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엔 ‘리드' 문장이 있다. 기사의 주제를 맨 앞에 핵심적으로 요약한 문장이다. ‘두괄식'(역피라미드) 구조다. 드라마나 영화는 다르다. 이야기의 주제와 결말을 요약해 맨 앞에 전달하는 드라마나 영화는 없다. 그래서 드라마나 영화는 5분 안에 채널을 돌리거나 끄지 못하도록, 도입부가 중요하다.
작가 김보통의 이야기를 역피라미드 기사로 쓴다면 이렇게 시작할 것이다. <i>‘넷플릭스 시리즈 <디피>(D.P.)를 통해 세계에 이름을 알린 작가 김보통에게 이야기란 ‘놀이'이자 ‘유흥'이고 ‘취미'다. 전세계 여러 국가에서 인기 콘텐츠 1위에 오른 드라마의 원작을 만들고 각본을 쓴 작가는….</i>
잠깐! 김보통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듣는 사람이 일단 재미가 있어야죠.” 그가 이런 기사의 도입부를 본다면 잡지를 넘길 것 같다. 다시 써본다.
<i>‘좀더 다녀볼까'라는 생각을 한 건 대리로 진급하고 바뀐 연봉을 봤을 때다. 대기업 영업직으로 입사해 점심 저녁으로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불렀다. 접대가 일상이었다. 몸도 마음도 이미 지쳤지만, 확 뛰어오른 연봉에 잠시 다른 생각을 했다. 그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쯤 하자.' 그렇게 2013년 회사를 박차고 나왔다.</i>‘우주선을 벗어난 우주인이 된 기분'(<아직, 불행하지 않습니다>)으로 회사를 나온 지 10년이 지났다. 직원 10여 명 규모의 콘텐츠 제작사 ‘스튜디오 타이거' 대표가 된 김보통을 3월3일 서울 마포구 작업실에서 만났다. 그는 최근 넷플릭스 시리즈 <디피> 시즌2 각본 작업을 마치고 웹툰 <디피: 개의 날> 시즌2 준비와 3개의 신규 드라마 각본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80분가량 이어진 인터뷰에서 그는 ‘이야기'란 단어를 155번 꺼냈다. 1분에 두 번꼴로 말한 셈이다. 김보통에게 이야기란 무엇일까. 그가 하는 이야기는 무엇이 다를까. 어떻게 이야기를 만들어낼까. 먼저 그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2013년 김보통이 회사를 나왔을 때, 계획은 없었다. 일본 오키나와로 떠났다. ‘따뜻하겠지' 생각뿐이었다. 보름 동안의 여행 기간에, 김보통이 깨달은 건 ‘세상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었다'. 계획도 없이 돌아다니며 하루하루를 보냈지만, 앞으로 살아갈 방향에 관한 깨달음은 없었다. 오키나와 자탄정 미하마에 있는 아메리칸빌리지에서 관람차를 타며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결국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내가 본 것은 뿌연 안개 너머 태양인지 뭔지가 흐리멍덩하게 사라지는 광경이었다. 그 모습이 마치 내 미래 같았다.”(<아직, 불행하지 않습니다>)한국으로 돌아와서도 계획은 없었다. 무언가 홀린 듯 ‘작은 도서관'을 준비했다. 퇴직금으로 2천 권 넘는 책부터 샀다. 지방자치단체 지원을 받지 못했다. 대학 때 존경하던 교수님도 왜 길이 아닌 길을 가느냐고 했다. 그렇게 도서관은 포기했다. 퇴직 4개월째. 퇴직금 절반이 사라졌다. 무언가에 쫓기듯 로스쿨 공부를 시작했다. 그림을 그린 것은 요리를 하면서였다. 처음엔 직접 만든 브라우니를 그렸고, 트위터에서 모르는 사람들의 얼굴을 그렸다. 뚜렷한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두 명씩 그리다보니 어느새 수백 명의 그림이 쌓였다. 그러던 어느 날, 웹툰 <송곳>을 그린 최규석에게 연락이 왔다.
“만화 한번 그려보실래요?” 로스쿨 시험을 치르고 합격 발표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등록금이나 벌어보자라는 생각으로 웹툰 <아만자>를 그렸다. 김보통이 세상에 꺼낸 첫 이야기였다. 막상 시작하니 쌓아뒀던 이야기가 쏟아졌다. 그렇게 <한겨레>에 2014년부터 두 번째 만화 <디피: 개의 날>을 연재했다. 2015년부터는 웹툰으로도 연재했다. 웹툰이 인기를 끌며 여러 제작사에서 연락이 왔다.
그러나 영화화는 번번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원고당 5만~10만원씩 받고 이곳저곳에 칼럼과 수필도 기고했지만, 벌이가 좋진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할 때쯤, 넷플릭스 시리즈로 <디피>를 만들자고 연락이 왔다. 드라마 각본을 써야겠다고 꿈꿨던 것도 아니었다. 순전히 우연이었다. 돈을 주겠다고 해서 알겠다고 했다. 그렇게 첫 드라마 각본 작업에 참여했다. 그리고 2021년, 넷플릭스 시리즈 <디피>가 세상에 나왔다.
웹툰, 수필, 드라마. 플랫폼은 다 다르지만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것은 ‘이야기'다. <한겨레21>이 김보통을 만난 이유다. “영역을 긋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디피>도 수필로 쓸 수 있다고 생각해요. 수필은 ‘짧은 노래' 같아요. 만화는 (한 번 볼 때) 3~5분을 읽는 것을 1년 넘게 긴 호흡으로 끌고 가야 하는 거고요. 드라마는 5분 안에 채널을 돌리지 못하게 해서 50분을 끌고 가야 해요. 목적이 달라요. 지점이 약간 변형됐을 뿐이에요.”
줄거리는 다르지만 김보통만의 문제의식과 경험이 녹아들었다는 점은 같다. 첫 웹툰 작품 <아만자>에선 8년 동안 암투병을 한 아버지에 관한 경험과 암환자 관련 시민단체에서 봉사활동을 한 경험이 배어 있다. 웹툰과 넷플리스 시리즈 <디피>엔 군복무 시절 ‘디피' 임무를 맡아 활동하며 느꼈던 모순과 군대의 부조리함이 투영됐다. 에세이 <아직, 불행하지 않습니다>엔 대기업 퇴사 뒤 방황기를 거쳐 펜을 잡게 된 이야기가 담겼다.
“현실 세계에서 제가 겪는 문제의식이라든지 불만이 제 이야기의 원점이 되거든요. 일상에서 이거는 아니라고 느꼈던 그 지점에서 이야기가 싹트는 것 같아요. <디피> 같은 경우 제가 탈영병을 쫓으면서 겪은 아이러니와 문제점이 눈에 띄었던 거죠. 다른 작품들에서도 비슷하고요.”
경험은 다른 작품보다 더 구체성과 현실감을 부여한다. 당시 “피티에스디(PTSD·외상후스트레스장애) 온다”는 말이 유행처럼 번질 정도였다. 거기에 군대를 다녀온 이들에게도 다소 생소한 ‘디피’(군탈체포조)라는 임무를 받은 이들의 모습을 통해 재미라는 요소가 더해지며 군대를 다룬 다른 작품들과 차별성이 생겼다.
“니들 오밤중에 거서 뭐 하냐.”(박범구) “나무 심고 있습니다.”(김일석) “식목일도 아닌데?”(박범구) “헌병대장님이 심으라고 했지 말입니다. 막사 앞에 썰렁해 보인다고.”(이효상) ―<디피> 2회 중
“오밤중에 또 뭐 하냐?”(박범구) “나무 옮기고 있습니다.”(김일석) “대장님이 심으랬다매. 썰렁하다고.”(박범구) “사단장님이 뽑으라고 했지 말입니다. 보기 싫다고.”(이효상) ―<디피> 4회 중
“한호열 상뱀, 차라리 군대가 바뀔 거라고 하십쇼.”(조석봉) “바뀔 수도 있잖아. 우리가 바꾸면 되지.”(한호열) “저희 부대에 있는 수통 있지 않습니까. 거기 뭐라고 적혀 있는지 아십니까.”(조석봉) “어?”(한호열) “일구오사. 6·25 때 쓰던 거라고. 수통도 안 바뀌는데 무슨.”(조석봉) ―<디피> 6회 중
김보통이 가장 처음 쓴 웹툰 <아만자>에도 구체적인 표현이 군데군데 나온다. “나는 이미 끝난 것 같다. 애당초 게임은 끝났는데 나만 인정을 안 하고 있는 느낌.” “온몸을 믹서기로 갈아버리는 것 같은 통증.” 이런 대사는 직접 경험하지 않고서는 생각하기 어렵다. 김보통은 암투병을 겪던 아버지로부터 직접 들은 말을 넣었다고 했다.
김보통은 만화가나 작가를 꿈꾼 적이 없었다. 친구들이 놀 때 집에만 있었다. ‘망상'이 최고의 놀이였다. 책을 사 볼 돈도 없었다. 그냥 혼자 머릿속으로 이야기를 상상했다. 고등학생 때 도서관에서 근로장학생을 하면서 처음으로 책을 원 없이 봤다. 책을 보면서 ‘나도 이런 재미난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짧은 이야기들을 노트에 적었다.
“그냥 틈나면 이야기를 만들었어요. 가만히 있다가도 이런 얘기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면 줄거리를 짜고 주인공을 만들고 하면서 혼자 망상 여행을 떠나는 거죠.” 만화가가 되겠다는, 감독이나 소설가가 되겠다는 거창한 꿈도 없었다. 그저 상상하고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만들어볼 뿐이었다.
그래서 수필도 썼다. <아직, 불행하지 않습니다> 외에, 유년 시절을 담은 <어른이 된다는 서글픈 일>과 <온 마음을 다해 디저트> 등이다. 드라마 각본을 처음 <디피>로 쓴 이후 다른 원작자의 웹툰(<유쾌한 왕따>)을 드라마 각본으로 만들기도 했고, <사막의 왕> 웹드라마에선 6개회 중 1개회이긴 하지만 연출도 경험했다. 거창한 꿈은 없었지만, 여러 플랫폼을 동시에 섭렵한 셈이다.
“다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결국은 이야기예요. 잡담을 나누는 것도, 일기를 쓰는 것도, 기사도 이야기죠. 근데 독자가 서로 다를 뿐이에요. 건드리고 싶은 독자의 감정이 다를 뿐이지 결국 이야기라는 건 동일하죠.”
누구를 대상으로 어떻게 전달할까, 이게 김보통의 고민이었다. 이를테면 웹툰 <아만자>의 경우 암환자도, 환자가 아닌 사람도 암환자를 다룬 만화를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선택한 건 어두운 이야기가 아닌 것처럼 포장하는 것이었다. 파스텔 톤으로 그림을 그렸다. 대사는 짧고 여운이 남게 썼다.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좋은 최적의 형태가 뭘지 나름 판단했던 것 같아요.”
그가 놀이에서 시작해 만화와 수필, 칼럼, 드라마, 연출까지 나아갔던 배경엔 ‘실망하지 않고 꾸준히 쓰는 습관'이 있다. 부담감을 갖지 않고, 기대하지 않고 쓰는 것이다.
“강의를 나가면 항상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제발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를 읽고 단편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 작품에 비견될 만한 단편을 써야겠다고 마음먹고 쓰면 실망밖에 할 수 없어요. 제가 처음 글을 쓸 때 반드시 넷플릭스에 가서 우리나라 1위가 될 거라는 마음이었다면 부담감에 시작도 못했을 거예요.”
그래서 김보통은 인터뷰 내내 소질과 꿈을 작가의 성공 조건으로 연결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다양한 경로와 방법으로 작가가 될 수 있는데, 재능이 있고 어려서부터 꿈을 갖고 키워온 사람만이 훌륭한 작가가 되는 거로 비칠 수 있다고 생각해서다. 김보통 자신이 그랬다.
“(처음 그림을 그릴 때) 이걸로 돈을 벌어야겠다는 거창한 꿈이 있던 게 아니었어요. 전공한 것도 아니고 제대로 그려본 적도 없었어요. 그냥 재밌으니까. 사람들의 반응이 재밌으니까라는 마음으로 그렸던 거예요. 글도 똑같은 마음으로 쓰고 있어요.”
아주 짧은 이야기부터 주변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그 사람이 이야기를 즐겁게 들어주는 것 자체가 기쁨인 사람이라면, 작가의 자질은 충분하다고 김보통은 말한다. 나머지는 ‘실망하지 않고 꾸준히 쓰는 습관'이면 충분하다.
김보통의 하루 일과는 ‘일'이다. 새벽 5시에서 6시 사이에 일어나 바로 일을 한다. 정신이 제일 맑을 때다. 밥을 먹고 다시 일한다. 점심 먹고 산책한 뒤 다시 일한다. 저녁 먹고 달리기를 한 뒤엔 집중력이 덜 필요한 일을 한다. 밤 9시에서 10시 사이에 잔다.
하루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야기를 만드는 일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까. 첫 단계는 “아웃라인”(개요)을 잡는 일이다. 아웃라인은 간략한 한 문단이다. 7~8줄이다. 핵심요약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를테면 <디피>에는 이런 아웃라인이 나온다.
“안준호가 군대에 입대했다. 디피로 선발돼 탈영병을 쫓는다. 탈영병을 쫓으면서 군대 부조리에 대해 아이러니를 느끼게 된다. (…) 결국 어찌어찌해서 어떻게 된다.”
이 작업이 출발점이다. “처음에 그게 매끄럽게 정리되지 않으면 사실 시작을 안 해요. 정리돼서 한두 줄만 봤을 때도 ‘이거 재밌겠다'거나 ‘이 이야기는 궁금한데' ‘이런 결말을 맞이한다고 하면 신박한데'라는 느낌이 들면 다음 단계에서 더 구체화해요.”
그 전에 한 단계를 더 거친다. 주변 사람들에게 얘기하는 것이다. 가족, 친구, 지인, 심지어 기자들에게도 얘기한다. 핵심은 완성되지 않아도 이야기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반응이 좋으면 다음 단계로 간다. 재미를 느낀 부분은 더 발전시키고 반응이 좋지 않으면 보류하기도 한다.
반응이 좋았던 부분은 발전시키고, 좋지 않았던 부분은 빼는 방식으로 아웃라인 각각의 문장에 7~8줄을 더 붙인다. 그게 각각 드라마의 1회가 된다. 거기서 다시 ‘문단 늘리기'를 한다. “그럼 1회가 다시 49줄이 돼요. 영화로 치면 ‘신 넘버'(장면 번호)거든요. 보통 드라마 신이 1회에 40개 정도 되니까 신 넘버까지 다 나온 거예요. 거기서 더 쓰기 시작하죠.”
인터뷰 말미에 반전이 있었다. 지금까지 만든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가 있는지 물었을 때다. “사실,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아직 안 했어요. 그러니까,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제 앞으로 할 거예요.”
웹툰도 드라마도 주인공이 극적인 사건을 겪고 자극적인 장면이 나와야 사람들이 보니까, 다소 의식적으로 그런 장면을 넣었다고 김보통은 말했다. “지금은 저를 알려야 하고 대중적으로 홍보해야 하니까, 극적인 사건이 일어나는 이야기가 많아요. 그런데 저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극적인 사건이 없어도 작품을 본 사람들의 삶이 확연히 달라지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글 류석우 기자 raintin@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한번 읽어보시기를 꼭 권해드려요.” 김보통이 가장 좋아하는 소설이라며 권한 책은 일본의 나쓰메 소세키가 쓴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였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고, 그냥 고양이가 주인을 관찰하는 이야기다. 그는 이 소설과 비슷한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책이) 두꺼워서 아마 보기 싫으실 거예요.(웃음)”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100년도 더 전에 출판된 책이다. 600쪽이 조금 넘는다. ‘기사 마감 전에 책을 읽을 수 있을까' 고민을 거듭하다 서점으로 향했다. 토요일 아침, 호기롭게 책을 꺼내 들었다. “나는 고양이다. 이름은 아직 없다.” 첫 문장이 흥미롭다. 중학교 영어 선생의 집에서 살게 된 고양이가 인간들을 관찰한다. 고양이가 보는 선생은 서재에 틀어박혀 낮잠을 자고 책을 펼치면 이내 잠이 드는 그런 사람이다.
100쪽 정도 읽었을까. 단조롭다는 생각이 몰려오며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극적 사건'은 없었다. 고양이가 몰래 떡을 먹다 이에 단단히 떡이 박힌 순간이 그나마 긴장감이 있었다. 점심을 먹고 맑은 정신으로 오후에 다시 읽기를 시도하다가, 이내 또 잠이 들었다. 결국 마감 전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완독은 실패했다.
“이야기를 어떻게 끝낼까 정말 궁금해하면서 펼친 그 (책의) 마지막 한 장이 너무 만족스러웠어요.” 김보통의 말이 떠올랐다. 본문을 뛰어넘고 마지막 장을 펼칠까 한참을 고민했다. 이리저리 본문만 뒤적거리다 문득 옮긴이의 말에 눈길이 갔다. “진지하게 읽지 마시라. 그냥 힘 빼고 즐기시라. 이러저러한 걸 풍자한 것 아니겠나, 하며 의미 맞추기에 골머리를 앓다가는 고양이한테도 무시당할 터.” 극적인 사건에 익숙한 나 같은 사람에게 하는 말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마지막 장은 아껴두었다. 천천히 읽어나가며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때, 김보통이 앞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까.
눈을 뜬다. 시야에 하늘을 가리는 우거진 나뭇잎이 보인다. 양복을 입은 남자가 숲 한가운데 누워 있다. 몸에는 상처가 있다. 숲을 헤치고 한참을 달려 나와 모래사장에 이른다. 남자의 눈에 불타는 비행기 잔재와 다친 사람들이 들어온다.
미국 시리즈 드라마 <로스트>의 첫 장면이다. 김보통은 이 드라마의 도입부가 가장 완벽하다고 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너무 궁금해지는 거잖아요. 이 충격을 잊지 않고 싶어서 (생각날 때마다) 한 번씩 봐요. 어제도 다시 봤어요.”
김보통은 모든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를 구독한다. 스포츠나 로맨스, 사극 등을 제외하고 새로 나오는 영화나 시리즈는 대부분 본다. 다만 15분만 본다. 채널을 돌릴까 말까 고민하게 되는 15분. 그는 한 사람의 시청자 입장에서 보고 재미가 없으면 끈다. 초반 15분을 넘어 계속 보는 경우는 많지 않고, 끝까지 보는 일은 극히 드물다고 김보통은 말한다. 그런 그가 최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본 시리즈가 있다. <슬로 호시스>다. 시리즈 첩보 드라마로, 영국 보안국(MI5) 요원들의 이야기다.
김보통이 생각하는 가장 짜임새 있고 스토리가 탄탄한 이야기는 무엇일까. 그는 작품이 아닌 봉준호 감독을 꼽았다. “보통은 영화를 보면서 어떻게 했으면 더 좋았겠다고 생각하는 장면이 있잖아요. 그런데 봉준호 감독 영화엔 그런 장면이 없어요. <기생충>을 보고 나서도 그냥 졌다(고 생각했어요), 보조작가라도 하는 게 소원이에요. 옆에서 배우고 싶어요.”
드라마
<유쾌한 왕따>(각본, 미개봉, 2023년) 김숭늉 작가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사막의 왕>(각본·연출, 왓챠, 2022년) 돈이 전부라고 믿는 사람들과 돈이 다가 아니라 믿는 사람들의 선택에 관한 이야기.
<D.P.>(공동집필, 넷플릭스, 2021년) 웹툰을 각색해 넷플릭스 시리즈로 만든 작품.
만화와 웹툰
<나비의 모험>(2020년)
<사람의 사이로>(2020년)
(2015년) 헌병 군탈체포조(DP)를 다룬 웹툰. 탈영병을 쫓고 체포하는 과정에서 왜 탈영이 벌어지는지, 군대 내 가혹행위와 부조리를 고발하는 작품.
<아만자>(2013년) 김보통의 웹툰 데뷔작. 갑자기 위암 4기 판정을 받고 투병하는 스물여섯 청년의 이야기.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2014년)과 부천만화대상 시민만화상(2015년) 수상.
수필
<온 마음을 다해 디저트>(한겨레출판, 2019년)
<어른이 된다는 서글픈 일>(한겨레출판, 2018년)
<살아, 눈부시게! 김보통의 내 멋대로 고민 상담>(위즈덤하우스, 2018년)
<아직, 불행하지 않습니다>(문학동네, 20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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