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은 2021년 6월18일부터 최근까지 한 달에 걸쳐 이석영의 증손녀 김용애(86), 최광희(82)와 김용애의 아들 김창희, 이회영의 손자인 이종찬(85) 우당이회영선생 교육문화재단 이사장(전 국가정보원장) 등을 인터뷰하고 관련 사진과 호적 자료 등을 열람했다. 이종찬은 석영·회영 집안의 추모·기념 사업을 도맡아온, 생존 후손 중 맨 웃어른이다.
짧게 잡아도 해방 전후인 1945년쯤, 더 위로는 거의 1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옛일에 대한 이들의 기억 일부는 헷갈리고 불분명한 부분도 있었지만, 대부분 매우 생생하고 구체적이며 일관됐다. 이종찬은 7월20일 김용애·최광희와 만나 옛 기억과 집안 어른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서로 맞춰보고 사진 자료를 검증한 뒤 이들이 이석영의 혈육이자 자신의 7촌 조카(재종질)라는 사실을 확인했다._편집자주
2021년 2월16일, 경기도 남양주시 ‘이석영 뉴미디어 도서관’에선 겨울의 막바지에 닥친 꽃샘추위를 뚫고 씩씩한 군대 행진곡풍 노래가 울려퍼졌다.
“칼춤 추고 말을 달려 몸을 연단코/ 새론 지식 높은 인격 정신을 길러/ 썩어지는 우리 민족 이끌어내어/ 새 나라 세울 이 뉘뇨/ (후렴) 우리 우리 배달나라에/ 우리 우리 청년들이라…”
신흥무관학교의 교가가 제창된 곳은 ‘독립운동가 이석영 선생 순국 87주기 추모식’ 현장이었다. 1934년 중국 상하이에서 79살에 쓸쓸하게 숨을 거둔 이석영의 추모식 겸 장례식은 우당이회영선생기념사업회와 이석영이 중국 망명 전까지 살았던 남양주시가 공동 주관했다. 그러나 순국 87년 만에야 뒤늦게 처음 거행된 기념행사에 정작 이석영의 직계 후손은 단 한 사람도 참석하지 못했다. 학계와 국가보훈처는 물론, 이회영 일가 쪽도 이석영의 후손 중 생존자가 없어 대가 끊긴 것으로 확신했기 때문이다. 정부가 이석영(1991년, 애국장)과 그의 장남 규준(2008년, 애족장)에게 서훈한 독립유공자 훈장도 이회영의 손자인 이종찬이 대리 수훈했다.
이날 이석영 추모식 소식을 전한 모든 언론은 “(이석영의) 직계 후손이 없어 그동안 장례를 치르지 못했다”고 보도했다. 상당수 매체는 “그의 가족들은 1927년 일제에 몰살당했다”고 썼다. 앞서 꼭 1년 전인 2020년 8월에 발간된 국내 최초이자 유일한 이석영 약전 <그 뜻 누가 알리오!>(노항래 지음, 은빛 펴냄)에서도 이석영의 두 아들 규준, 규서를 끝으로 후손에 대한 언급이나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수십 년 동안 공식 문헌이나 문서 기록이 전혀 확인되지 않았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석영 추모식에 유족 대표로 참석한 이종찬 이사장은 ‘이석영 약전’의 맨 앞 추천사에 “혈손이 남지 않은 이석영 할아버지에 대하여 나는 종손으로서 집안 식구들을 대리하여 (…) 할아버님의 일생을 현창해주신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썼다.
그로부터 약 석 달이 지난 2021년 5월, 김용애는 ‘절손된’ 이석영의 추모 행사가 직계 후손 없이 치러졌다는 언론 보도를 뒤늦게 알고 가슴이 무너져내렸다. 지금껏 알려진 것과 달리, 이규준은 생전에 이온숙, 이숙온, 이우숙 세 딸을 두었기 때문이다. 김씨는 이숙온의 딸이다. 나이 구순을 바라보는 그는 “그냥 조용히 묻고 넘어갈 일은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참 속상하기도 하고. 내가 지금 얼마나 더 살겠다고, 자식으로서 어머님 명예를 회복해드리는 게 제 도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어요. 이규준 외할아버지는 생전에 가족 돌볼 틈 없이 독립운동에 전념하셨기 때문에 식솔은 굶는 날이 더 많았다고 합니다. 고통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고 해요. 어머니(이숙온)는 아버지(이규준) 얼굴도 제대로 못 보고 자라셨잖아요. 제가 이제 언제라도 저승에 가서 어머니를 만나면, 할 도리를 하고 왔다고 말씀드려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제 아들하고 며느리한테도 하소연했어요, (이석영 집안의 친손 확인에) 나 좀 도와달라고.”
그 뒤 몇 달 동안 김용애는 부모의 제적(옛 호적)등본을 떼어보고, 아저씨가 되는 이종찬에게도 몇 차례 찾아갔지만 이렇다 할 소득이 없었다. 가족관계를 증명하는 공식 문서인 제적등본은 물론이고, 이석영과 6형제, 그 후손들의 생몰 기록을 집대성한 집안 족보 어디에도 이규준의 세 딸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마리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이종찬이 중국에서 살던 어린 시절부터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전까지 10여 년 동안 이석영의 손녀이자 이규준의 장녀인 이온숙을 잘 알고 지냈던 사실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다만 이온숙의 두 여동생 이숙온, 이우숙이 같은 핏줄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줄 문헌 기록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규준과 이온숙의 부녀 관계를 객관적으로 증언해줄 사람도 이종찬이 유일했지만, 이종찬은 또 다른 사촌인 이숙온과 이우숙은 지금껏 존재 자체도 알지 못했다고 밝혔다.
이규준의 세 딸이 이석영 집안의 족보와 국가의 가족관계 기록에서 빠진 것은 당시의 엄혹한 시대 상황과 이규준의 안타까운 가족사 때문으로 보인다.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삼엄한 감시와 무자비한 탄압을 피해 거처를 수시로 옮겼고, 수가 많았던 이석영의 집안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살기 다반사였다. 온숙의 딸 최광희는 “이규준 할아버지가 젊어 돌아가시자 할머니 한씨가 먹고살기 위해 재가했는데 세 딸은 남겨두고 혼자 떠났다고 한다”고 증언했다. “어머니(온숙)랑 두 이모는 사실상 고아나 다름없는 비참한 환경에서 성장했고, 온숙은 열여섯 살에 두 동생 먹여살릴 돈 벌어 오겠다며 집을 나갔다고 들었어요. 숙온 이모랑 우숙 이모 둘만 남겨져서 고생 많이 했죠.” 특히 세 자매는 10대 사춘기의 민감한 시기에 갑자기 감당하기 버거운 현실에 부닥치면서 어머니 한씨에 대한 서운함과 원망의 감정이 컸다는 게 김용애가 생전에 어머니(이숙온)와 큰이모(이온숙)한테 들은 증언이다. 이석영-이규준의 후손은 그렇게 세간에서 서서히 잊혀갔다.
그러나 공문서의 허술한 구멍을 메우고도 남을, 훨씬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다수의 사진 자료를 이온숙·이숙온 자매는 소중하게 보관했다가 딸들인 최광희와 김용애에게 물려줬다. 이규준의 장녀 이온숙의 결혼사진(1929년)에는 당시 임시정부에서 일하던 도산 안창호가 주례를 선 모습이 뚜렷하다. 이종찬에게서도 중요한 증언이 나왔다. <한겨레21> 취재 과정에서 김용애와 아들 부부를 만나 사진들을 본 이종찬은 안창호의 바로 옆에 아기를 안고 선 여인이 자신의 어머니(조계진)라는 사실을 거듭 확인해줬다. 김용애·최광희가 이석영의 직계 후손(증손녀)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가장 결정적인 물증은 이석영의 맏며느리이자 이규준의 부인인 한평우가 1978년 당시 김용애의 자택이던 서울 연희동 집에서 세 딸 이온숙·이숙온·이우숙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김용애는 큰이모 이온숙의 가족과도 꾸준히 연락과 왕래가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해방 전 대만으로 간 뒤 소식이 끊긴 막내이모 이우숙과는 1967년 <동아일보>의 대만발 기사를 통해 극적으로 다시 연락이 이어졌다. ‘조국의 혈연을 찾아달라’(1967년 10월14일치)는 제목의 기사는 <동아일보> 기자가 대만에 취재를 갔다가 마침 두 달 전 이우숙이 한교협회(교민협회)에 조국의 친척을 찾아달라고 호소한 사실을 알고 이우숙을 인터뷰한 뒤 이석영 일가의 기구한 사연을 자세히 전한 것이다. 이온숙·이숙온·이우숙 세 자매가 이석영의 친손녀라는 것을 알려주는 결정적 기록이다.
“한일합방 뒤 온 가족을 이끌고 중국으로 건너가 광복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이역만리에서 숨진 열사의 후예가 조국의 친척들을 애타게 찾고 있다. (…) 이우숙 여인이 그 주인공으로, 이(李) 여인은 부친 이규준씨 조부 이석영씨와 함께 합방 직후 온 가족을 이끌고 북간도로 넘어갔다는 것. 이우숙 여인은 만주 길림성에서 출생했고 모친은 한평우 여사며, 위로 이온숙, 이숙온이란 두 언니가 있었다. (…) 아뭏든 놀랍고 슬픈 일이다.”
이 기사를 본 이온숙과 이숙온의 딸 김용애는 대만의 이우숙과 편지 교환으로 안부를 확인한 데 이어, 1978년에는 마침내 이우숙을 서울 연희동에 있던 집으로 초대해 50년 만에 극적으로 해후했다. 김용애는 이때 세 자매의 어머니인 한평우까지 모녀가 함께 찍은 사진도 다수 보관하고 있다. 이어 1983년에는 김용애가 대만을 방문해 이우숙과 재회했다. 그러나 이우숙이 한국말을 다 잊어버렸고 김용애는 중국말을 몰라 통역을 통해 간단한 대화만 나눴고, 그 뒤에도 주변의 도움으로 한문 편지를 한 차례 주고받기는 했으나 소통의 어려움 탓에 다시 소식이 끊기고 말았다.
비어 있던 족보에 세 딸의 이름 적힐 듯김용애는 해방 뒤 서울에서 어머니(이숙온),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아버지(김현수)와 마땅한 주거지도 없이 어렵게 살던 중에 백범 김구가 안중근 의사의 친척에게 마련해준 적산가옥(일제가 패망하고 일본인 소유자들이 쫓겨나가면서 정부에 귀속된 주택)인 서울 중구 쌍림동 집에 한동안 함께 살았다고 했다.
“그때 제가 다니던 학교 이화여중이 경교장(백범 김구의 거처)과 아주 가까워서 김구 할아버지한테 시도 때도 없이 놀러 갔어요. 김구 할아버지는 2층 서재에서 늘 뭔가를 쓰고 계셨고, 제가 가면 ‘공부 열심히 하라’고 말씀하시곤 했지요. 한번은 새해 인사를 갔더니 세뱃돈 대신 친필 한문 휘호를 주셨어요.”
‘답설야중거 불수호란행 금일아행적 수작후인정’(눈 밟으며 들길을 갈 때 발걸음을 어지럽게 하지 말라, 오늘 내 발자취가 뒷사람의 길이 되리니). 백범이 좌우명으로 삼았던 서산대사 휴정의 선시(禪詩)였다. 본문 옆에는 ‘대한민국 삼십년 2월10일 세손(世孫) 김용애 기념’이란 문구 아래 백범의 낙관이 찍혔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30년이 되는 1948년 설날이었다. 백범의 친필 휘호는 김용애의 아들 김창희(전 싱가포르투자청 한국 대표)가 지금도 가보로 간직하고 있다. 같은 해 여름 어느날 백범은 이종찬의 어머니에게도 <백범일지>를 선물하면서 ‘조계진 세질(世姪) 기념’이라고 써주었다. 이석영, 회영 일가에 대한 백범의 각별한 애정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백범은 이듬해인 1949년 6월 경교장에서 일제 헌병 출신의 군인 안두희의 총에 암살당했다.
이석영의 장남 이규준은 1912년 신흥무관학교 군사학 과정을 수료한 뒤 일제 요인과 조선인 밀정을 처단하는 ‘다물단’의 핵심으로 활동하다가 스물아홉 청춘에 중국 베이징 인근 스자좡에서 순국했다. 그의 사인은 아직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는데, 이종찬이 부친에게 전해 들은 ‘규준 아저씨’의 사망 기억(일제의 함정에 빠짐)과 일제 검찰 조서의 기록(병사)이 서로 다르다. 이석영의 차남 규서는 불운하게도 일제 밀정의 덫에 걸려 숙부인 이회영을 밀고해 옥사하게 한 뒤 독립운동가들에게 ‘처단’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 뒤로 이석영 집안은 대가 끊겼다는 게 정부와 학계의 공식 기록이자, 이종찬이 지금껏 가져온 기억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종찬은 이온숙을 "(해방 이후 귀국해서도) 친누나처럼 왕래했다"고 뚜렷이 기억한다. 이종찬은 자신이 출생하기 전인 1920년대에 선친(이규학)과 어머니(조계진)가 상하이에 있던 집에서 이온숙을 친딸처럼 맡아 키웠다는 이야기를 부모로부터 전해 들었다. 1945년 해방 뒤 귀국해서도 이온숙은 사촌지간인 이종찬 일가를 자주 찾았다. 그러나 이종찬 집안에서는 이온숙뿐 아니라 이숙온과 이우숙까지 세 자매가 있다는 사실은 까마득히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7월20일, 이종찬은 김용애와 아들 김창희 부부를 만나 기억과 기록들을 맞춰보는 자리에서 이석영 후손의 생존을 사실상 인정하고 필요한 후속 작업에 나설 뜻을 내비쳤다. 그는 “이석영 할아버지가 워낙 위대하신데 이분의 공적에 비해서는 제대로 안 알려져 있다”며 “우선 족보부터 보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종찬의 질녀(조카딸) 김용애는 지금껏 족보에 비어 있던 이규준의 딸 세 명을 비롯해 생존 후손의 이름을 그 자리에서 일일이 한자로 적어줬다. 다음날 21일에는 이종찬이 직접 작성한 일종의 ‘회고 메모’를 앞으로 풀어야 할 의문점들과 함께 정리해 <한겨레21>에 보내왔다. 그는 이 메모에서 “이석영의 손녀들이 나타났다. 이석영 선생은 절손된 것이 아니라 손녀 셋을 두었다”며 “그분들이 갖고 온 사진 자료를 보고 어리둥절하지만 일단 후손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확인했다.
김용애는 “최근 몇 년간 (친족 확인을 위해) 애썼어도 보람이 없었는데, 뜻밖에 다시 희망을 찾았다. 여기까지 왔는데 하는 데까지 해봐야 하지 않겠느냐”며 독립유공자 후손 확인 신청 절차를 밟겠다고 말했다. “제가 살 만큼 잘 살았는데 무슨 벼슬 욕심, 돈 욕심이 있겠어요? 조상님들 흘리신 피가 헛되이 되지 않게 하고, 제가 저승에 가서 어머니 만나면 ‘엄마, 저 이런 일 하고 왔어’라고 말할 수 있길 바랄 뿐이에요.”
그러나 이들이 이석영의 혈육이라는 걸 국가로부터 공식 인정받기까지 넘어야 할 벽은 여전히 높아 보인다. 국가보훈처 공훈관리과의 ‘독립유공자 후손 찾기’ 주무 연구원은 7월20~21일 <한겨레21>과의 두 차례 통화에서 “독립유공자 후손 검증의 기본 절차는 제적(옛 호적)등본과 당사자 집안의 족보 등 가족관계를 증명할 수 있는 서류 대조이며, 사진 자료는 (검증 절차에서) 보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는 “이석영 일가는, 어쨌든 저희가 그 후손이 없다는 걸 확인했다”며 “이규준이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지 너무 오래됐기 때문에 집안 족보에 올려도 (시기가) 늦었다”고 했다. 이 연구원은 그러나 “민원인들이 후손 인정을 받고 싶다면 보훈처의 관할 지청에 심사 신청을 하면 공훈심사위원회가 심의를 거쳐 (인정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독립유공자와 유족·후손 단체인 광복회의 고문 변호사인 임종인 변호사는 “국가보훈처에 DNA 검사 등 인증 심사를 요청하고, 보훈처가 ‘불인정’ 결정을 할 경우 법원에 결정 취소 소송을 내어 법정에서 다퉈볼 수 있다”고 말했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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