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직과 카드빚으로 근심하던 한 청년은 부모에게 보낸 마지막 문자에 이렇게 썼습니다. ‘다음 생에는 공부를 잘할게요.’ 국민들의 고달픈 하루가 매일매일 계속되고 있습니다. 국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작은 정부’가 아니라 ‘국민에게 필요한 일은 하는 정부’입니다.”(문재인 대통령, 2017년 6월12일 국회 시정연설)
대통령의 첫마음이 당도하는 곳에서, 청년이 울었다. 비정규직도 울었다. 실은 같은 첫마음을 시민도 품고 있었다. 그즈음 문재인 정부가 해결해야 할 과제로 가장 많은 이(35.9%)가 ‘빈부 갈등 해소’를 꼽았다.(<한겨레> 창간 29돌 여론조사, 2017년 5월14일)
소득주도성장이라는 이름으로 품었던 꿈은 그 첫마음이다.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경제·사회 구조 개혁을 시도했다. 부유한 국가를 넘어 한 시민이 고달프지 않은 나라를 만들고 싶었다. 현실에 놓여 격렬하게 논쟁했고, 스산하게 잊혔으며, 쓸쓸하게 물러섰다. 이제 그 이름은 잘 들리지 않는다. 이름 따위 사라져도 좋다. 다만 절박하게, 그 첫마음만은 기억하길 바라는 소득주도성장에 얽힌 인물들을 만났다. 함께 5년의 행로를 되짚었다. 국가는 경제적 불평등을 어떤 정책으로 해소할 수 있는지, 그 과정에서 무엇에 부딪히는지, 그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했는지를 되새겼다.
남북 평화를 바랐던 첫마음, 지역균형발전을 바랐던 첫마음, 탈핵(탈원전)을 바랐던 첫마음의 5년도 함께 돌아봤다.
2022년 5월10일, 새로운 첫마음이 온다. 윤석열 대한민국 제20대 대통령이 취임한다. 첫마음이 첫마음에 전한다. _편집자주
2017년 5월10일~2022년 5월9일. 문재인 정부가 집권한 한국 사회에서 ‘소득주도성장으로 불린 것’의 행로를 듣고, 적기로 한다. 성공하는 이야기도 아니며 파멸하는 이야기도 아니다. 고민하는 이야기다. 깨닫는 이야기다. 행로에는 격렬함과 스산함과 쓸쓸함과 절박함이 공존한다.
이야기를 풀어낼 ‘소득주도성장’의 핵심 인물 네 명을 2022년 4월26~27일 차례로 만나 인터뷰했다. 홍장표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은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첫 번째 경제수석을 맡았다. 문재인 정부 소득주도성장 정책의 의미와 비전, 현실 앞의 고민을 전할 것이다. 황덕순 한국노동연구원 원장은 정부 시작부터 2020년 11월까지 청와대에서 고용노동비서관, 일자리기획비서관, 일자리수석을 맡았다. 노동제도를 둘러싼 사회적 타협과 거기서 부딪힌 일들을 되짚는다. 강병구 인하대 교수는 재정개혁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재정·조세 개혁의 필요성을 어떻게 설득해야 했을지 여전히 고민한다. 금융감독원 시장담당 부원장이었던 원승연 명지대 교수는 진보적인 학자로서 소득주도성장의 한계를, 동료 학자들과 펴낸 책 <정책의 시간>에 적었다.
정부마저 교체되는 이 시점, 이 이야기에 왜 귀 기울여야 하는가. 그건 우리가 주인공을 ‘소득주도성장으로 불린 것’이라는 다소 모호한 이름으로 적은 까닭과도 통한다. “소득주도성장이라는 이름은 사라질지도 모르죠. 다만 불평등과 그로 인한 성장 기반의 약화, 사회적 갈등이라는 현실은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심화됐습니다. 이를 해결해야 한다는 비전은 유효합니다.”(홍장표 원장) 그렇다. 우리의 진짜 주인공은 소득주도성장이 아니다. 소득주도성장이 품었던 꿈이다. 불평등의 해소.
국가는 경제적 불평등을 어떤 정책으로 해소할 수 있는가, 그 과정에서 무엇에 부딪히는가, 그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했는가. 도정에서 부딪힌 질문과 회한은 정부를 넘어 공유해야 할 자산이다.
* 소득주도 성장 : 시장의 불평등한 분배 구조를 개선해 가계소득을 끌어올리는 것이 지속가능한 경제성장에 보탬이 된다고 보는 입장이다. 국제노동기구(ILO) 등이 신자유주의 이후 대안적인 경제정책으로 소개한 ‘임금주도성장’을 바탕으로 삼는다. 기업·투자·수출을 통한 성장에 집중해온 과거의 정책 방향과 달리, 가계·소비·내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문재인 정부 초반에 최저임금 인상 등 소득주도성장의 정책 방향을 두고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
[%%IMAGE2%%]2014년 7월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국회에서 노란색 넥타이를 매고 흰 셔츠 소매를 걷어붙인 채 불평등 해소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신자유주의 성장전략은 전세계적으로 극심한 양극화와 소득 불평등을 초래했습니다. 지나친 불평등이 시장경제의 역동성과 효율성을 마비시켜서, 결국은 지속적인 성장도 불가능한 그런 상황이 되었습니다.”(‘중산층을 키우는 진보의 성장전략, 소득주도성장의 의미와 과제’ 토론회)
그 시절 신자유주의 이후의 경제·사회 정책을 고민하는 일에 여야가 따로 없다. 박근혜 정부의 최경환 부총리가 가계소득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야당과 학자들은 소득주도성장의 연구 결과를 공유하며 정책 브랜드로 삼고자 한다.
소득주도성장은 신자유주의와 다른 두 전제를 품었다. 우선 현재 시점에 시장에서 자본보다 노동(가계)의 몫이 늘수록 총수요는 늘어난다고 여겼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속에 현저하게 하락한 노동소득이 회복되면 가계소비가 늘고 경제의 효율을 더할 것으로 생각했다.
정부 정책으로 시장에서 자본과 노동의 몫을 조정할 수 있다는 믿음이, 또한 있었다. 정부는, 불평등을 교정하고 바로잡아야 하며, 할 수 있다. 최저임금 인상, 노동자의 협상력 강화를 위한 제도 개선을 꾀한다. 날로 커가는 시장의 불평등 앞에 재분배(조세·재정) 정책으로만 대응하던 이전 정책들에 견줘 과감하다. 물론 그간 해오던 정부 본연의 재분배 정책 또한 필요하다. 노동자 사이의 임금 격차를 축소하고 구조조정 과정의 사회안전망을 마련해야 한다.
2017년 5월10일. 소득주도성장으로 불린 것들, 시장 안팎의 관계를 재조정하는 경제정책, 불평등 해소라는 꿈이,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현실에 놓였다.
모든 학문에는 이론적 구성물들이 잘 정돈되어 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 구성물들이 무질서하게 편제되는 때도 있다. -하이먼 민스키, <케인스 혁명 다시 읽기> ‘1975년 초판 서문’
격렬한 여름, 두 해를 났다. 2017년 7월 이듬해 최저임금이 16.4% 인상됐다. 2018년 7월 최저임금은 10.9% 인상됐다. 앞선 4년 최저임금 인상률이 7~8%였던 데 견줘보면 큰 폭의 인상이다. 갈등은 도처에서 벌어졌다. 비 내리는 서울 광화문광장, 자영업자 3만 명이 모여 시위한다. 언론에서는 최저임금 인상으로 해고당하는 노동자를 일부러 찾아 적는다. 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학자들은 최저임금 인상의 고용 영향을 추정한 보고서를 내고, 반박한다.
여느 곳만큼 격렬했던 곳은 청와대다. “당연히 부작용을 예상했습니다. 고용이 줄 수 있고 자영업이 힘들어질 수 있지요. 그래서 사전 혹은 사후에 부작용을 보완하는 정책까지 패키지로 만들고자 했어요. 을과 을의 다툼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갑과 을의 공정경제 문제로 넘어갈 것으로 예상했습니다.”(홍장표 원장)
2017년 최저임금 인상 이튿날 정부는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부담 완화를 위한 소상공인·영세중소기업 지원대책’을 내놓았다. 일자리 안정자금(정부 분담)부터 상가임대차보호법 개정 계획(건물주 분담), 일감 몰아주기와 하도급 납품 단가 조정 계획(대기업 분담)이 담겼다.
대책은 추가된다. 2018년 3월 청년 일자리 대책을 발표했다. 노동계와의 갈등을 무릅쓰고 최저임금 산입범위를 조정했다. 대신 근로장려세제(EITC)를 확대했다. 2018~2019년 굵직한 자영업 대책만 다섯 번 더 발표했다. 숨 가쁘다. “올인이었지요. 매일, 하루 종일 그 회의였습니다. 여기서 밀리면 다른 정책이 갈 수 없을 것 같았어요.”(홍장표 원장)
‘올인’했건만 왜 최저임금 인상은 공약 실패에 대한 대통령의 두 차례 사과로 끝을 맺었나. 여기서 얻은 깨달음이 ‘인상 속도가 빨랐다’에 그칠 수 없다. 속력만이 문제가 아니다. 관건은 속도의 다름이다. 불평등을 해소하는 정책은 ‘최저임금 인상’ 하나로 이룰 수 없다. 모든 정책이 상호작용하지 않으면 최저임금 인상 하나도 제대로 이룰 수 없다. 부작용의 가능성을 짐작했고 ‘패키지’로 정책을 내놓았으나 그 모든 정책은 저마다 속도가 ‘달랐다’.
이를테면 일자리 안정자금은 2018년 1월, 6개월 뒤에야 지급된다. 반년쯤 어느 자영업자·소상공인은 마음 졸였다. 상가임대차보호법은 2018년 10월 개정됐다. 다소나마 자영업자의 임대료 부담이 줄어드는 데 1년3개월 걸렸다. 대기업의 일감 몰아주기 규제와 하청업체 납품 단가 인상은 더 늘어진다. 부족하나마 공정경제 3법이 국회를 통과한 건 2020년 말에 이르러서다. 납품 단가 문제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부동산 가격 급등과 부채 리스크 또한 비슷하다. 역시 예상했다. 홍장표 원장은 “국정과제와 관련된 리스크를 초기에 정리했다. 첫 번째가 최저임금, 그다음이 부동산이었다. 저금리 상황에서 부동산 가격이 세계적으로 상승하는 시점에 딱 걸렸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예상했으나 다양한 정책은 저마다 다른 시간표를 지녔다. 그 탓에 부단히 내놓는 부동산 정책의 총체적인 의지를 알 수 없다. 대출 문턱을 높여 집값을 안정시키길 원하는가, 아니면 대출을 풀어 내 집 마련을 지원하기를 바라는가. 다주택자를 통해 임대주택을 공급하길 바라는가, 아니면 다주택자가 매물을 내놓길 바라는가. 종합부동산세, 임대사업자 등록 제도는 모호하게 제시되고 보완하고 회수되길 반복한다.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적용은 2021년에야 대출 규제로서 제 노릇을 한다. “정책 조율이 잘되지 않았지요.”(홍장표 원장)
사실은 한 묶음이 되어 시장 내부의 불평등을 해소했어야 할, 서로 다른 속도의 정책과 정책 사이 불안이 들어찼다. 이런 말과 설득은, 그 불안들 앞에서 할 수 없었다.
“최저임금을 올린다고 바로 성장 효과가 나오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목표는 경제체질 개선입니다. 불평등 구조를 바꾸는 일이고 수십 년을 지속해야 할 일입니다. 당장 정책이 시행되고 비판받는 상황에서 그런 설명은 해서는 안 되는 거였죠. 변명밖에 되지 않으니까요. 기다려달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홍장표 원장)
이 책의 구성은 필자에게는 탈출을 위한 오랜 투쟁, 습관적인 사고와 표현의 양태로부터 탈출하려는 투쟁이었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1936년
그렇게 격렬했던 소득주도성장이 문득, 스산하게 식는다. 2018년 7월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 대통령은 ‘포용적 성장 정책’이라는 단어를 꺼내 든다. ‘경제 활력’ 또한 강조했다. 소득주도성장은 이대로 포용적 성장으로 대체되는가? 뜻을 알 수 없어 잠시 논란이 인다. 이내 잠잠해진다. 대통령 곁에는 경제관료 출신의 새 경제수석이 앉아 있다. 기다려야 하는, 노동자와 가계로부터 탄탄해지는, 불평등 해소 같은 경제체질 변화를 주장하던 학자들은 2018년 하반기 차례로 청와대와 정부에서 물러섰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2018년 들어 경기는 하강기에 접어든다. 성장률과 고용·분배 지표가 나란히 악화했다. 이런 때 관성은 당장 성장률을 끌어올려 지표를 지켜내려 한다. 경제 ‘활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2013년 3월부터 2017년 9월까지 이뤄진 경기 회복·상승기는 반도체 수출 대기업에 크게 기댔다. 경기하강과 함께 줄어드는 기업 투자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이 특히 크다.
소득주도성장과 포용적 성장, 어느 쪽이든 함께 놓지 못한 단어는 ‘성장’이다. 성장은 무엇인가. 소득주도성장부터 오해는 싹텄다. 양적 성장이 아닌 질적 성장, 단기 성과가 아닌 경제체질 개선을 의미하던 소득주도성장의 ‘성장’은 정치를 통해 현실로 넘어오면서 차츰 변한다. 민주개혁 진영의 성장론으로 받아들여져 현실을 만났다. 그때 성장은 단기 지표를 개선하는 것을 목표 삼은 듯 보였다. 문재인 정부 시작과 함께 내걸린 일자리 상황판은 상징적이다. 수치로 성과를 증명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은 지표가 하락하자 독이 됐다. 지표 앞에 ‘쇼크’ ‘참사’ 따위, 뜨겁고 서늘한 말을 수식으로 붙인 기사가 쏟아진다.
그때 원승연 교수가 느낀 안타까움은 이런 것이다. “1년 만에 지표 몇 개를 가지고 소득주도성장이 실패했다고 말하는 것도, 반대로 이후에 개선됐다고 자신하는 것도, 이것이 모두 정책의 영향이라고 규정하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정부가 이걸 하면 성장률이 올라간다고 설득하는 것은, 선진국에 이른 한국 경제 규모를 봤을 때 낡은 방식입니다.”
2019년 7월 일본의 수출규제, 2020년 2월부터 코로나19를 겪는다. “그때를 기점으로 개혁보다는 위기 대응 정부로 넘어간 것 같습니다.”(홍장표 원장) 국가산업을 지키기 위해, 감염병이 동반하는 경기침체 앞에 당장 성장률을 유지해야 한다는 논리는 강화된다. 불평등한 분배로 고통받는 시민은 자본도 노동도, 갑도 을도 구분 없이 국민이라는 한 테두리로 묶인다.
자본·갑의 위치에 있는 이들로부터 노동·을의 위치에 있는 이들로 전해지는 소득주도성장 특유의 불평등 해소 방법론은 그렇게 차츰 빛바랜다. 포용적 성장을 말하며 대통령은 여전히 ‘불평등 해소’를 말한다. 다만 그 해결 방법은 정부의 재정 지원뿐이다. 필요하다. 다만 기업과 자본의 부담은 옅어졌다. “우리 시민 수준이라면, 개인의 경제적 삶이 더는 평균이나 총량의 문제가 아니라 불평등의 문제라는 것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설득 과정이 없었던 것이 아쉽습니다.”(원승연 교수)
*2부 '소득주도성장 엔진은 어떻게 꺼졌나'로 이어집니다.
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974.html
방준호 기자 whor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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