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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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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득주도성장기 ②, 잊혀진 첫마음

문재인 정부 ‘소득주도성장’ 이끈 핵심인물 4인 인터뷰②
정책 기조 의미와 실현, 5년 뒤 남은 이상과 현실의 부조화
등록 2022-05-09 04:23 수정 2022-05-17 05:48
경제수석 당시 홍장표 한국개발연구원 원장(왼쪽), 책 <정책의 시간> 내용을 설명하는 원승연 명지대 교수. 연합뉴스, 한겨레 김명진 기자

경제수석 당시 홍장표 한국개발연구원 원장(왼쪽), 책 <정책의 시간> 내용을 설명하는 원승연 명지대 교수. 연합뉴스, 한겨레 김명진 기자


*1부 '소득주도성장 오답노트를 쓰다'(링크 삽입)에서 이어지는 기사입니다.

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973.html

5년 전, 이런 말을 건네는 첫마음이 있었다.
“실직과 카드빚으로 근심하던 한 청년은 부모에게 보낸 마지막 문자에 이렇게 썼습니다. ‘다음 생에는 공부를 잘할게요.’ 국민들의 고달픈 하루가 매일매일 계속되고 있습니다. 국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작은 정부’가 아니라 ‘국민에게 필요한 일은 하는 정부’입니다.”(문재인 대통령, 2017년 6월12일 국회 시정연설)
대통령의 첫마음이 당도하는 곳에서, 청년이 울었다. 비정규직도 울었다. 실은 같은 첫마음을 시민도 품고 있었다. 그즈음 문재인 정부가 해결해야 할 과제로 가장 많은 이(35.9%)가 ‘빈부 갈등 해소’를 꼽았다.(<한겨레> 창간 29돌 여론조사, 2017년 5월14일)
소득주도성장이라는 이름으로 품었던 꿈은 그 첫마음이다.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경제·사회 구조 개혁을 시도했다. 부유한 국가를 넘어 한 시민이 고달프지 않은 나라를 만들고 싶었다. 현실에 놓여 격렬하게 논쟁했고, 스산하게 잊혔으며, 쓸쓸하게 물러섰다. 이제 그 이름은 잘 들리지 않는다. 이름 따위 사라져도 좋다. 다만 절박하게, 그 첫마음만은 기억하길 바라는 소득주도성장에 얽힌 인물들을 만났다. 함께 5년의 행로를 되짚었다. 국가는 경제적 불평등을 어떤 정책으로 해소할 수 있는지, 그 과정에서 무엇에 부딪히는지, 그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했는지를 되새겼다.
남북 평화를 바랐던 첫마음, 지역균형발전을 바랐던 첫마음, 탈핵(탈원전)을 바랐던 첫마음의 5년도 함께 돌아봤다.
2022년 5월10일, 새로운 첫마음이 온다. 윤석열 대한민국 제20대 대통령이 취임한다. 첫마음이 첫마음에 전한다. _편집자주
3장 타협: 노동과 자본의 관계

사용자 또는 사용자단체와 근로자단체 사이에 자발적 교섭을 위한 메커니즘을 충분히 발전시키고 이용하도록 장려·촉진하기 위하여 국내 사정에 적합한 조치를 취하여야 한다. -1949년 만든 국제노동기구(ILO) 협약 제98호 제4조, 한국은 2021년 4월 비준했다

2019년 1월28일 민주노총 노동자 대의원 1천여 명이 서울 강서구 케이비에스(KBS) 아레나홀에 모였다. 10시간 토론했다. 노사정 대타협 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 참여와 불참 표결을 앞뒀다. “논의가 진행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질의와 의사진행 발언이 나왔다”(<경향신문>, ‘민주노총 경사노위 불참 의미 및 전망은?’)고 언론은 기록했다. 요란스러움을 전하는 문장에 어딘지 쓸쓸함이 묻어 있다. 민주노총은 이날 결국 경사노위에 불참하기로 했다. 민주노총의 사회적 고립을 염려하는 말들이 기사에 덧붙었다.

노동자와 자본, 정부 사이 사회적 대화와 대타협이야 1990년대 이후 늘 강조된 이상향이다. 다만 신자유주의화 속에 진행된 이전의 대타협은 노동의 양보와 그에 따른 파행으로 맺었다. 그래도 문재인 정부의 경사노위는 다를 것 같았다. 노동자의 협상력 강화를 주요 과제로 삼는 소득주도성장을 경제정책의 바탕으로 삼았으므로. “임금주도성장 전략은 비용 삭감과 이윤을 위한 구조조정에 대한 노동자의 협상력 강화를 필요로 한다.”(ILO, ‘Wage-led Growth’, 2013) 그 바탕에서 노동자 사이의 임금격차, 대기업-중소기업 격차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경사노위가 출범한 2018년 11월, 애초의 비전은 후퇴한 상태다. 최저임금 산입제도가 개편됐다. 근로시간 단축 제도 또한 정부가 자본에 밀려 물러선 것으로, 노동계는 여겼다. 경사노위는 제대로 된 첫 번째 사회적 대화기구가 되지 못했다. 정부가 주도해 제도를 만들고 경사노위가 뒤따르는 정도의 모습이 반복됐다.

문재인 정부를 거치며 노동계의 협상력은 제도적으로 다소 강화됐다. 노동자의 단결·교섭권을 폭넓게 보장하는 ILO 협약이 비준됐다. 그런데 분위기는 한층 불리하다. 대타협 참여 여부를 두고 민주노총 집행부와 조합원 사이 내부 갈등이 일었다. 외부의 노조 혐오 또한 거세다. “(경사노위 같은) 합의주의가 진짜 원인을 은폐하거나 왜곡하고 책임을 민주노조에 전가하는 통제 효과를 낳았다”(노중기, <신자유주의 노동체제와 민주 노조 운동>)는 비판도 나온다.

노동의 협상력은 윤석열 정부가 들어설 지금부터, 훨씬 더 중요하다. “(임금격차 해소, 민간부문의 비정규직 해소 같은) 아직 남은 과제는 정부 정책의 의지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것들입니다. 노동 영역에서 점차 정부의 역할이 줄고 노사의 자율적인 역할이 중요해질 것입니다.”(황덕순 원장)

재정개혁특별위원회에서 발언하는 강병구 인하대 교수(왼쪽), 일자리수석 당시 황덕순 한국노동연구원 원장. 한겨레 백소아 기자, 연합뉴스

재정개혁특별위원회에서 발언하는 강병구 인하대 교수(왼쪽), 일자리수석 당시 황덕순 한국노동연구원 원장. 한겨레 백소아 기자, 연합뉴스

4장 설득: 정부와 시민의 관계

세금은 자유와 평화를 망치는 악의 세력과 싸웁니다. 세금은 민주주의를 지킵니다. -미국 프랭클린 루스벨트 정부의 보편적 증세 계획 설득을 위해 만든 월트디즈니의 만화영화 <도널드 덕: 1943년의 정신>(Donald Duck: The Spirit of ’43) 가운데

시장 불평등을 막아보려는 시도는 불안과 비판 여론, 경기하강, 대타협의 파행 앞에 힘을 잃었다. 그래도 남은 희망은 정부의 역할을 바라는 시민의 절박함이다. 코로나19를 겪으며 국민 84.7%가 정부의 경제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2020년 6월, 한겨레 경제사회연구원 여론조사) 복지를 늘리고, 안전망을 마련하는 정부의 역할만은 어느 때보다 지지한다. 소득주도성장이 문제 삼았던 구조적 위기를 시민 모두 느꼈다. 국가의 역할이 절실하다. 그만한 재원이 필요하다.

일단 국가 부채를 늘려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 그렇게 해왔다. 2017년 36%였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은 2021년 47%로 늘었다. 다만 ‘할 수 있다’와 별개로 불안정하다. 가파른 나랏빚 증가폭은 너무 쉽게, 자주 공격받는다. 결국 증세 혹은 조세개혁은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국가의 역할을 위해 불가피하다. 어떻게 설득해야 할까.

“여전히 고민스럽다”고 강병구 교수는 말한다. 그는 2018년 4월~2019년 2월 재정개혁특별위원회(특위) 위원장을 맡았다. 특위는 그 어렵다는 조세개혁의 무대를 바꿔보려는 이례적인 시도다. 그동안 조세정책은 기획재정부의 몫이었다. 개혁보다 안정을 지향했다. 그렇다고 여당이 조세개혁과 관련해 눈에 띄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도 아니다. 조세저항이라는 오랜 트라우마 앞에 정부도, 정치도 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대신해주는 역할을 특위가 떠맡은 것일 수도 있다.

특위는 애초 중장기적인 개혁 로드맵을 만들고자 했다. 더 많은 시민이 세금을 내도록 하되, 많이 번 이들이 더 내는 구조(누진적 보편증세) 같은 것을 생각했다. 경제에 부담을 최소화하는 선에서 천천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조세부담률에 이를 방법을 탐구하려 했다.

다채로운 벽에 부딪혔다. 그 벽들을 강병구 교수는 짚어본다. 시간은 부족하다. 여론의 관심은 당장 현안(부동산, 유류세 등)에 쏠려 있다. 세제개혁을 원치 않는 경제관료 집단과도 갈등했다. 경기는 마침 하강기에 접어들어 세금 이야기는 한층 조심스럽다. 2018년 7월 특위는 자산소득 과세와 종합부동산세, 환경세 조정을 정부에 권고했을 뿐이다. 기획재정부는 그마저 세법 개정안에 담지 않거나 축소했다.

진짜 무대는 특위가 아니라 애초부터 정치여야 했다는 깨달음을 강병구 교수는 전한다. 여당과 야당은 집권당의 자리를 바꿔가며 같은 고민을 해온 터다.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그를 위해 재원이 필요하며, 증세 없이 한계가 있다는 것, 모두 안다. “새 정부도 비슷한 문제에 부딪힐 것입니다. 그렇다면 국회 차원에서 경제에 주는 부담을 최소화하면서 앞으로 몇 년 동안 조세부담률을 조금씩 높여 OECD 평균 수준에라도 맞추는 타협안을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강병구 교수)

2022년 5월9일, 문재인 정부는 막을 내린다. 그렇다면 소득주도성장으로 불린 것, 불평등 해소를 위한 노력은 지금 어디쯤 있나?

덜 중요한 숫자로 짐작한다. 시장소득을 기준으로 한 지니계수(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는 2017년 0.406에서 2020년 0.405로 큰 변화가 없다. 재분배 이후 소득을 기준으로 하면 0.354에서 0.331로 제법 크게 개선됐다. 소득 5분위 배율, 상대적 빈곤율, 노인 빈곤율지표로 봐도 시장 불평등은 엇비슷하거나 심화됐다. 재분배 효과가 확대됐을 뿐이다. 이전 정부의 추세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보다 좀더 중요한 제도 개선이 있다. 전 국민 고용보험 제도나 국민취업지원제도(실업부조)가 첫발을 내디뎠다. 사회안전망이 넓어졌다. 20세기 중반 마련된 ILO 핵심 협약이 2021년 비로소 비준됐다. 노동권이 최소한 근대적인 수준에 닿았다.

그보다 좀더 중요한 실패도 있다. 자산 가격 급등으로 시민의 관심은 자산과 부채로 쏠렸다. 자산과 부채를 구할 가능성이 있는 이들 사이의 공정 이슈로 불평등의 관심사는 좁아들었다. 최저임금이 소중하고, 복지 수혜가 절대적이며, 자산이 아닌 집이 필요한 이들의 목소리가 더는 잘 들리지 않는다.

결국 가장 중요한 바람이 있다. 좀더 체계적으로 정책이 조합되길, 단기 지표 앞에 개혁의 꿈마저 잃지 않길, 노동이 수고에 마땅한 힘을 구하길, 구조적인 고민 앞에 정치가 함께 무언가 해내길, 그리하여 여전한 불평등을 해소하길 다음 정부에 바란다.

5월10일 윤석열 정부가 시작한다. ‘윤석열 정부 110대 국정과제’에 ‘불평등’이라는 단어는 단 한 번 등장한다.(대한민국 어디서나 살기 좋은 지방시대) 다만 이런 말을 적어두었다. 소득주도성장의 꿈과 같은 말로 이해하고 불평등 해소, 그 바람을 놓지 않는다. ‘국민은 나라만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의 문제가 해결되기를 기대한다.’

방준호 기자 whor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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