자 ‘지금 나를 짓누르는 고민들, 이거 아무것도 아니구나’로 이어졌어요. 그날 제 안에 뭔가가 씻겨 내려갔어요. 집에 와 블로그에 ‘시크릿 선샤인’(‘밀양’의 영어 제목)이란 제목의 글을 썼어요. 그 비밀스러운 햇빛이 제 안에 들어온 날이었죠.”
그렇다고 바로 ‘저런’ 영화를 쓰겠다는 기개가 생기진 않았다. 대체 어떤 삶이어야 저런 영화를 만들 수 있을지 견적이 안 나왔으니까. 늘 그랬듯 혼자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데 같이 연극하던 선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이창동 감독님이 시나리오 가르치니까 영상원에 원서나 한번 내봐.’ “그래서 단편소설하고 이것저것 끌어모아 포트폴리오로 내고 자기소개를 썼어요. 내 인생의 실패담에 관해서. 서사에 대한 공부를 하기 전이었는데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 같아요. 서사는 실패하는 인간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요.”
성공은 종종 보편의 언어로 설명된다. “열심히 했다.” “이뤄냈다.” “정답을 찾았다.” 하지만 실패는 언제나 개별적이다. 같은 상황에서도 누구는 포기하고, 누구는 미쳐가고, 누구는 웃는다. 서사는 바로 그 불규칙하고 예측 불가능한 차이를 포착하는 예술이기에 실패를 통해 인간의 고유함을 드러낸다.
“우리가 닮고 싶은 이야기는 철학이나 종교, 그 밖의 훌륭한 학문들에서 제시하죠. 하지만 서사는 그 관념 안에 담기지 않는 ‘우리 각자의 이야기’인 것 같아요. 인간은 이해할 수 없고, 사는 데는 답이 없고, 신이 있는지도 없는지도 알 수 없는. 이 모든 게 서사인 것 같거든요. 예전에 저는 어떤 영화나 책을 보면 꼭 뭔가를 배우고 닮으려 했는데, 이젠 알아요. 그건 그냥 하나의 이야기일 뿐이라는 것을요. 세상에 있었던 것 같은 이야기, 있을 수 있는 이야기. 그러나 내 삶은 또 다른 이야기. 그 하나하나가 다 달라서 소중한 거구나, 그래서 세상엔 이렇게 많은 이야기가 있고 끊임없이 계속되는 거구나. 그래서 내가 친구를 만나 커피를 마시고, 자꾸 사랑을 하고 싶고, 영화를 보는 거구나. 그 다름은 만나야만 확인되는 거니까.”
결국 영상원에 들어가 만난 이창동 감독과 졸업 이후 10년 넘께 함께 시나리오를 써왔다. 2026년 넷플릭스에서 공개될 전도연·설경구·조인성·조여정 주연의 ‘가능한 사랑’ 각본도 함께 썼다. 하지만 마음속엔 늘 숙제가 남았다. 한 사람의 작가로 홀로 서서 나만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늘 그랬듯 일기장을 뒤적일 게 아니라면 밖으로 나가야 했다. 실패한 사람들, 이해받지 못한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진짜 서사를 만나기 위해.
“이 책을 쓰며 목표는 두 개였어요. 저만의 이야기를 찾는 것, 그 과정을 글로 남기는 것. 또 하나는, 영화가 정말 사람들에게 필요한가? 지금 시대에 영화가 의미 있나? 별로 의미도 없는데 내가 이렇게 힘들게 살고 있는 게 아닌가? 매체에서 홍보하는 영화를 위한 말 말고 진짜 사람들이 영화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알고 싶었어요.”
그 여정이 담긴 책 ‘내 모든 것’은 한 장르로 정의하기 어렵다. 인터뷰집처럼 시작해 에세이처럼 흐르다, 때론 단편소설이 되었다가 결국엔 기나긴 편지 한 통이 되어 도착한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가도 끝내 다 알 수 없는 타인의 삶이 끝없이 펼쳐진다.
“러시아문학이 저에겐 원체험이었어요. 인상 깊게 읽은 책들이 있어요. ‘닥터 지바고’를 쓴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40살 무렵에 쓴 자서전 ‘안전 통행증’이 그중 하나예요. 보통 자서전은 시간순으로 쓰지만, 이 책은 기억과 인상 속에서 자기가 만났던 사람들이 흘러가요. 타인을 통해 자신을 비추는 방식으로 썼다고도 볼 수 있어요. 또 하나는 연말에 재출간되는 번역서예요. ‘롤리타’를 쓴 러시아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자서전인데요. 자기 이야기인데도 픽션이 섞여 있어요. 제목이 ‘말하라, 기억이여’예요. 인간의 기억이 불완전하잖아요. 그 기억을 더듬어 쓰는 과정 자체에 픽션이 들어갈 수밖에 없죠. 원래는 제목을 ‘말하라, 므네모시네’로 하려 했대요. 므네모시네는 기억의 여신이고 그녀의 딸들이 뮤즈, 즉 예술의 여신들이에요. 결국 이 말은 모든 창작의 어머니는 ‘기억’이라는 거죠. 이런 책들이 내 몸에 남아 있어 ‘내 모든 것’을 쓸 때도 영향받은 것 같아요. 굳이 에세이나 인터뷰라는 틀에 가두지 말자고.”
끝없이 펼쳐지는 타인의 삶
긴 여정의 끝에 그는 배웠다. 영화라는 건 결국 우리들 각자의 것임을. “전 예전부터 영화는 결국 잔상이 된다고 생각했어요. 영화가 남긴 잔상을 관객은 각자의 몸 안에 품고 살아가고, 그게 뭐가 되지는 각자에게 맡겨진 일이겠죠. 그래서 저는 영화 자체가 아무리 반짝여도 그리 위대하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아무리 위대한 영화를 만든 작가나 감독이라고 해도 내가 사는 이 삶을 알 수도, 살아낼 수도 없으니까.”
정성은 비디오편의점 대표PD·‘궁금한 건 당신’ 저자
*남플리, 남들의 플레이리스트: 김수진 컬처디렉터와 정성은 비디오편의점 대표PD가 ‘지인’에게 유튜브 영상을 추천받아, 독자에게 다시 권하는 칼럼입니다. 격주 연재.
① 김연아의 어릿광대를 보내주오
https://youtu.be/LrsH9vWq0Xg?si=3QUK7eh-jymsRnTy
그 시절 김연아의 피겨스케이팅은 영원하고 유일무이한 작품. 그중에서도 ‘어릿광대를 보내주오’는 볼 때마다 이유를 알 수 없이 자꾸 울고 싶어진다. 단 배경을 싹 지워버린 채로 온전히 그녀의 스케이팅에 집중하고 싶기는 한데, 인공지능이 조금만 더 발달하면 곧 가능해지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까만 밤하늘을 배경으로 김연아가 ‘어릿광대를 보내주오’를 춤추는 모습을 보고 싶다.
② 비 오는 날 시골 아궁이 장작
https://youtu.be/s3SmMjfetYM?si=jpH-_J5_KhW52pRa
빗소리와 장작 타는 소리 듣는 걸 좋아해서. 근데 두 소리를 같이 듣는 경험은 귀해서. 실제 마이크를 들고 나가 진짜 빗소리와 장작 타는 소리를 담았다 한다. 올겨울 마지막 작업인 책 번역을 끝내면 꼭 여행 가야지. 꼬옥.
③ 동물을 위한 노래 모음집
https://youtu.be/8HvKQZL-A1c?si=z9xn34hBAjsasFLB
누군가 그랬다. 음악이란 건 현존하는 모든 예술 형식 중에 다른 모든 차원을 뛰어넘는 가장 원초적이고 순수한 무엇이라고. 나는 책 ‘내 모든 것’을 쓰면서, 누군가 ‘삶에 영향을 준 음악이나 노래’에 대해 책을 쓴다면 그것 또한 참 재미와 의미가 있는 작업이겠다란 생각을 문득문득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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