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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훈처도 포기한 독립유공자 후손을 찾아내다

<한겨레21> 보도로 알려진 이석영 선생의 외증손 10명, 보훈처 ‘독립유공자 후손’ 의결
등록 2022-03-07 22:31 수정 2022-03-08 22:03
2022년 3월2일, 후손이 끊겼다고 잘못 알려졌던 독립운동가 이석영 선생의 직계 후손인 김용애(87·가운데)-김창희(54·왼쪽)씨 모자와 최광희(83)씨가 <한겨레21>의 첫 단독 보도가 나간 지 반년 만에 국가보훈처 심사위원회에서 독립유공자 후손임을 인정받은 뒤 관련 기사들을 다시 찾아보고 있다.

2022년 3월2일, 후손이 끊겼다고 잘못 알려졌던 독립운동가 이석영 선생의 직계 후손인 김용애(87·가운데)-김창희(54·왼쪽)씨 모자와 최광희(83)씨가 <한겨레21>의 첫 단독 보도가 나간 지 반년 만에 국가보훈처 심사위원회에서 독립유공자 후손임을 인정받은 뒤 관련 기사들을 다시 찾아보고 있다.

<한겨레21>이 단독 보도한 ‘독립운동가 이석영(1855~1934) 선생의 직계 후손 생존’ 사실을 국가보훈처가 공식 확인했다. 2021년 7~8월 <21>이 두 차례에 걸쳐 관련 내용을 처음으로 보도한 지 6개월여 만이다.

2022년 2월23일 국가보훈처는 보도자료를 내 “그동안 직계 후손이 알려지지 않았던 독립유공자 이석영 선생의 서거 후 88년 만에 직계 후손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보훈처는 “이석영의 장남인 이규준 선생은 온숙·숙온·우숙 세 딸을 뒀고, 그 세 딸의 자녀 중 10명이 생존해 있다”고 확인했다.

이런 사실은 앞서 <21>의 보도로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이숙온의 장녀인 김용애(87)는 “너무나 기쁘고 꿈만 같다. 하늘에 계신 어머니와 아버지도 흐뭇하게 내려다보실 것”이라고 벅찬 감정을 털어놨다. 그는 “<한겨레21>의 끈질긴 관심과 보도, 그리고 아들과 며느리가 힘껏 애쓴 노력이 아니었더라면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겠어요?”라며 “<한겨레21>에도 정말 감사하다”고 말했다.

일본이 조선을 강제 합병한 직후인 1910년 12월, 구한말 경주 이씨 명문가 출신이자 당대의 거부였던 이석영은 전 재산을 처분한 뒤 이회영·이시영 등 6형제와 일가족 40여 명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만리타향에서 쓸쓸하게 순국했다. 이들 형제가 세운 신흥무관학교(1911~1920)는 일제의 압박으로 강제 폐교되기 전까지 3500여 명의 독립군 지휘관과 전사를 길러낸 항일 무장투쟁의 요람이었다.

신흥무관학교 세운 6형제 독립운동가 후손

2021년 7월 <21>은 이규준(1896~1928)의 손녀이자 이숙온의 맏딸인 김용애, 온숙의 딸 최광희(83)와의 인터뷰와 한 달간 심층 취재를 바탕으로

“나는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이석영의 증손녀이다”(제1373호)라는 첫 기사와 관련 기사들을 표지이야기로 보도했다. 이어 8월에는 “독립운동가 이석영 후손 증명 공문 대만서 나왔다”(제1377호)는 후속 보도로 직계 후손 생존 사실을 거듭 확인했다.

앞서 2021년 2월, 이석영이 망명 전에 살았던 경기도 남양주시는 이석영 선양사업을 하면서 그의 사후 87년 만에 처음으로 장례식을 봉행했다. 그러나 생존 유가족이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았던 까닭에 김씨 가족은 그런 사실조차 뒤늦게 언론 보도를 통해 알았다. 김용애는 <21>과의 첫 인터뷰에서 “너무 속상하고 기가 막혔다. 지금이라도 진실을 밝히고 부모님의 명예를 회복해드리는 게, 내가 저세상에 가서 어머니를 만나기 전 마땅히 해야 할 도리 아니겠느냐”고 토로한 바 있다.

<21>의 보도 이전까지는 이석영의 두 아들 이규준과 이규서 모두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요절하면서 대가 끊겼다는 게 학계의 통설이자 보훈처 ‘공식’ 입장이었다. 김씨를 비롯한 생존 유가족의 제적(옛 호적)에 기재된 조부모 이름이 ‘이규준’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의 검거를 피해 수시로 거처를 옮기거나 가명을 쓰는 등 엄혹했던 시대적 환경은 국가 공문서로 확인되지 않는다는 현실 앞에 무력했다.

이석영의 손녀이자 이규준의 세 딸인 온숙·숙온·우숙 자매가 1978년 서울에서 어머니 한평우와 함께 찍은 사진, 숙온의 결혼식(1934년 중국 상하이)에 도산 안창호가 주례를 선 사진, 해방 뒤인 1948년 백범 김구 선생이 김씨에게 ‘세손(世孫) 김용애 기념’이라는 서명까지 해준 친필 휘호 등 결정적 물증과 여러 후손의 일관된 증언은 ‘제적 확인 불가’라는 형식적 원칙의 벽을 넘지 못했다. <21>의 확인 취재 과정에서도 보훈처 공훈 업무 관계자는 “후손 검증의 기본은 제적과 당사자 집안의 족보 등 가족관계 증명 서류이며 사진 자료는 보지 않는다. 이석영 일가는, 저희가 그 후손이 없다는 걸 확인했다”고 밝혔다.

후손임을 확인하려고 대만까지 찾아가

보훈처는 <21>의 첫 번째 보도와 김용애의 독립유공자 유족 등록 신청을 계기로 사실 확인 조사를 시작했다. 보훈처는 2월23일 발표한 보도자료에서 “대만의 타이베이 주재 대한민국 대표부에 협조를 구해 대만 거주 이우숙의 대만 호적등기부와 자녀 관계, 연락처 등을 확보했고, 호적등기부 ‘부모’란에 이석영 선생의 장남과 며느리 ‘이규준, 한씨’가 기재된 사실로 선생의 직계 후손을 처음으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우숙의 대만 호적부에서 ‘친부 이규준’의 이름을 처음 찾아낸 것은 보훈처가 아니라 유가족이었다. 김용애 가족이 사비를 들여 대만의 기록을 뒤지고, 한동안 연락이 끊겼던 이우숙의 아들딸, 손자녀와 다시 소식을 주고받기 시작한 사실을 <21>이 속보로 내보내기 전까지 보훈처와 외교부는 의미 있는 단서를 찾지 못했다.

김씨 가족이 자신들의 뿌리를 찾아낸 과정은 김씨가 “천우신조”라고 표현했을 만큼 극적인 순간의 연속이었다. 보훈처는 유족 등록 신청자 김용애에게 ‘이석영의 직계 후손’을 인정할 공문 증거를 요구했지만, 국내에선 김씨와 이종사촌들의 제적 어디에도 조부 이규준(이석영의 장남)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김씨의 간절한 소망이 실현될 방법을 찾던 아들 김창희(54)와 며느리 한수인 부부는 대만에서 혈육의 뿌리를 찾아보기로 했다. 이규준의 3녀 이우숙이 대만에서 살았고, 1978년에는 서울을 방문해 온숙·숙온·우숙 자매와 어머니 한평우까지 네 모녀가 재회한 사실에 착안했다. 김씨 가족은 가족 재회 이후 한동안 편지 왕래도 했으나 다시 연락이 끊기고 말았다. 이우숙이 중국인 남편과 결혼(1936년)한 뒤 한국어를 거의 잊어버린 까닭에 언어 소통이 큰 장벽이 됐다.

김씨 아들 부부의 부탁을 받은 임병옥 대한민국재향군인회 대만지회장이 이우숙의 옛 편지 봉투에 적힌 주소를 찾아갔으나 해당 주소지는 공터로 변해 있었다. 임 회장은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 격으로 탐문한 끝에 우연히 이우숙의 가족 이야기를 알던 주민을 만났다. 한국과 대만의 혈육 사이에 다시 연락이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보훈처는 대만 거주 이우숙의 호적부 부모란에 ‘부 이규준’과 함께 ‘모 한씨’(母 韓氏)라고 성씨만 기재된 인물이 온숙·숙온·우숙의 친모 ‘한평우’가 맞는지를 공문서로 확인하려 했다. 이 일도 김용애씨 가족이 떠맡아야 했다. 그러나 남성 중심 가부장제 질서가 확고했던 당시에 ‘출가외인’인 여성의 본명은 제적과 족보 등 어느 공문서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또다시 뜻밖의 난관에 부닥친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거짓말처럼 돌파구가 열렸다. 앞서 <21>의 첫 보도 때, 이석영 6형제의 넷째 이회영의 친손자인 이종찬(85) 우당이회영선생 교육문화재단 이사장(전 국가정보원장)이 보내 지면에 실은 글에 “이규준의 배(配) 청주한씨 부 기동(淸州韓氏 父 基東)”의 이름이 결정적 단서가 됐다. 김용애의 며느리 한수인은 한국에서 한씨 본관이 ‘청주 한씨’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고 ‘한기동’이라는 이름에서 실낱같은 희망을 품었다.

청주 한씨 족보에 적힌 ‘이규준’ 세 글자

한수인은 한씨 종친회를 찾아가 사정을 말하고 족보를 뒤진 끝에 ‘29세손 한기동’의 1남3녀 중 셋째딸 이름에 ‘이규준’이라는 이름이 올려진 것을 확인했다. 결혼한 여식은 족보에 본인 이름이 아니라 사위의 이름을 올린 관행이었다. 대만 호적부에서 ‘이규준’의 이름을 찾아냈을 때만큼이나 극적인 순간이었다. 한수인은 한씨 종친회의 도움으로 시증조모 한평우를 기억하는 웃어른들을 만나 생생하고 구체적인 증언까지 들을 수 있었다.

이규준의 장인 ‘한기동’ 집안의 흔적은 1967년 10월14일치 <동아일보>가 ‘조국의 혈연을 찾아달라’는 제목으로 보도한 대만발 기사에도 나온다. 당시 대만에 다른 사안의 취재를 간 기자가 마침 이우숙이 대만 한교협회(교민협회)에 조국의 친척을 찾아달라고 호소한 사실을 알고 이우숙을 인터뷰했다. 이 기사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이우숙의) 두 언니(온숙·숙온)가 외사촌 한기봉·한기준 형제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갔다. 이것이 언니들과의 영이별이었다. 그 뒤 둘째 언니 숙온이 결혼한 것까지는 외가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만주사변과 2차 대전으로 서신 연락이 끊기고 말았다.” 온숙·숙온과 귀국길에 동행한 사촌 형제 한기봉·기준은 한기동의 친손자들이다.

독립운동가 이석영의 아들인 이규준과 한평우가 부부이며, 이들 사이에 온숙·숙온·우숙 3녀가 있었고, 그 후손이 생존한다는 사실은 이처럼 유가족의 힘겨운 노력 덕분에 문서로 모두 확인됐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의 대부분을 후손이 시간과 품, 비용을 들여 해낸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한국과 대만 양쪽 후손들의 유전자를 대조해 혈육 관계를 최종 확인하는 절차뿐이었다.

보훈처의 협조 요청을 받은 주타이베이 대한민국 대표부와 대만 정부는 이우숙의 후손들에게 유전자 검사를 요청했다. 서울의 김씨 가족들도 대만 쪽 친척에게 <21>이 보도한 기사들을 한자로 번역해 보내주면서까지 취지를 설명하고 최대한 조심스럽게 유전자 검사 협조를 부탁했다. 그러나 초기만 해도 대만 쪽 가족은 갑자기 정부 관계자들이 찾아오고 유전자 검사를 요청하는 것에 몹시 당황하고 상당한 경계심을 보였다고 한다.

김씨 가족은 그 뒤로 대만의 친척에게 ‘유전자 검사’ 이야기는 일절 꺼내지 않고 그들이 이해할 때까지 기다렸다. 극적으로 다시 이어진 양쪽 집안은 거의 날마다 메신저를 통해 영어로 소식을 주고받으며 혈육의 정을 쌓았다. 가족사진과 동영상, 선물도 오갈 정도가 됐다. 그렇게 석 달여가 흐른 뒤 2021년 11월 대만의 후손들이 유전자 검사에 동의한 데 이어, 12월에는 김용애와 이종사촌 최광희(이온숙의 딸) 등 후손도 유전자 검사를 받았다.

보훈처, 유전자 검사로 “동일 모계” 확인

보훈처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으로부터 유전자 대조를 의뢰해 ‘동일 모계임이 배제되지 않음’이라는 회신을 받아 두 후손이 혈족임을 확인한 뒤, 심의위원회를 거쳐 이석영 선생의 외증손 10명을 독립유공자 후손으로 의결했다. 이들은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령에 따라 국가로부터 일정한 복지 혜택을 제공받는다. 그중 보훈급여금은 후손이 여러 사람일 경우 유가족이 합의한 한 명의 ‘수권자’에게만 주어진다. 김용애와 아들 부부는 “독립운동에 모든 것을 바치신 할아버지들의 뜻을 받들어 보훈급여금을 기부금 형식으로 사회에 환원하고, 일회성 이벤트에 그치지 않도록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겠다”고 말했다.

글·사진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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