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급식실에서 조리실무사로 대체근로를 하고 기사를 쓰기 위해 준비할 때다. 학교 제출 필수 서류인 보건증을 떼러 보건소에 갔다. 담당자에게 용건을 얘기하고 신분증과 서류를 내밀었다. 그런데 담당자가 옛 주소를 현주소로 착각하는 듯했다. 최근에 이사해 현주소가 신분증 뒷면에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쪽에 주소가 있어요”라고 알려주려는데, 갑자기 담당자는 확 손을 빼더니 잠시 허공을 보며 정색했다. 그는 “제가 볼게요” 하더니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불편한 기색을 표했다. 그 뒤 이어진 말도 무척 차가워서, 잠시 무안한 마음이 들었다.
보건소 화장실에 가서 거울을 봤다. ‘하루에도 찾아오는 주민이 원체 많을 테니 모두에게 친절하게 대할 수 있겠나’ 생각하며 거울을 보고 억지 미소를 지어봤다. 스스로 ‘괜찮아. 과민반응이야’ 다독이며 화장실에서 나왔다. 그때였다. 보건소 한쪽에서 중년 여성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게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쪽은 아까 그 보건증 발급 담당자가 있는 곳이었다. ‘식품, 유흥1종, 학교급식’ 중 용도를 표기해 보건증을 발급받는 그 코너에서 이 중년 여성은 담당자에게 “그런 식으로 살지 말라”느니, “태도를 배워야 한다”느니 말하며 모욕을 주고 있었다. 이번엔 그 담당자가 놀라고 겁에 질린 듯한 표정이었다. 우리는 왜 서로에게 이렇게 상처받거나 혹은 상처를 주며 사는 걸까.
취재 과정에서 마음이 착 가라앉는 순간이 여러 번 있었다. 학교 행정 관계자가 말귀를 잘 알아듣지 못하자 톡 쏘아붙일 때, 조리실무사들의 관리자 역할을 하는 젊은 남성 조리사가 호칭은 “여사님”이라고 존대하면서도 실제 행동과 말투는 하대할 때, 90분 동안 단 1초도 쉬지 않은 채 식판을 세척한 뒤 손이 덜덜 떨려오는데 관리자가 막대걸레를 내밀며 “이제 바닥을 닦으라”고 말할 때, 뜨거운 불 앞에서 조리하느라 속옷까지 땀에 다 젖었는데 20만원짜리 제빙기가 없어 포트에 물을 끓여 얼린 음료를 녹여 먹었을 때, 휴게실 바닥에 누워 다른 조리실무사들과 함께 누가 어디까지 얼마나 다쳐봤으며 어떤 병원에 다니고 있는지 얘기를 나눌 때….
나는 이 기분들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러다 기사가 나간 뒤 댓글을 보고서야 이 기분의 이름을 알았다. “현 종사자로서, 곧 떠납니다. 보람도 없고, 노력에 비해 보상도 없는 일. 최저임금이지만 용기 내 시작했던 일인데 노동 강도보다 제 자신이 잔반이 되는 기분이 드는 일입니다.” 아, 그래. 그 마음이 ‘잔반이 된 기분’이었구나.
단 하루를 일했는데 손가락 마디마디가 아파서 일주일 동안 두 딸의 아침밥을 차려주지 못하고 빵이나 시리얼 따위로 때우게 했다. 입안 세 군데가 헐어서 고함량 비타민을 주문했고, 각종 영양제를 먹으면서도 2주 뒤에야 입안 상처가 사라졌다. 그러나 ‘고강도 노동’ 때문에 힘든 건 아니었다. 취재 기간 내내 나를 가라앉게 한 건, 존중 없는 노동환경이 만든 지독한 ‘잔반이 된 기분’ 탓이었다.
다시 학교를 생각한다. 교육부와 교육청이 이런 존중 없는 노동환경을 방치해서 결국은 ‘부실급식 사태’로 이어진 이 현실은 아이들에게 무슨 메시지를 전하는 걸까. ‘너희들이 커서 이런 존중 없는 노동환경에 내몰리지 않으려면 남들을 이기고 관리자로 설 자격을 획득해야 하는 거란다’라는 비교육적 메시지 아닐까. 심지어 현장에서 본 혹은 인터뷰에 응한 조리실무사들은 대부분 아이를 낳은 뒤 경력이 단절된 여성, 아이를 학교에 보낸 뒤 돈을 벌어야 했던 여성, 아이들 저녁을 직접 차려주고 돌봐줘야 하는 상황에 있는 여성들이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이런 세상을 물려주는 게 맞을까.
손고운 기자 songon11@hani.co.kr
① 1500명 먹이는 학교에 정수기 없는 급식실… 그들이 찬물 먹는 방법
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5828.html
② 급식실 고강도 노동 8시간, 어느덧 손이 덜덜 떨려왔다
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585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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