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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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홑바지 입은 소라, 솥 안에 낀 이끼

[사투리 합시다③·끝]
‘표준어로 무엇’이라는 식의 접근으론 알 수 없는 지역말의 매력… 대체 불가능한 정서·문화를 담고 우리말의 뿌리를 기억하는 큰 그릇
등록 2024-02-09 11:24 수정 2024-02-12 09:12
<전라도닷컴>은 2009년 겨울 서울 인사동에서 열린 독자초대 행사 때 전라도 말 알아맞히기를 진행해 인기를 끌었다. <전라도닷컴> 제공

<전라도닷컴>은 2009년 겨울 서울 인사동에서 열린 독자초대 행사 때 전라도 말 알아맞히기를 진행해 인기를 끌었다. <전라도닷컴> 제공


☞☞[사투리 합시다①]‘“맨도롱 또똣이 표준어로 뭐냐?”는 잘못된 질문’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사투리 합시다②]‘호랑이가 ‘호랭이’를 담을 쏘냐’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지역말 연구가 국어사전을 바로잡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물에 넣고 끓이는 것이나, 논밭의 흙을 고르게 만드는 것을 모두 ‘삶다’라고 국어사전에는 정의돼 있습니다. 하지만 강릉말을 보면 앞은 ‘쌂다’로, 뒤는 ‘삶다’로 발음합니다. 둘이 별개의 단어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까치놀’에 대해 사전은 ‘저녁 하늘의 노을’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런데 강릉 방언에 ‘까치놀’이 있습니다. ‘희끗거리며 일렁거리는 파도’를 의미합니다. 옛시조에 보면 ‘까치놀에 놀란 뱃사공’이라는 구절도 등장합니다. 그게 노을일 리 없잖아요.”(이익섭 서울대 명예교수)

지역에서 세분화한 말은 한국 유일의 ‘지칭어’가 되기도 한다. 제주말에 해녀 문화와 관련한 어휘가 세분화한 것은 이곳 문화를 반영한다. 소라(구제기, 구젱기 등)의 경우 늙은 소라는 겉껍데기가 매끈하다고 ‘민둥구제기’, 가장 비싸게 팔리는 젊은 소라는 겉껍데기에 뿔이 살아 있다고 ‘쌀구제기’, 새끼 소라는 작다고 ‘조쿠제기’ 등으로 구분해 부른다. 또 겉껍데기는 ‘닥살’, 입구 마개는 ‘장귀’, 속살 중 앞쪽은 ‘ᄉᆞᆯ’, 안쪽은 ‘똥’이라 한다. 특히 가운데 달린 소화기관은 ‘속곳’ ‘소중이’ ‘소중기’ 등으로 부른다. 김순자 제주학연구소 센터장은 “소라 관련 이런 어휘들은 지금 사전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특히 속곳, 소중이, 소중기 등은 해녀 삼춘들이 속에 입던 홑바지예요. 이분들이 이 기관을 소라가 입은 옷이라 보고 그렇게 비유적인 이름을 붙인 거죠. 굉장히 살아 있는 말이죠”라고 설명했다.

2008년 4월22일 서울 구로구 고척동 재미있는 사투리 간판. 박승화 선임기자

2008년 4월22일 서울 구로구 고척동 재미있는 사투리 간판. 박승화 선임기자


강릉에서 자주 쓰는 이 말 “일구지난설이래요” 

지역말의 분화는 우리말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머이, 말도 모해요. 아주 일구지난설이래요.” 강원 영동지방에서 어려운 일이 겹쳤을 때 쓰는 말이다. 일구지난설(一口之難說)은 ‘한 입으로 말하기 어려운 이야기’라는 뜻의 한자어다. 강원도 중심지로 이이·신사임당 등 식자층이 많이 살았던 강릉 지역을 중심으로 널리 쓰이는 말이다. 김혜경 강릉사투리보존회 사무국장은 “이 지역 사람들이 아주 자주 쓰는 독특한 은어”라고 설명했다.

김순자 센터장도 비슷한 사례를 이야기했다. “‘왜 이 동네에만 이런 말이 있을까’ 하는 한자말이 남은 경우가 있습니다. 인근 제주말과도 다릅니다. 예를 들어 연못을 다른 곳에선 ‘못’이라 하는데, 대정현청이 있던 마을에선 (한자어 방축(防築)에서 유래한) ‘방죽’이란 말을 씁니다.”

“1980년대 초인가, 외지에 갔더니 ‘말이 참 촌스럽다’는 얘기를 몇 번 들었어요. 어려서 할머니하고 같이 살아서 강릉 사투리가 무척 심했거든요. 기분이 나쁘기도 했는데, 나는 이런 말을 쓰는 게 좋았거든요. 이거 한번 모아봐야겠다 싶더라고요. 오토바이 타고 동네마다 막걸리 사들고 다니면서 카세트로 녹음하고 마을 어른들 말을 수집했지요. 불순분자나 골 빈 놈으로 몰릴 때도 있었어요. 해보니 재밌더라고요. 지금도 말이 변해요. 원래는 ‘얄똥시룹다’, ‘얄똥구레빠졌다’(얄밉다)고 하던 걸 요즘은 점잖게 ‘얄똥궂다’라 하고, ‘얄궂다’라고도 해요. 표준어 변천사를 보는 거 같기도 하고요.”

1988년부터 강릉말을 수집해 2014년, 2만4천 단어 1735쪽의 대작인 <강릉방언대사전>(동심방 펴냄)을 집필해낸 향토방언연구자 김인기(76)씨가 말했다. 이 사전의 가장 큰 특징은 단어별로 강릉의 생활상과 풍습이 느껴지는 생생한 예문이 풍부하고, 비속어나 은어까지 총망라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학계에서도 “학자가 썼다면 도저히 근접하지 못했을 대작”(이익섭 명예교수)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2007년 제주를 시작으로 각 지역에서 ‘지역말 보전·육성 조례’가 생기는 등 중앙·지방 정부가 지역에 관심을 두기 훨씬 이전부터 김씨 같은 ‘민간인’들의 내 고장 말을 지키려는 본능적인 몸부림은 이어져왔다. ‘어떻게 30여 년을 방언을 할 수 있었느냐’고 묻자 김씨는 “어리해서(어리숙해서) 그러지요”라며 웃었다.

살아 움직이는 야성의 매력

이태영 전북대 명예교수(국문학)는 “표준어는 사실 20세기 초라는 특정 시기, 중부지방이라는 일부 지역에서 변화해온 말입니다. 문화성·지역성은 물론이고 역사성도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표준어를 기준으로 학교에선 방언을 ‘틀린 말’이라고 원천봉쇄합니다. 정규 교과에서 지역말을 가르치는 것은 제주도 정도예요. 지역의 문화와 전통은 가르치지만 그 정수인 말을 가르치는 데는 관심이 없어요. 조선·고려 시대의 오래된 유물은 가치를 높게 치면서, 오래된 우리말인 지역말은 땅속에 파묻어버리는 꼴입니다”라고 지적했다.

방언의 매력은 뭘까. 이익섭 명예교수는 “표준어가 알뜰하게 다듬어져서 문자화됐다면, 방언은 ‘구어’(입말)잖아요. 다듬어진 일이 없잖아요. 그래서 야성이랄까, 살아 움직이는 모습이죠”라고 말했다. 김순자 센터장은 “과거에 ‘어렵다’고만 하던 제주말에 대해 요즘은 ‘예쁘다’ ‘아름답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맨도롱 ᄄᆞᄄᆞᆺ’ 같은 말은 익숙하지 않을 뿐이지, 우리 땅에서 만들어진 살아 있는 우리말이잖아요. ‘국어’라는 건 모든 지역말들의 합집합이잖아요. 표준어만 있으면 그건 ‘국어’가 아니거든요”라고 말했다.

고 최명희(1947~1998) 소설가.

고 최명희(1947~1998) 소설가.


“모국어는 우리 삶의 토양에서 우리의 생각과 느낌을 품고 길러 정신의 꽃으로 피워주는 씨앗이다.”(최명희, 1996년 <리브로> 기고글)

강릉·제주=김양진 기자 ky029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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