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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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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독립운동가 이석영 후손 증명 공문 대만서 나왔다

재산과 목숨을 독립운동에 바친 이석영, 후손 없다고 알려졌으나
<한겨레21> 제1373호 보도 뒤 후손과 대만 거주 교민이 호적등본 확인
등록 2021-08-23 13:15 수정 2021-08-24 00:44
2021년 8월2일 독립운동가 이석영의 증손녀이자 이규준의 외손녀 김용애(86·오른쪽)씨와 그의 아들 김창희씨가 자신들이 이석영의 직계 후손임을 법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서울지방보훈청에서 독립유공자 유족 등록 신청서를 작성하고 있다. 조일준 기자

2021년 8월2일 독립운동가 이석영의 증손녀이자 이규준의 외손녀 김용애(86·오른쪽)씨와 그의 아들 김창희씨가 자신들이 이석영의 직계 후손임을 법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서울지방보훈청에서 독립유공자 유족 등록 신청서를 작성하고 있다. 조일준 기자

“찾았다! 찾았어요!”

제76주년 광복절을 나흘 앞둔 2021년 8월11일 저녁, 독립운동가 이석영 선생(1855~1934, 이하 호칭 생략)의 증손녀 김용애(86)와 그의 아들 김창희, 며느리 한수인 부부는 멀리 대만(타이완)에서 날아온 소식에 벅차오르는 감격과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휴대전화 메신저로 받은 호적등본의 사진에는 ‘父 李圭駿(부 이규준)’이라는 이름 석 자가 또렷했다. 눈으로 보면서도 쉬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발신자는 대만 한인회장을 지낸 임병옥 대한민국재향군인회 대만지회장이었다.

후손이 끊겼다고 잘못 알려진 독립운동가 이석영의 직계 후손이 여러 명 생존한다는 사실이 대만 정부가 작성하고 발급한 가족관계 문서로도 확인됐다. 이석영의 아들이자 역시 독립운동가였던 이규준(1896~1928)의 손녀인 김용애의 가족은 최근 이규준의 3녀로 대만에서 살았던 이우숙의 호적등본에서 부친 이규준의 이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앞서 2021년 8월 초 <한겨레21>(제1373호)이 최초로 보도한 김용애 일가의 사연이 대만의 공문서로 뒷받침된 것이다.

대만 공문서에 ‘아버지 이규준’ 또렷이

이석영은 17세기 조선의 문신 백사 이항복의 후손으로, 이후 내내 정승과 판서를 배출한 명문가이자 걸출한 독립운동가 집안인 ‘경주 이씨 6형제(건영·석영·철영·회영·시영·호영)’ 중 둘째다. 이석영은 규준·규서 두 아들을 뒀고, 규준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시기에 온숙·숙온·우숙 세 딸을 뒀다. 온숙은 해방된 이듬해인 1946년 남편과 귀국했고, 숙온은 앞서 1934년께 한국(조선)으로 돌아왔다. 우숙은 1936년 중국인 군인과 결혼한 뒤 대만으로 건너갔다. 김용애는 둘째 숙온의 장녀이다. 장녀 온숙의 자손도 최광희(82)의 남매와 그 자녀들까지 다수가 살고 있다.

대만 핑둥시 호정(戶政)사무소가 발급한 이우숙의 호적등본에 ‘부 이규준, 모 한씨’라는 이름이 또박또박 쓰여 있다. 이우숙이 이규준의 3녀(셋째 딸)라는 사실도 확인된다. 김용애 제공

대만 핑둥시 호정(戶政)사무소가 발급한 이우숙의 호적등본에 ‘부 이규준, 모 한씨’라는 이름이 또박또박 쓰여 있다. 이우숙이 이규준의 3녀(셋째 딸)라는 사실도 확인된다. 김용애 제공

<한겨레21>이 열람한 이우숙의 호적등본에는 남편인 ‘호장(호주) 장◦◦’의 이름 옆 칸에 ‘처(妻) 장이우숙, (처의) 부 이규준, 모 한씨(한평우)’의 성명이 정서돼 있다. 대만 핑둥현 핑둥시 호정(戶政)사무소가 발급한 이 공문서에는 ‘본부 등본과 호적등기 호적 기재가 다르지 않음’이란 공증 문구와 직인이 찍혔다. 대만에서는 여성이 결혼할 경우 본디 자기 성씨에 남편의 성씨를 덧붙이는 복성주의(複姓主義)를 채택하고 있다. 앞서 1967년 10월 <동아일보>는 ‘조국의 혈연을 찾아달라’는 제목의 대만 현지발 기사에서 이우숙이 40년 전에 헤어진 혈육을 찾는 안타까운 사연을 전한 바 있다.

일본이 조선을 강제 병합한 해가 저물어가던 1910년 12월30일 새벽, 이석영 등 여섯 형제는 집안의 재산을 전부 처분한 거금을 챙겨 40여 명의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한 뒤 항일무장투쟁의 요람이던 신흥무관학교(1911~1920)를 세우고 운영했다. 신흥무관학교는 강제 폐교되기 전까지 3500여 명의 독립군 지휘관과 전사를 길러냈다. 이석영의 아들 규준도 독립운동에 나섰으나 요절했고, 엄청난 가산과 명문가의 안위를 독립운동에 바친 이석영은 1934년 중국 상하이에서 79살에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이규준은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뒤 일제 주요 인물 암살과 밀정 처단에 앞장선 다물단의 핵심으로 활동하다 1928년 서른둘 젊은 나이에 석연치 않은 죽음을 맞았다. 이후 그의 아내 한평우는 생계를 위해 세 딸을 남겨둔 채 재가했고, 10대 어린 나이의 자매들도 머지않아 뿔뿔이 헤어진 채 힘겹게 살아내야 했다. 공교롭게도, 한국에 있는 이규준의 두 딸 온숙과 숙온의 호적등본에는 친부 이름이 이규준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기록됐다. 상당수 독립운동가들이 엄혹한 일제 감시와 탄압을 피해 신분을 감추려 가명을 사용했다는 정황은 공문서 기록이라는 행정 앞에서 무력했다. 광복 후 최근까지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기록은 물론 학계와 독립운동단체, 언론의 자료에도 이석영, 이규준의 후손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어서 ‘절손’됐다고 알려진 이유다.

1978년 서울 연희동 김용애의 자택에서 이석영의 세 손녀와 가족이 모여 찍은 기념사진. 대만에 살던 이우숙이 한국에 사는 언니 이숙온의 집을 찾아와 세 자매가 40년 만에 재회했다. 이 사진은 이우숙의 아들이 보관하고 있었다. (왼쪽 위부터) 이온숙, 이숙온, 이우숙

1978년 서울 연희동 김용애의 자택에서 이석영의 세 손녀와 가족이 모여 찍은 기념사진. 대만에 살던 이우숙이 한국에 사는 언니 이숙온의 집을 찾아와 세 자매가 40년 만에 재회했다. 이 사진은 이우숙의 아들이 보관하고 있었다. (왼쪽 위부터) 이온숙, 이숙온, 이우숙

뿔뿔이 흩어진 독립운동가 이석영 집안

그러나 김용애의 가족이 이석영-이규준의 생존 후손임을 보여주는 사진과 물증, 관련자의 증언은 차고 넘친다. <동아일보> 보도를 계기로 1978년 이우숙이 두 언니와 극적으로 재회할 당시 어머니 한평우까지 네 모녀의 가족이 함께 찍은 사진, 1929년 도산 안창호가 주례를 선 이온숙의 결혼 사진, 1948년 백범 김구가 중학생 김용애에게 설날 선물로 준 친필 휘호 등은 모두 한 방향을 가리킨다. 이 모든 ‘방증’은 가족관계증명서나 제적증명(옛 호적증명)이 없다는 한 가지 이유 앞에서 힘을 잃었다. 이번에 대만에서 확인된 이우숙의 호적등본은 이석영 후손의 생존 사실을 입증하는 결정적 자료다. 이번 사례처럼, 대한민국 정부가 아니라 외국 정부의 호적증명도 독립유공자 후손 판정에 효력을 지닐까? 이에 대해 국가보훈처는 “보훈처에서 확인한 공적 자료와 사진 등 증거자료뿐만 아니라 외국 정부에서 발급(발견)한 문서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유족 여부를 판단”한다고 밝혔다.

이석영-이규준 부자의 혈손 기록이 명시된 가족관계증명서를 찾아내기까지는 서울에 사는 김용애와 아들 부부, 대만 타이베이 거주 교민인 임병옥 지회장의 간절한 마음과 협업이 결정적 구실을 했다. 김용애 가족은 <한겨레21>의 첫 보도가 나간 직후 보훈처에 독립유공자 후손 등록 신청서를 낸 것과 별개로, 이우숙이 살았던 중화민국(대만)의 한인회를 통해 직접 ‘뿌리 찾기’에 나섰다. 가족의 사연을 들은 임병옥 지회장도 번거로움을 마다 않고 ‘내 일처럼’ 움직였다. 그는 “일본에 침탈당한 조국을 구하기 위해 전 가족과 모든 재산을 희생시킨 훌륭한 독립유공자가 계셨고, 그 후손이 대만에 살고 있다는데 우리 조국은 그들에게 해준 것이 없다는 안타까운 생각에,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어떻게든 이들이 후손임을 증명하는 서류를 찾아야 하겠다는 사명감이 생겼다”고 했다. “이런 일을 할 기회를 준 한국의 (김용애) 가족에게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고도 했다.

임병옥 지회장은 생면부지인 김용애 가족의 부탁을 받고 발 빠르게 움직였다. 1980년대에 이우숙이 김용애 가족에게 보낸 편지의 겉봉에 적힌 주소(대만 핑둥시 ◦◦로 ◦◦번지)와, 장씨 성을 가진 이우숙의 두 '아들'(뒤에 딸로 확인됨)의 이름이 유일한 단서였다. 먼저 핑둥 경찰서에 전화 문의를 했으나 소득이 없었다. 이우숙의 남편이 군인 장교(대령 예편)였다는 점에 착안해 한국의 보훈처에 해당하는 대만 행정원국군퇴역관병보도회에 조회를 요청했지만 ‘개인정보 보호’ 원칙에 따라 당사자 가족이 아니면 확인이 불가능했다. 주소지에 직접 가보는 수밖에 없었다.

임병옥 전 대만 한인회장이 발로 뛰어 찾아내

8월10일, 임병옥 지회장은 대만 최북단 타이베이에서 350㎞나 떨어진 최남단 도시 핑둥까지 차를 몰았다. 그러나 어렵게 찾아간 주소지는 집은커녕 사람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공터로 변해 있었다. 마을 주민들에게 탐문했지만 ‘서울에서 김 서방 찾기’였다. 막막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마침 교회에 들어가던 주민에게 이우숙의 '아들'의 이름을 대며 아느냐고 물어봤다. 그는 그 이름은 전혀 몰랐지만 ‘장’씨 성을 가진 다른  사람을 알고 있었다. 혹시나 싶어, 교회 목사의 도움으로 그 사람의 집을 찾아갔고, 바로 그가 이우숙의 장남 장◦◦임을 확인했다. 앞서 알고 간 이름은 이우숙의 출가한 딸들이었다. 임병옥 지회장은 <한겨레21>에 보내온 메모에 “그 흥분을 어떻게 감당하기 어려워 한동안 말문을 열 수 없었다”고 돌이켰다.

이우숙의 막내아들도 연락을 받고 한달음에 왔다. 이들은 “한국의 외가 소식을 듣게 돼 그야말로 천우신조”라며 감사한 마음을 표했다고 한다. 특히 이우숙의 차남은 이우숙이 한국의 혈육을 방문했던 이듬해인 1979년께 혼자서 한국으로 와 김용애의 집에서 나흘간 머문 적이 있다고 밝혔다. 이는 김용애의 아들 김창희의 어린 시절 기억과도 일치한다. 다음날인 8월11일, 임병옥 지회장은 이우숙의 아들과 함께 호정사무소에 가서 부모의 호적등본을 떼었다. 이우숙의 아버지이자 김용애의 친할아버지 ‘이규준’의 이름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여든여섯 할머니가 된 김용애는 “호적등본 사진을 처음 보는 순간 꿈인가 생시인가 싶었다”고 했다. “(사진을) 다시 보고, 다시 보고…. 꿈은 아니겠지? 진실은 밝혀진다, 이건 기적이다, 지성이면 감천이구나…, 별생각이 다 들더라고요.” 그는 “정말 큰 고비를 넘었다. 여기까지 온 것만도 큰 보상을 받은 것 같다”며 “아직 국가가 할 일이 남았다. (뿌리 찾기의 완성은) 이제부터다”라고 말했다.

앞서 <한겨레21>이 ‘이석영 직계 후손 생존’을 보도하자 보훈처는 곧바로 외교부와 공조해 대만에서 이우숙의 부모 및 가족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공적 자료 추적에 나섰다. 주타이베이 한국 대표부는 대만 외교부에 협조 요청을 했다. 그러나 김용애 가족과 임병옥 지회장이 이우숙의 호적등본에서 이규준의 이름을 확인하고 그 사실을 한국 대표부에 알려주기 전까지 양국 정부 쪽에선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다.

보훈처 “자료 확보되면 유전자 검사로 후손 확인”

대만 쪽에서 결정적 증명이 나왔지만 김용애 가족이 이석영의 혈손임을 국가로부터 ‘공식 인정’받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해 보인다. 보훈처는 <한겨레21>의 공식 질의 답변서에서 “대만 대표부와 지속적인 협조로 이우숙님(3녀 추정)의 부모 및 가족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호적과 이우숙님 자녀 관계 및 연락처, 관련 당안 자료 등을 협조 중”이라고 밝혔다. 보훈처는 “독립유공자(이규준 선생)와의 가족관계를 추정(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확보되면 DNA 검사 등을 통해 동일 혈족 여부를 확인하고, 객관적 관련 자료 등을 근거로 후손으로 결정되면 재전수 및 등록 절차를 진행할 예정”이다. 보훈처는 8월19일 김용애 가족을 만나 증언을 듣는 등 추가 확인 작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바로잡습니다.
제1373호 ‘나는 이석영의 증손녀이다’ 기사에서, 이온숙·숙온·우숙 자매들과 이종찬의 촌수는 4촌이 아니라 6촌, 이종찬과 김용애·최광희는 5촌이 아니라 7촌입니다. 또 백범 김구가 김용애에게 친필 휘호를 준 것은 1949년이 아니라 1948년 설날입니다. 기자의 착오로 혼란을 끼친 점 사과드립니다.

*관련 기사 - "나는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이석영의 증손녀이다" http://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069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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