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2월의 숫자. 한국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5개월째 3%대를 기록했다. 10년 만이다. 미국의 1월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전년 동월보다 7.5%까지 올랐다. 40년 만이다. 물가상승과 금리인상이 실물경제를 침체시키는 악순환을 우려한다. 생산 비용은 늘고 투자 자금 조달은 어려워질 것이다. 부채 부담은 늘 것이며, 물가상승에 따라 소비 부담은 커진다. “전세계적으로 예전의 인플레이션 악순환에 진입할 수 있다는 우려까지 제기되는 매우 중차대한 시기다.”(홍남기 경제부총리, 3월4일 물가관계 장관회의)
중차대한 시기, 라고 말했다. 지금 불안하게 바라보는 이 시기를 어느 정도 의미로 해석해야 할까. 반년 혹은 1년쯤 견뎌야 할 쇼크일 수 있다. 또한 한 세대 이상의 흐름이 뒤바뀌는 거대한 전환의 시작점일 수도 있다. 새 정부는 각각의 가능성에 대응하고 준비해야 한다.
지금으로부터 1년 뒤를 생각한다. 현재 물가상승과 금리인상이 적어도 그 정도 이어질 쇼크임은 분명하다. 코로나19로 풀린 유동성과 공급망 차질, 국제분쟁을 원인으로 짚는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대선 후보 TV토론회에서 지적한, ‘확장적 재정정책(재정확대)과 긴축적 통화정책(금리인상)이라는 어색한 조합’도, 이런 상황이라면 당분간 어쩔 수 없다. 한국은 유독 가계를 중심으로 부채를 늘려왔다. 금리가 오르더라도 시민과 자영업자가 무너지는 건 막아야 한다.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은 당분간 세밀하게 통제돼야 한다. 명목금리를 올려(물건에 견줘 돈을 좀더 귀하게 만들어) 소비를 조금은 진정시킨다. 다만 경제성장과 물가상승을 고려하며 실질금리(물가상승을 고려한 금리)가 인상되지 않을 정도로 조심스럽게 접근한다. 그렇게 되면 명목금리가 조금 올라도 부채 부담은 큰 틀에서 늘지 않는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래도 취약한 위기 집단은 표적 삼아 재정 지원(대출 지원)을 한다. “교과서적이지는 않지만, 현실에서는 금리를 올리며 재정을 동시에 늘리는 것이 가능하고 필요한 때도 있다.”(우석진 명지대 교수)
이것으로 충분한가? 지금으로부터 한 세대 이후, 오랜 디플레이션 방향의 시대를 맺고 인플레이션 방향의 시대로 전환하는 중이라면? 화폐에 기댄 모든 주체의 관계를 재조정하는 데로 넘어간다. 거대한 전환의 배경으로 자주 짚이는 건 세계 인구다. 노동가능인구 감소와 고령인구 증가는 별다른 조처가 없다면 물가를 끌어올린다. 2018년 3754만7천 명을 정점으로 2019년부터 한국의 생산가능인구(15~64살)는 감소로 돌아섰다. 중국의 생산가능인구는 한발 앞서 감소를 시작했다. 2013년 10억582만 명을 정점으로 2020년 9억7천만 명까지 3500만 명 가까이 줄었다. ‘정점’이 맞다. 생산가능인구의 감소 흐름은 뒤집힐 가능성이 희박하다. 가팔라질 가능성은 크다. 출생률은 낮아지고 있다.
1980년대 이후 지금까지 세계는 이런 모습이었다. 옛 공산주의국가와 무엇보다 중국이 세계시장에 참여했다. 신대륙 발견쯤은 우스운, 엄청난 규모의 노동가능인구를 새로 구했다. 소비보다 저축 액수가 큰 노동가능인구는 물가하락을 유도한다. 세계화는 확장했다. 생산 비용을 절감하는 세계화 역시 디플레이션적이다.
일해도 가난하지 않은 균형점은 어디풍요하고 아름다웠나. 누군가 그랬고 누군가 그렇지 못했다. 빚내도 저금리로 별 부담이 없으니 부채는 늘었다. 부채를 끼고 선진국의 자산 가격은 올랐고, 자산을 점한 이는 풍요로웠다. 선진국 노동자도 낮은 물가의 혜택을 얼마간 누렸는데, 부유해지진 못했다. 세계적으로 노동은 수요보다 공급이 늘 많았고(일자리가 부족했고) 노동자의 힘은 약화됐다. 임금상승률은 정체됐다. 임금이 정체됐으니, 전통적인 이론과 달리 취업자가 느는데도 물가가 오르지 않는 건 자연스럽다.(필립스 곡선 평탄화) 불평등은 심화했다. 가난한 선진국 노동자는 갑작스러운 실직의 원인을 따져 물으며, 생산기지의 세계화와 이민자를 탓하기도 했다. 우파 포퓰리즘이 득세했다.(찰스 굿하트·마노즈 프라단, <인구 대역전>)
생산가능인구 감소는 그 반대, 인플레이션을 향한다. 디플레이션이 좋고 인플레이션이 그르다거나, 혹은 그 반대라고 말할 수는 없다.(마찬가지로 극단적이면 둘 다 좋지 않다.) 다만 변화는 적응을 요구한다. 익숙하게 알아온 시장 주체들의 관계를 재조정하는 과정이다. 새로운 균형점을 발견해야 한다. 그 목록은 숱한데, 몇 가지만 떠올려봐도 이렇다.
기업과 노동자의 관계. 인구 감소로 귀해진 만큼, 또한 물가상승으로 고통받는 만큼 노동자는 더 높은 실질임금(물가상승을 넘는 임금)을 쟁취할 수 있는가. 세계 노동이 풍부했던 저물가·저금리 시대를 오래 지내며 노동자의 협상력은 훼손될 대로 훼손됐다. 이 힘의 관계가 역전되지 않는다면, 높은 물가 속에서 노동자인 시민은 일해도 가난한 상황을 벗어날 수 없다. 소비가 침체된다. 아예 적절한 대우 없는 노동을 포기해버릴 수도 있다. 생산은 침체된다.
정부와 시민의 관계. 금리가 낮을 때 재정을 적자 국채로 조달하는 일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그런데도 한국은 국가부채에 지나치게 민감했다.) 금리가 높아지면 정부에도 부채 부담은 늘어난다. 그렇다고 고령화와 만연한 외부의 위험 앞에 재정의 역할을 줄일 수도 없다. 조세를 더 걷어야 한다. 증세를 설득하는 일은 쉽지 않다. 물론 이는 노동자의 실질임금 상승과도 연결된 문제다. 임금이 올라야 납세 여력도 생긴다.
새로운 노동자의 진입. 부족해지는 생산가능인구를 최대한 유지하려면 새로운 노동자를 찾아나서야 한다. 여성, 고령층, 외국인이 주변 노동에 머물 수 없다. 그동안 일터에서 벌어진 구조적인 차별과 돌봄 부담이 해결돼야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가 늘어난다. 고령인구 노동이 지금처럼 저임금 노동에 머문다면 (생산성 높은) 노동인구를 확보하는 관점에서도 노동시장 차별 구조의 심화 면에서도 문제가 된다. 갈등 없이 이주노동자를 국내 노동자와 동등하게 받아들일 준비 또한, 아직 부족하다.
기술 발전이나 중국을 대체할 인도·아프리카의 부상, 고령층의 낮은 소비 성향 등은 인플레이션 경향을 다소 완화할 수도 있다. 다만 화폐가치의 하락과 상승 앞에 돈으로 가치 매긴 모든 사람과 사건과 사물의 관계는 흔들린다.
바로 보고, 날로 변할 새로운 균형점에 맞춰 공정한 해법을 제시하는 건 정부 몫이다. 그렇다. 새 정부 원년, 갑작스러운 물가상승에 화들짝 놀란 2022년은 그 혼란의 와중에 우리가 서 있음을 깨달았기에 중차대한 시기다.
방준호 기자 whor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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