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 참전해 벌어들인 외화로 경부고속도로 깔았다.’ 60년 전 베트남전쟁 참전의 경제적 성과를 강조할 때 자주 사용되는 말이다. 타국 전쟁에 개입한 것을 ‘경제발전’으로 정당화하는 이 말은, 무고하게 죽임당한 민간인과 죽음의 공포를 감내해야 했던 군인의 아픔은 담지 않는다. 박정희 정부가 파병한 군인은 자그마치 32만 명, 그중 전사자는 5천여 명에 이른다. 명분 없는 전쟁에서 생사를 넘나들어야 했던 이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희귀하다.
최근 베트남전 참전군인 송정근(81)씨가 독립다큐멘터리 <사도>에서 민간인 학살을 증언했다(관련기사☞“학살은 있었다” 고백하는 소수가 되는 용기와 외로움). 그리고 <한겨레21> 인터뷰에서 일상적으로 목숨을 위협받았던 전쟁터와 전우들의 허무한 죽음, 귀국 뒤 홀로 감당해야 했던 전쟁 트라우마도 증언했다. 베트남전 참전의 명암을 되돌아보는 데 참전군인의 증언은 중요한 나침반이다. 송씨의 인터뷰를 요약해 싣는다.
송정근씨는 1965년 10월부터 1966년 12월까지 약 1년4개월간 청룡부대 2대대 6중대 소속 군인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1963년 1월 입대해 제대를 불과 수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참전을 원하지 않았지만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고 그는 말했다. “나는 안 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삼대독자랄지 특별한 경우에는 (파병 대상에서) 빠질 수 있었지만 그런 걸 제외하면 개인 의사와 아무 상관 없이 부대의 명령대로 움직였죠.”
송씨가 베트남전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언급한 것은 죽음의 공포다. “전쟁터에서는 내가 1분 뒤에 죽을지 1시간 뒤에 죽을지, 하루 지나 죽을지 알 수가 없어요. 전투하던 동료들이 언덕 같은 은폐물에 몸을 딱 숨기고 담배를 피우면서 고국에 돌아가면 여동생 소개해달라, 네가 해내겠나 이런 농담을 주고받다가 갑자기 총알 한 발 ‘땅’ 날아와서 맞으면 그 자리에서 죽는 거예요. 동료들의 그런 먼지만도 못한 죽음을 경험할 적에는 참으로 허무하고 실망스럽고….”
송씨는 전장에서 교회에 처음 나간 것도 목숨을 연장하고 싶어서였다고 했다. “하루라도 더 살고 싶어서” 교회 출석을 자원했다고 송씨는 회고했다.
“교회에 가면 일단 최전선에서 후방으로 한 번 나갔다 오는 거 아닙니까. 그러면 적어도 헬기 타고 나갔다 오는 그 시간 동안은 살아 있겠지, 그래서 ‘나 교회 가겠습니다’ 했어요. 그래서 헬기를 타고 사실 내 생명 하루 더 연장해보겠다고 나갔지요.”
타는 듯한 갈증과 해충, 수풀 속에 숨겨진 독침, 곳곳에서 터지는 부비트랩도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실수로 부비트랩을 건드려서 터지면 어떤 경우엔 병사의 온몸이 그냥 점점이 분해돼버립니다. 높은 정글지대 나무에 창자가 디룽디룽 달려 있기도 하고요. 그러면 어쨌든 죽은 사람을 후송시켜야 하는데 형체가 없잖아요. 야전삽 빼가지고 분대원들이 숲속을 뒤적거리면서 살점 하나씩 분해된 거 모아서 비닐봉다리에 싸가지고 일병 누구누구라고 이름 붙여 (주검을) 후송시키기도 했어요.”
죽음의 공포가 컸으나 싸움의 이유는 불분명했다. ‘자유민주주의 수호로 월남을 돕는다’는 추상적 명분은 현실에서 힘을 못 썼다. 외세 개입을 반대한 남베트남 주민들은 한국군을 반기지 않았다.
“우리가 월남에서 전투하며 가장 큰 어려움을 느낀 것이 뭐냐면 월남 사람들이 민족주의자라는 거죠. 그러니까 미국이 월남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공산주의로부터 자유로운 나라로 만들기 위해 전쟁을 돕는다고 했지요. 한국도 그런 목적으로 월남에 가서 싸운다고요. 하지만 월남 사람들의 생각은 그게 아니에요. 우리는 잘 살든 못 살든 우리 스스로 살기를 원한다 이거예요.”
한국군이 도우러 간 주민들과 충돌한 이유도 서로 간의 불신 때문이었다. “그 사람들은 공산주의나 민주주의라고 하는 이데올로기적 중요성이 전혀 없어요. 전투할 적에 동굴에 숨어 있는 사람들을 생포했는데 며칠 뒤 그 사람이 그대로 활동하더라는 거예요. 그러다보니 그들을 향한 또 우리대로의 증오심이 생기는 겁니다.”
목적이 불분명한 전투에선 병사 개개인의 목숨 보전만이 유일한 이유가 된다. 전진성 부산교육대 교수는 그런 점에서 베트남전 참전군인들을 “불안이나 망설임, 연민 같은 값싼 인간적 감정을 극복해낸 진정한 전쟁기계”(<빈딘성으로 가는 길>)라고 불렀다. “상황이 급박할 때는 오로지 내가 적을 먼저 죽이냐 아니면 내가 먼저 죽느냐, 이것밖에 없어요. …전쟁터 병사들이 날마다 되씹는 말이 있어요. ‘동정은 금물이다.’ 일종의 세뇌 작업이랄까, 각성이라 할까요. 하여튼 그렇게 자기를 늘 스스로 다짐시키고 그랬습니다.”
1년4개월의 파병 생활을 마치고 송정근씨는 1966년 12월 귀국했다. 손에 쥔 것은 낡은 군복이 든 배낭뿐이었다. 두 손 가득 값나가는 물건을 쥐고 온다는 ‘월남에서 온 김 상사’는 없었다. 대신 전장에서 얻은 후유증이 그를 평생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사람이 그런 전투를 하다보면 그냥 막돼먹어버리겠거든요. 예를 들어 누가 ‘너 나쁜 놈이라더라’ 이런 소리를 들으면 절대 못 참습니다. 당장 쫓아가서 동네 사람들 모인 사랑방 벽에다 그냥 칼을 쫙 던져버려요. 그럴 정도로 우악스러워지고 겁없이 구는 거예요. 그렇게 골치 아프게 구는 사람을 사회에서 누가 환영하며 어떤 기회가 주어지겠어요. 지금 생각하면 미국 같은 선진국가에서는 그런 병사들을 위한 상담치료도 했다는데, 그때야 그런 건 우리나라에선 꿈도 못 꿨으니까요.”
보다 못한 가족들이 송씨에게 교회 출석을 권했다. 주변 권유에 못 이겨 한번 두번 나가면서 신앙심을 갖고 목회의 길을 걸었지만, 송씨는 지금도 여전히 자신과 싸우고 있다고 했다.
“여러 과정을 거치며 성격이 많이 변했는데 그래도 쉽겠습니까? 10년, 20년 세월이 지나도 전쟁터에서의 후유증이 다 없어지지가 않아요. 굉장한 어려움을 겪었죠. ‘나와 나 자신이 싸운다, 그래서 내가 이겨야 한다’ 하는 구호를 매일 되풀이하죠. …‘여기서 내가 아무 말 말아야 하겠다’ ‘좀 참아야 하겠다’ 그렇게 마음을 먹었는데 어떤 상황이 도래하고 뭔가 딱 이렇게 부딪히면 감정이 나타나고 내 본뜻과 달리 행동하게 된다는 말씀이에요. 그래서 ‘이걸 내가 이겨야 한다’ 이렇게 스스로에게 늘 말했죠.”
신다은 기자 downy@hani.co.kr
[고백을 기다립니다]
베트남전 파병 60년이 흘렀지만 전장의 진실은 좀처럼 드러나지 못한다.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으로 대표되는 베트남 민간인 학살 논의는 물론, 32만명 파병 군인들의 제각기 다른 전쟁 경험도 수면 아래에 가라앉아 있다. 송정근씨는 “내 인생에서 파병 15개월은 극히 일부분이었다. 하지만 그 전투 경험이 내 인생에 미친 영향은 엄청났다”고 말한다.
2024년은 베트남전 파병 60년이 되는 해다. <한겨레21>은 베트남전 참전군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경부고속도로로 상징되는 국가 성장론이 다 담지 못하는 개개인의 전쟁 경험과 그 이후 삶의 변화에 귀 기울인다. 베트남전의 명암을 용기 있게 말해줄 군인들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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