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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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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에 대한 수치심도 정치적이다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달라지는 성폭력에 대한 감정 밝힌 <수치>
등록 2023-04-28 10:12 수정 2023-05-03 01:28

세계 성폭력의 역사를 다룬 방대한 최신 연구다. 장장 560쪽. 영국 런던대학 버크벡칼리지 역사학 교수이자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조애나 버크는 <수치>(송은주 옮김, 디플롯 펴냄, 영어판 2022년)에서 성폭력 피해자가 느끼는 ‘치욕’과 ‘수치심’이 정치적 감정이라고 말한다. 이 감정은 단일한 것이 아니라 성별, 인종, 지역, 세대, 역사에 따라 달라진다.

강간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문화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사실 이런 태도는 강간을 몰역사적, 전 지구적 테러리즘이라고 보는 1970~1990년대 ‘제2물결 페미니즘’ 이론과 배치된다. 지은이는 성폭력을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성별·인종·지역·계급·세대 등이 맞물린 곳에서 발생하는 ‘교차성’의 효과라고 전제한다. 교차성은 각각의 정체성에 따른 억압이나 차별을 합친 것보다 정체성들의 교차점에서 발생하는 억압이나 차별이 더 유해하고 특수하다는 점을 밝히는 이론이다.

성폭력을 보는 시각과 수치심의 강도는 문화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어떤 공동체는 강간 피해자보다 집단의 굴욕감을 더 위협적으로 여긴다. 어떤 동성애 혐오자는 성범죄를 저지르고도 ‘교정적 강간’이라는 용어를 쓴다. 트랜스젠더를 노리는 성폭력은 세계적인데, 성학대 가해자는 자신이 오히려 피해자라며 책임을 전가한다. 남자다운 부치 레즈비언은 성적 학대를 당했을 때 더 큰 손상을 입는다.

피해자 탓하기만은 범세계적 현상이다. 1999년 “청바지를 입은 사람이 적극 협조하지 않으면 벗기기가 불가능하다”는 이탈리아 로마 대법원의 ‘청바지 성폭력 불가론’ 판결은 국경을 넘어 공분을 샀다. (한국에서도 종종 이런 주장이 나온다.) 여성 강간 희생자가 저항하면 강간할 수 없다는 신화도 여전히 곳곳에 만연해있다.

이 책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성폭력에 대한 일반적인 고정관념을 넘어선다는 것이다. 여성 가해자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고, 남성 간 강간이나 성적 학대를 성폭력으로 간주하지 않는 문제도 지적한다. 희생자의 병리화를 지나치게 강조할 때, 트라우마를 겪지 않는 여성이 피해를 증명하기 곤란하게 되는 법적인 곤경도 함께 짚는다.

결론은 성차별주의, 인종주의, 식민주의, 경제적 불의, 트랜스 혐오, 기후 부정, 신자유주의적 불의에 저항하고 연대할 때 성폭력을 종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방대한 자료에 견줘 너무 근본적인 해결책이긴 하지만 젠더 차별과 여성 억압을 해결할 또 다른 방법이 있냐고 묻는다면, 이 역시 답하기 어렵다.

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부패한 중국은 왜 성장하는가

위엔위엔 앙 지음, 양영빈 옮김, 한겨레출판 펴냄, 2만원

미국 존스홉킨스대학 정치학 교수인 지은이가 광범위한 부패에도 초고속 성장을 할 수 있었던 중국을 분석한다. 미국과 중국의 도금시대를 통해 부패와 성장의 역설을 탐색하고 방대한 공식 통계, 언론 보도, 2차 문헌들을 살피며 어떤 부패가 독이 되고 어떤 부패가 성장동력으로 작동하는지 분석한다. 부패를 새롭게 봐야 중국이 보인다는 결론.

마우스필

올레 G. 모우리트센·클라우스 스튀르베크 지음, 정우진 옮김, 따비 펴냄, 3만3천원

음식과 맛에 관한 모든 지식. ‘마우스필’은 음식의 맛과 향과 질감이 어우러질 때 우리 입이 느끼는 것을 가리킨다. 덴마크 생물물리학자이자 덴마크 미식학 아카데미 대표인 지은이가 먹을 때 몸이 작동하는 메커니즘, 식물에서 곤충까지 다양한 식재료의 생물학적 유래와 화학적 구성, ‘마우스필’을 창조하는 다양한 레시피를 소개한다.

문명의 바깥으로

나희덕 지음, 창비 펴냄, 2만원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후 20년 만에 나온 시인이자 평론가 나희덕의 시론집. 1부는 백무산, 허수경, 김혜순의 시를 통해 자본세와 인류세라는 ‘지금’을 사는 시인들의 의식을 살폈다. 2부는 정현종, 김종철, 강은교 등의 작가론. 3부는 백석, 윤동주, 김수영, 김종삼에 대한 학술적 분석으로 한국 현대시의 밑바탕을 검토한다.

물건이 아니다

박주연 지음, 글항아리 펴냄, 1만6천원

‘동물권 변호사’ 박주연이 11년 만에 전면 개정된 동물보호법의 조항을 설명하고 동물권의 현주소를 말한다. 동물학대 범죄 처벌이 최대 3년 이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 벌금형인데도 많은 학대 범죄자가 가벼운 벌금형만 받고 마는 현실, 동물을 사물화해온 인간의 역사를 짚으며 ‘동물은 물건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다시 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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