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는 장애인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22개 법률이 있다. 유엔장애인권리협약과 장애인차별급지법 등 체계적인 보호장치도 마련돼 있다. 그러나 법의 존재가 곧장 장애인의 권리 실현을 담보하진 못한다. 시대의 흐름에 맞게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사법부 판결들이 장애인 권리의 실질적 실현을 결정짓고, 사회를 변화시킨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는 매년 사법부 판결을 면밀히 분석해 장애인 인권의 ‘디딤돌’이 되는 판결과 ‘걸림돌’이 되는 판결을 선정하고 있다. 올해도 2023년 1월∼12월 선고된 판결 중 ‘장애’를 언급한 판결, 장애와 관련된 사안이 중요하게 다뤄진 판결 4천여건을 수집했다. 올해는 이 가운데 ‘디딤돌 판결’ 12건과 ‘걸림돌 판결’ 4건, ‘주목할 판결(장애인 인권과 관련된 많은 고민을 불러일으킨 판결)’ 2건을 선정했다.
최종 선정위원으로 강송욱 법무법인 디엘지 변호사, 김성태 서울장애인권익옹호기관 인권증진팀 팀장, 배융호 한국환경건축연구원 이사, 변재원 소수자정책연구자, 윤여형 법무법인(유한) 태평양 변호사, 임한결 법무법인 원곡 변호사, 조인영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 조한진희 다른몸들 대표가 참여했다. —편집자주
2022년 3월4일 제20대 대통령 선거 때였다. 2급 지적장애인 ㄱ·ㄴ씨와 중증 지적 뇌병변장애인 ㄷ씨는 투표하기 위해 사회복지사들과 사전투표소를 방문했다. 이들이 투표에 참여하기 위해선 자신을 익숙하게 도와줄 사람이 필요한 터였다. 그런데 현장 투표사무원들은 사회복지사의 동행을 거부하고, 각자 단독으로 기표소에 들어갈 것을 종용했다. 이 상황에서 ㄱ씨는 간신히 혼자 투표를 마쳤지만 ㄴ씨, ㄷ씨는 그러지 못했다. ㄷ씨는 시력이 좋지 않아 결국 투표할 수 없는 상황이 됐고, 그제야 투표사무원이 도왔다. 혼자 기표소에 들어간 ㄴ씨도 결국 “이게 뭐야”라고 소리 지르며 어려움을 겪은 뒤에야 투표사무원이 투표를 도왔다. ㄱ씨는 “다음 선거에서는 도움이 필요할 때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평소 익숙하게 이들을 도운 사회복지사들이 도왔다면 원활하게 진행됐겠지만 그렇지 못했다.
이들은 투표보조인 제도가 이미 공직선거법에 존재하는데 이런 방식으로 운영하는 것은 헌법상 권리를 침해하고 장애인차별금지법을 위반했다고 보고, 차별구제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법원(부산지법 제9민사부, 재판장 신형철 판사)은 원고들의 청구를 기각하고 소송 비용을 원고들이 부담하도록 했다. 투표보조는 필요하지만, 현행 법령에 따른 투표보조인 제도가 이미 충분한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법원은 투표보조인 제도의 명확한 기준과 절차가 필요하다는 점은 강조했으나, 원고들이 주장하는 장애인차별금지법에 따른 손해배상청구는 인정하지 않았다. ‘투표관리매뉴얼의 취지와 내용을 각급 선관위에 전파하고 투표사무원이 이를 잘 숙지하도록 교육해야 함에도 이를 성실하게 이행하지 않았다’고 본 원고들과 달리, 법원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투표사무원들에 대해 매뉴얼을 제공하고 교육도 하고 있다고 봤다.
이 판결은 2024년의 장애인 인권 걸림돌 판결 중 하나로 선정됐다. “원고들의 청구를 기각한 법원의 판단은 현행 법령과 제도가 이미 적절한 투표 보조를 제공하고 있으며, 추가적인 법적 보장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에 기반하였으나, 이는 행정 절차의 입장만을 검토한 소극적인 해석으로서 원고들의 실질적인 선거권과 평등권 보장을 위한 해답이 될 수 없다”는 게 선정 의견이다.
선정위원인 변재원 소수자정책연구자는 “쉽게 이해하기 위해 현장 상황을 가정하자면 가족이 없거나 가족이 함께하기 힘든 상황인 지적장애인이, 평소 익숙한 사회복지사의 도움을 받아 투표장에 갔는데, 처음 본 나이 많은 남성(투표사무원)이 와서 (좁은 공간으로) 데려간다고 생각해보자. 갑자기 낯선 사람이 자신을 데려가면 지적장애인 당사자 입장에선 무섭고 이 상황이 위협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며 “향후 장애인의 선거권 보장을 위한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며, 선거관리위원회 및 관련기관의 투표보조인 제도 운영에 대한 재검토와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장애인 당사자도 당연히 대통령이 어떤 사람이 되느냐에 따라 자신들이 원하는 정책의 방향이 실현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기 때문에, 이 과정에 원활하게 참여할 수 없다면 대의민주주의 제도 참여에서 배제받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서울시설공단은 장애인콜택시를 운영한다. 그런데 여기엔 탑승제한기준이 있다. 발달장애인은 운전석 옆 보조석에 앉지 못하고 보호자와 함께 ‘운전석 대각선 뒷좌석’에 앉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선정위원인 배융호 한국환경건축연구원 이사는 “발달장애인은 위험하다, 언제든 우리를 해칠 수 있다는 편견이 들어 있다”며 “보조석에 앉는 이득이 뭐냐고 묻는데, 그건 자기결정권의 문제이고 일반 시민에게 선택의 권리가 있듯 장애인에게도 권리가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같은 문제의식에서 발달장애인과 장애인 시민단체는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했다. 그런데 이 진정은 기각돼 행정심판을 청구해야 했다. 다행히 행정심판은 인용돼 인권위가 서울시설공단에 시정 권고를 내렸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서울시설공단은 이 시정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인권위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서울행정법원 제13부(재판장 박정대 판사)는 서울시설공단의 손을 들어줬다. 논거는 장애인콜택시(특별교통수단)가 장애인차별금지법 제2조에서 정한 ‘교통수단’에 해당하지 않으므로 장애인 차별이 될 수 없고, 권고는 위법하다는 것이다. 또 가정적 판단을 했는데 ‘탑승 자체에 대한 제한이 아니고 발달장애인으로 한정’했고 ‘발달장애인이 도전적 행동을 하는 사례들이 확인’되고 있으며 뒷좌석이 아닌 ‘보조석에 탑승함으로써 얻는 편익이 무엇인지 밝히기 어렵’기에 정당한 차별이라고 봤다.
이 판결도 2024년의 장애인 인권 걸림돌 판결 중 하나로 선정됐다. 선정위원으로 참여한 임한결 법무법인 원곡 변호사는 “발달장애인이 민간 택시를 불러 탑승할 때 특정 좌석에만 앉는다고 제한할 수 없고 그렇게 하지도 앉는다”며 “해당 판결은 마치 법기술자처럼 하나의 정의 조항만을 가지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어려운 장애인들의 유일한 교통수단인 장애인콜택시를 법적으로 장애인과 아무 관련이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렸다”고 평가했다. 특히 “선정위원 중 한 명은 이 사건이 한국판 몽고메리 버스 사건(과거 미국의 백인은 백인 전용석인 앞좌석에, 흑인은 흑인 전용석인 뒷좌석에만 앉을 수 있었던 인종차별에 대한 항의)이라고 했다”며 “굳이 가정적 판단까지 앞세워 차별 정당화 논리를 설시한 이 판결은 선정위원 만장일치로 걸림돌 판결이 됐다”고 밝혔다.
3급 정신장애인 ㄹ씨는 2020년 4월 경기 화성시 공무원 9급 일반행정 임용시험 장애인 전형에 응시해, 필기시험에서 합격했다. 유일한 필기시험 합격자였고, 저소득층 선발전형 합격선보다 높은 성적을 받았다. 꾸준한 치료를 통해 다른 직장생활도 하는 등 일상을 꾸려온 그는 합격의 꿈에 부풀었다. 하지만 면접 관문 앞에 좌절해야 했다. 일반적인 채용 면접과 달리 면접위원들은 직무와 관련한 질문만 한 게 아니라 장애에 대해 여러 차례 물었다. 약을 먹고 있는지, 약 때문에 잠이 많은 건 아닌지, 장애 유형과 정도는 어떤지 등이었다. ㄹ씨는 결국 ‘미흡’ 등급을 받았고, 이후 추가 면접시험이 있었지만 다시 ‘미흡’ 등급을 받았다.
대법원은 공익변호사들의 도움을 받아 수원지법에 불합격 처분 취소 소송을 제기한 ㄹ씨의 손을 들어줬다. 대법원 제1부(재판장 대법관 노태악)는 장애인 전형을 통해 ‘장애인을 채용’하려는 사용자가 면접시험에서 장애를 이유로 장애인 응시자를 불리하게 대했다면, 장애인차별금지법 위반이라고 판단했다. 수원지법 1심 재판부는 ‘최초 면접시험에서 직무 질문이 아닌 장애 관련 질문을 한 것은 위법하지만, 추가 면접에서는 새로운 면접위원이 참여했고 장애 관련 질문이 나오지 않아 차별행위가 없다’며 화성시의 손을 들어준 반면 2심 재판부는 ‘화성시 등은 불합격 처분을 취소하고 이에 대한 위자료 5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한 터였다.
대법원의 이 판결은 2024년의 장애인 인권 디딤돌 판결 중 하나로 선정됐다. 선정위원인 조인영 법무법인 공감 변호사는 “법원이 고용에 대해 ‘장애인의 소득 기반으로서 인격실현과 사회통합을 위한 중요한 매개체’라고 명시해, 고용상 장애인 차별 위법성을 강조했다”며 “형식적인 추가 면접으로 하자가 치유되었다는 피고(수원시)의 주장에 대해 실질적 하자가 치유되기 어려운 사정을 고려해, 장애인 차별을 인정한 판결”이라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중증 지체장애인 ㅁ씨는 2020년 11월 장애인콜택시 이용을 신청했다가 거절당했다. 교통약자법상 ‘보행상 장애가 심각한 정도’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ㅁ씨는 심한 상지기능 장애, 심하지 않은 하지기능 장애, 종합적으로 ‘장애 정도가 심한 장애인’으로 판정된 바 있는데, 여기서 하지 장애가 심하지 않다는 이유로 콜택시 이용을 거부당한 것이다.
서울고법 민사9부(부장판사 성지용)는 ㅁ씨가 서울시와 서울시설공단을 상대로 낸 장애인 차별금지 청구 소송에서 ㅁ씨 손을 들어줬다. 1심 재판부는 하지 장애가 심하지 않다는 이유로 장애인콜택시 탑승을 불허한 서울시와 공단의 처분이 정당하다고 판단했지만 항소심 재판부의 판단은 달랐다. 항소심 재판부는 “어느 부위에 장애가 있든 장애 정도가 심한 장애인이 버스나 지하철 등 이용이 어려울 경우 장애인콜택시와 같은 특별교통수단을 이용하지 않고서는 이동이 곤란하다고 할 수 있다”며 “이들에게 특별교통수단을 제공하는 것이 교통약자법 입법 취지”라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서울시와 공단에 장애인콜택시 이용을 허가하라고 명령했다.
이 판결도 2024년의 장애인 인권 디딤돌 판결 가운데 하나로 선정됐다. 선정위원인 배융호 한국환경건축연구원 이사는 “서울시 등 특별교통수단 운영 기관의 자의적 해석을 막을 수 있는 중요한 판례가 된다”며 “최근 교통약자법 시행규칙 개정 등 현재 정책의 방향이 점진적으로 장애인콜택시 이용 대상자를 축소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손고운 기자 songon11@hani.co.kr
*이 밖의 장애인 인권 디딤돌, 걸림돌, 주목할 판결들은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누리집(cowalk.or.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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