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곁불이 ‘사회’를 만든다

계몽하기 위해 계엄? ‘극단적 정치’만 타오르는 지옥 대신 곁불로 초대하고 환대하는 ‘사회’로
등록 2025-02-07 22:41 수정 2025-02-14 15:40
2024년 10월1일 오후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열린 제76주년 국군의날 시가행진 행사에 참석한 내란죄 피의자 윤석열 대통령. 두 달여 뒤, 그는 계엄을 선포하고 ‘국민에게 알리기 위해 계엄을 선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겨레 김태형 기자

2024년 10월1일 오후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열린 제76주년 국군의날 시가행진 행사에 참석한 내란죄 피의자 윤석열 대통령. 두 달여 뒤, 그는 계엄을 선포하고 ‘국민에게 알리기 위해 계엄을 선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겨레 김태형 기자


졸업전시회를 갔는데 멀리서 두 학생이 반갑다며 뛰어왔다. 이번 학기에 수업을 들은 학생들이다. 내가 자기들을 알아보지 못할까봐 오자마자 “저희예요, 저희. 불량학생들! 알아보시죠?” 하면서 킥킥거리고 웃는다. 당연히 알지 왜 모르겠냐며 같이 웃고 “자기들이 불량학생인 것은 아는구먼”이라고 답하니 더 깔깔거리며 웃는다. “그럼요. 그래도 교수님이 그렇게 말해주셔서 너무 기뻤어요”라고 답한다.

구경해도 괜찮은 수업

두 학생의 수업 태도는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는 ‘ 불량 ’ 했다 . 세 겹으로 둥글게 배치된 교실에서 가장 멀리 있는 바깥쪽에 앉은 학생들이다 . 보통 이 자리는 “ 나를 건드리지 마시오 ” 라고 말한다 . 수업을 방해할 생각도 없지만 열심히 참여할 생각도 없으니 그냥 서로 모른 척하면서 한 학기를 보내자는 학생들이 주로 앉는다 . 물론 가끔 수업을 열심히 듣지만 내성적이고 사회적 교류를 무서워하는 학생들이 앉기도 하지만 말이다 .

예상했던 대로 그 둘은 수업에서 계속 딴짓하고 있었다. 때로는 다른 수업의 과제를 하는 것 같았고, 때로는 인터넷 서핑을 하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물론 가끔 고개를 들고 강의를 들을 때도 있지만 그리 많지는 않았다. 눈에 거슬리지 않는 수준인 것으로 봐서 수업에 불만을 가진 것은 아니다. 어빙 고프먼의 개념대로 하면 수업의 진행 ‘노선’(Line)을 최대한 존중할 테니 듣는 자기 노선도 상호 인정받기를 바라는 태도다.

광고

중간고사가 지나가면 쉬는 시간에 슬슬 수업에서 ‘낙오’된 학생들에게 다가간다. 수업을 왜 수강하게 됐는지 묻고 수업 듣는 게 어떤지 물어본다. 대부분 처음에는 다짜고짜 “죄송합니다”라고 하든가 “재밌게 잘 듣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지만 수업 시간에 보인 태도를 내가 잘 관찰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열심히 안 들어도 된다”며 “다음 학기에 수업할 때 어떻게 하면 더 좋을지를 물어보는 것이니 후배들 도와주는 차원에서 말해주면 된다”고 말하면 대부분 이러저러한 아쉬움과 어려움을 이야기한다.

이 두 명도 처음엔 수업이 재밌고 문제없다고 말하다가 곧 사실대로 말했다. 큰 기대 없이 수강 신청을 했다고 한다. 지방에 있는 대학이라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시간표를 효율적으로 짜는 것이고 이미 졸업 작품도 다 제작했기 때문에 성적과 상관없이 흥미로운 수업을 듣기 위해 수강 신청했다고 한다.

흥미로운 수업인데 태도가 그리 ‘훌륭’하지는 않은 것 같다고 부드럽게 말하자 웃으면서 사실 강의계획서에서 딱 한 주 강의를 보고 신청했다고 한다. 만화를 그리지만 영화를 훨씬 더 좋아하고 영화적 기법을 잘 사용하는데 마침 자기가 좋아하는 이길보라 감독의 강의가 있다고 해서 그거 들으려고 신청했단다. 그 수업이 너무 좋았고 만족했기 때문에 다른 불만은 없고 기대를 다 채웠다는 것이다.

한 가지라도 수업에서 기대를 채운 것이면 됐으니 남은 학기 동안 다른 강의는 구경해도 된다고 했다. ‘구경’이라는 단어를 쓰자 학생들은 놀라는 눈치였다. 수업에서 진행되는 모든 내용에 다 집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했다. 내가 관심이 없는 분야에, 그리고 또 아무리 관심이 있더라도 사람마다 욕망의 강도가 다른데 다 같은 강도로 참여할 수는 없으며 구경하다보면 없던 관심도 생기는 법이다.

광고

곁불 통해 순환하는 초대와 환대

다만 아예 관심을 끄기보다는 구경은 하라고 당부했다. 구경하는 것을 관찰하면서 학생들이 구경에서 관심으로, 관심에서 참여로 이어지는 지점을 잘 포착해야 좀더 많은 학생을 의미 있게 수업에 초대할 수 있으니 그것만 해도 수업 진행과 발전에 큰 도움을 주는 ‘참여자’라고 말했다. 모두가 활활 타오르는 참여자가 될 필요는 없고 ‘곁불’을 쬐는 정도로 참여하는 것도 의미 있으며 내 수업은 언제든 곁불에 초대한다고 덧붙였다.

두 학생의 수업 태도가 드라마틱하게 바뀌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전보다 훨씬 더 ‘구경꾼’으로서의 역할은 잘 수행했다. 수업을 들으면서 구경에서 관심으로 나아가는 포인트도 많아졌고 길어졌다. 어떤 순간들은 왜 이 대목에서 관심을 보이는지 알 수 없어 되물어보기도 했다. 흔한 말로 그 대화에서 모르던 ‘요즘 학생들’의 성향을 알게 되면서 동시대의 특징을 파악하는 수확이 있기도 했다. 학생들에게 수업에서 열정적 참여자가 될 게 아니라 곁불을 쬐어도 된다고 말했지만 그 곁불로부터 나 또한 배우고 얻는 것이 만만찮다. 곁불의 가치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적인 것이다.

수업하건 다른 교육 활동을 하건 ‘곁불’이 가능한 구조를 만들려고 노력한다. 될 수 있는 한 강의실은 둥글게 앉되 세 겹 정도로 앉는다. 한 열만 있으면 구경꾼은 끼기가 쉽지 않다. 그 자리는 곁불을 쬐라고 만든 자리다. 지난 글(제1548호 참조)에서 다룬 것처럼 현장 참여 프로그램을 갈 때나 특강에는 휴학생이나 졸업생들도 참여할 수 있도록 개방한다. 학교를 떠나고 나면 끝이 아니라 학교 교육의 곁불은 쬘 수 있도록 했으면 해서다.

다만 곁불을 쬐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있으며 그 일은 해줘야 한다. 수업에서 곁불을 쬐면 구경꾼 역할을 해줘야 하며 그 정도 소통은 나눠줘야 한다. 특강에 참여하거나 현장 참여를 하면 초대해준 학교에 감사 편지를 쓰고 이후 프로젝트에 성의를 보여줘야 한다. 그래야 곁불을 개방하고 초대하는 사람과 초대받은 사람 사이에 서로에게 기여하는 상호성이 보장된다.

광고

내가 곁불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곁불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를 배운 것은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조한혜정 명예교수를 통해서였다. 그는 1990년대부터 강의에서 모두가 열성적으로 참여하라고 질책하지 않았다. 언저리에 머물면서 관찰하는 것을 허용했고 오히려 그 관찰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그렇게 그는 학생들을 ‘초대하는 사람’이었다. 곁불로 초대하고, 곁불을 쬐는 사람을 또 수업에 의미 있게 기여하는 사람으로 초대했다. 물론 불의 중심부에 있는 사람들은 이 곁불의 이야기를 들으며 또 발전할 수 있었다. 그렇게 곁불을 통해 초대와 환대, 중심과 언저리는 순환됐다. 이런 곁불이 바로 사회가 형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잡아주는 ‘안감’이다.

피청구인 윤석열 법률대리인단 조대현 변호사(전 헌법재판관)가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 2차 변론기일에 출석해 있다. 조 변호사는 2025년 1월23일 열린 4차 변론기일에서 “국민들은 비상계엄을 계몽령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등의 주장을 펼쳤다. 공동취재사진

피청구인 윤석열 법률대리인단 조대현 변호사(전 헌법재판관)가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 2차 변론기일에 출석해 있다. 조 변호사는 2025년 1월23일 열린 4차 변론기일에서 “국민들은 비상계엄을 계몽령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등의 주장을 펼쳤다. 공동취재사진


‘극단주의’와 ‘계몽주의’의 폭력성

곁불을 싫어하는 원리가 있다. 돈을 내지 않은 사람은 아무것도 얻지 말아야 한다는 시장 논리다. 서비스는 돈을 낸 사람에게만 제공되는 것이고 그 사람의 곁에서 불을 쬐는 것은 반칙이라고 생각하는 시장은 곁불을 싫어한다. 심지어 극단적인 시장 논리는 ‘이삭 줍기’마저 금지한다. 그 또한 돈을 주고 사야 하는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절도다. 그래서 시장은 곁불에까지 일일이 가격을 매기고 싶어 한다. 사회는 이런 극단적 시장에 저항한다.

두 번째는 극단적 정치다. 정치가 극단화되면 열정적 참여자들만 남는다. 나머지 사람들은 이쪽이냐 저쪽이냐를 강요받는다. 여기서는 활활 타오르든가 아니면 아예 빠지든가 둘 중 하나를 해야지 곁불을 쬐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경험적으로 사람들은 이런 불에 가까이 가면 곁불을 쬐기는커녕 기회주의자 혹은 회의주의자로 낙인찍혀 타죽어버린다는 것을 잘 알기에 아예 가지 않는다. 그만큼 극단적 정치에는 극단적인 참여자들만 남는다. 사회는 극단적 정치에 저항한다.

이 극단적 정치를 따르는 사람들은 매우 열정적인 ‘계몽주의자들’이다. 이들은 곁불 따위로는 사람이 계몽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계몽의 가장 좋은 수단은 몽둥이다. 계몽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니라 때려서라도 깨치게 해야 한다. 솔직히 서구의 철학이 반성한 계몽주의의 이 근본적 폭력성이 한국에서 ‘계몽’령으로 탈바꿈해 현실화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헌정이라는 근본적 질서를 파괴한 계엄이 ‘계몽’령이라고 한다. 계몽하기 위해서 몽둥이를 든 것이라 내란이 아니라 계몽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냉소적인 ‘계몽주의’다. 이들은 누가 무엇인가를 물어보면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며 ‘공부는 셀프’라고 말한다. 그런 것까지 다 일일이 떠먹여줘야 하느냐며 면박을 주고 ‘초심자’들을 초대하기는커녕 밀어낸다. 이런 냉소는 이른바 진보진영에서 종종 일어났다. 먼저 계몽돼 깨어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보기에 그렇지 못한 이들, 즉 여태 깨어나지 못한 이들은 한심하다. 그렇다고 이들을 깨이게 하고 싶지 않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몽둥이를 들고 이들을 깨우는 폭력도 미개하다. 그러니 ‘가르치려 들지 마라’의 데칼코마니인 ‘공부는 셀프’를 냉소적으로 말하며 곁불을 꺼버린다. 곁불은 이런 냉소에 저항한다.

공화국 지키는 두 개의 불

한국 사회는 점점 곁이 부재하거나 곁에 가면 태워버리는 ‘활활 타는 불’만 남은 지옥이 돼가고 있다. 그러니 아예 곁을 내주지도 않거니와 다가서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위기에 처한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두 개의 불을 실천해야 한다. 하나는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타오르는 응원봉의 불, 더하여 사람들을 끊임없이 초대하고 그들이 기여할 수 있게 하여 시장과 국가를 견제하며 균형을 맞추는 사회를 구축하고 형태를 갖출 수 있도록 안을 단단히 잡아주는 안감의 공간을 만드는 곁불 말이다. 그중 무엇보다 배움의 곁불에 냉소적이거나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 이 일방적인 파괴적 폭력의 ‘계몽’령이라는 언어 ‘도난’을 종식하고 곁불을 쬘 수 있는 자리를 내주는 ‘사회’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생겨나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고민을 같이 나눕니다. 격주 연재.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광고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