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만 천위쉰 감독의 2025년 영화 ‘안개 낀 시절’에서 황위윈(왼쪽)이 동생 아웨(오른쪽)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 영화 스틸컷
장제스 국민당 정부의 백색공포 억압이 한창이던 대만의 1953년. 비밀경찰에게 공산당 연루 혐의를 받고 인삼밭에 숨어 살던 황위윈은 몰래 음식을 가져다준 동생 아웨에게 자신이 쓰고 있는 그림책 속 물방울 이야기를 들려준다.
강에 사는 물방울 아비와 쯔위는 자유롭게 떠다니며 온 세상 풍경을 볼 수 있는 구름을 부러워했다. 얼마 뒤 둘은 마침내 수증기가 되어 하늘로 떠오른 뒤 구름이 됐다. 둘은 한 번도 본 적 없던 세상을 내려다보며 마음껏 경치를 즐겼다. 그러던 어느 날 사막 위에 이르자 한 선배 물방울이 “이제 내려가자. 이 땅은 우리가 적셔줘야 해”라고 말했다. 둘은 아직 세상을 더 보고 싶다고 했지만 선배는 “우리가 땅을 적셔야 식물이 자랄 수 있어”라고 했다. 그러자 쯔위가 물었다. “우리가 저 사막을 농지로 만들 수 있어요?” 선배는 말했다. “물방울 한두 개로는 당연히 할 수 없지. 하지만 우리는 수백만 개의 물방울이잖니? 너희가 마음만 먹으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단다.” 물방울들은 곧 빗방울이 되어 사막 위로 쏟아져 내렸다.
이야기를 들은 아웨는 싱겁다는 듯 “사막은 농지가 됐어?”라고 묻는다. 위윈은 이렇게 답한다. “나도 몰라. 어쩌면 됐을지도, 어쩌면 아닐지도.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 천위쉰 감독의 2025년 영화 ‘안개 낀 시절’에 담긴 장면이다.
한국 정치에서 진보정당은 아비와 쯔위 같은 이들이 척박한 사막 위로 수없이 쏟아져 내렸다가 증발한 역사 위에 건설됐다. 그동안의 한국 정치는 국민의힘 계열 정당이 기득권을 위한 폭력을 바탕으로 주류를 차지했다면, 더불어민주당 계열 정당이 이 폭력에 대한 저항을 정치적 동력 삼아 주류에 맞서는 동시에 적대적 공생 관계를 맺어왔다. 그러다 두 번의 탄핵을 거치면서 이제는 민주당이 주류 자리를 탐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의 ‘민주당은 중도보수’ 선언은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두 당의 적대적 공생 관계 탓에 진보정당은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사막 위를 걸어야 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13년이 지난 2000년이 되어서야 민주노동당을 창당할 수 있었고, 2004년 총선에서 최초로 의회에 진입했으나, 짧은 화양연화 끝에 여러 당으로 쪼개어지며 다시 암흑 속으로 돌진하게 됐다. 2020년 총선과 2024년 총선에서는 두 당이 연거푸 ‘위성정당’으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해킹하면서, 정의당과 노동당 등 진보정당은 20년 만에 처음으로 국회 밖으로 밀려났다. 급기야 이번 6·3 지방선거에서 정의당은 ‘광역비례 3% 이상 득표'에 실패해 2028년 총선 등 전국단위 선거의 법정 방송토론회 초청 자격도 잃게 됐다.

허승규 경북 안동시의원 당선자가 2026년 6월8일 임하면 오대리에서 주민과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안동(경북)=이종근 선임기자 root2@hani.co.kr
이런 사막 위에서도 수없이 물방울을 떨어뜨린 정치인이 있었다. 두 번의 낙선 끝에 이번 지방선거에서 ‘보수의 성지’ 경북 안동의 시의원으로 당선되며 2012년 녹색당 창당 이후 첫 공직선거 당선자가 된 허승규가 그중 한 명이다. 이번호는 지난 8년 동안 있었던 허승규의 지역 밀착 정치를 깊이 들여다보며 진보 정치가 어떻게 다시 ‘수백만 개의 물방울’이 되어 ‘사막을 농지로’ 만들 수 있을지 살펴본다.
참, ‘안개 낀 시절’에는 결국 총살되고 만 위윈이 남긴 또 다른 결말의 물방울 이야기가 나온다. 영화의 제목도 이 또 다른 이야기에서 비롯했다.
이재훈 편집장 nang@hani.co.kr
*‘만리재에서’는 편집장이 쓰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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