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늦게 마감을 하고 있었죠. 회사 앞 식당에서 동료들과 간단한 저녁을 먹고 있을 때 식탁 위에 올려둔 휴대전화가 부르르 떨었습니다. ‘〔1보〕 노벨문학상에 한국 소설가 한강.’ 눈을 의심했습니다. 예기치 못한 희소식이었습니다.
다음날, 제1535호 기획회의를 하면서 한겨레21은 한강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표지기사로 결정했습니다. 처음엔 희망적으로 쓰려고 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한강 문학’을 놓고 여러 민감한―대체로 반지성적이라고 해야 할― 반응이 꿈틀대며 나오기 시작하더군요. 자신의 ‘개취’(개인의 취향)는 아니라는 냉소적 반응부터 ‘왜 황석영이 아니냐’는 항의성 질문, 한강 작가가 ‘젊은 빨갱이 페미니스트’라는 낙인까지. 곧이어 쏟아지는 프라이버시 보도야말로 ‘여류’라는 말만 붙이지 않았을 뿐, ‘유명 여성 작가’에 관한 세간의 관심이 어디로 향하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풍경이었습니다.
노벨상과 한국 사회의 소동을 다룬 한겨레21 표지기사에 관한 독자의 반응은 예상보다 훨씬 뜨거웠습니다. 페이스북과 엑스(옛 트위터) 등 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기사가 역대급으로 공유됐고 기자들의 휴대전화와 메일함에도 격려와 응원의 내용을 담은 메시지가 쌓였습니다.
기사를 쓰면서 8년 전 취재 자료를 담아둔 외장하드를 오랜만에 꺼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 ‘세종도서’ 관련 자료였죠.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 등 여러 권의 책을 지원에서 배제하고 탈락시킨 증거가 포함된, 산더미 같은 문건이었습니다.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듯 한자 한자 읽어내려가던 새벽의 희뿌연 시간이 떠올랐습니다. 외롭진 않았습니다. 결정적인 제보자가 있었기 때문이죠. 그는 기자가 안위를 염려할 정도로 적극적으로 기억을 더듬었고, 증언했습니다. ‘소년이 온다’에 줄을 쳐가며 문제가 되는 구절들을 골라냈다는 그의 말에서 취재를 시작해 결정적인 자료를 발견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알고 보니 ‘소년이 온다’에 줄을 친 이들은 검열자들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주인공 소년 동호의 실재 인물 문재학(사망 당시 16살)의 아버지 문건양씨는 빨간 줄을 쳐가며 소설을 정독했습니다. 수많은 독자가 이 책에 줄을 치고 눈물짓고 가슴에 새겼습니다.
2024년 10월15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국정감사에서 민형배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세종도서 블랙리스트 관련 증언이 담긴 한겨레 기사를 화면에 띄워 보여주면서 김준희 출판진흥원장에게 사과를 요구했고, 김 원장은 공식적으로 사과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 작품을 배제했는지는 모른다고 답했습니다.
‘소년이 온다’에서 5·18 당시 고3으로 시민군에 합류했던 은숙은 훗날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합니다. 그가 편집했지만 정부의 검열에 걸려 삭제된 문장 중에 이런 부분이 나옵니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자기 양심에 따라 한강 작가의 검열을 폭로했던 제보자도 책을 사랑했습니다. 좋은 책을 보는 눈이 있었고, ‘소년이 온다’를 귀하게 여겼습니다. 지금은 연락이 닿지 않는 그는 지금의 ‘사태’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합니다.
한강 작가는 ‘소년이 온다’를 쓰기 힘들겠다고 생각했을 때 시민군이었던 스물여섯 살 야학 교사의 마지막 일기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토록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 폭력과 존엄과 양심과 부정의가 공존하는 이 투쟁적인 세계, 피 냄새 나는 세계에서 작가는 초를 밝혔습니다. “당신이 나를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기를 바랍니다.”(‘소년이 온다’) 빛이 비치는 쪽, 꽃이 핀 쪽에 당신도 있기를 바랍니다.
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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