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이런 일, 여성스포츠계에선 수백수천 건도 아닌 수억 건”

성폭력 생존자 김성희씨가 3년 만에 가해자 신고한 뒤 겪은 2차 가해
등록 2025-10-30 18:58 수정 2025-11-03 10:10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3년. 성폭력 피해 신고까지 걸린 시간이다. 가해자는 ㄱ고등학교 여자축구부 담당 부장(체육교사)이었다. 짓누르는 스트레스에도 피해자 김성희(33)씨는 주변의 권유로 피해 신고를 참고 참다가 코치 일을 그만둘 결심을 한 2022년에야 고소장을 작성할 수 있었다. 그때만 해도 이 고소가 또 다른 고통으로 들어가는 길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가해자 이아무개(62) 부장은 2025년 7월30일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됐다. 성희씨는 신고 뒤 성폭력 인정까지 6년이라는 시간 동안 “해소되는 건 없고 고통만 남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고통을 다른 여자축구 선수들이 계속해서 겪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성희씨가 이름을 걸고 가해 사실을 고발하는 이유다. 한겨레21은 성희씨가 겪었던 성폭력 사건 수사 기록과 재판 기록을 토대로 사건을 다시 찬찬히 들여다봤다. 9월12일과 15일 두 차례 성희씨를 만나 인터뷰도 했다.

대법원까지 유죄 나온 강제추행

2019년 5월26일 밤 충남 논산시. 축구대회가 끝난 직후였다. 이 부장의 호출에 성희씨는 감독과 함께 저녁 자리에 갔다. 1차에서 술을 마신 뒤 이 부장은 노래방에 가자고 했다. 저녁 자리도, 노래방도 성희씨는 원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따라간 건 이 부장이 성희씨나 감독에게 중요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축구부 담당 체육교사는 감독과 코치에게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축구부가 활동하는 모든 행정적인 일을 담당하고 인사권에도 관여한다. 구단으로 치면 프런트 같은 역할이다. 이 부장은 ㄱ고등학교에서 무보수 봉사활동 방식으로 코치 일을 시작한 성희씨를 본인이 정식 코치로 채용했다고 늘 이야기했다.

이 부장은 자주 성희씨 등을 불러 밥을 먹으며 술을 마셨다. 그런데 노래방까지 간 것은 지도자 생활을 하며 이때가 처음이었다. 이 자리에서 이 부장은 노래를 부르는 성희씨 옆에 다가와 팔로 옆구리를 감싸안았다. 성희씨는 “부장님 술 많이 취하셨다. 그만하시라”고 했다. 이 부장은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성희씨도 좁은 탁자와 이 부장 사이를 지나 자리로 돌아가려고 할 때, 이 부장은 뒤에서 갑자기 성희씨를 잡아당겨 허벅지 위에 앉혔다.

이 부장은 수사 단계부터 재판까지 추행한 사실도, 노래방에 간 사실도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항소와 상고를 거듭해 대법원까지 이어진 재판에서 유죄가 확정됐다. 그는 강제추행을 포함해 뇌물수수 등의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징역 8개월을 선고받고 법정구속 됐는데, 2심에선 뇌물수수 혐의에 대해 무죄가 선고되며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다만 강제추행 혐의에 대한 판단은 1심부터 대법원까지 모두 혐의가 인정돼 유죄 선고가 나왔다.

술자리 응하지 않으면 몽니 부려

사건 직후 모두가 신고를 말렸다. 감독은 성희씨에게 “내가 미안하다. 앞으로는 이런 데 혼자 올 테니 신고는 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축구계 선후배들에게도 이야기해봤지만 “좋은 게 좋은 거다. 실수라고 생각하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사건 직후 곧바로 신고하려 했던 성희씨도 생각을 바꿨다. “당시 막 (체육계) 미투가 터지기 시작한 즈음이었어요. 그런 사건들을 보면 제가 당한 건 성범죄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감독도 앞으로는 이런 곳에 오지 않으면 되니 팀을 위해 일단 (신고를) 하지 말라고 하니 말았던 거죠.”

이후 성희씨는 이 부장과의 접촉을 최대한 피하면서 지냈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이 부장은 감독과 코치가 술자리에 응하지 않으면 축구부 행정 업무를 제대로 처리해주지 않았다. 감독은 약속대로 이 부장의 호출을 중간에서 많이 쳐냈지만, 어쩔 수 없이 성희씨가 가야 하는 경우도 생겼다.

특히 이 부장이 성희씨와 여자축구부원들이 생활하는 기숙사에 방을 얻어 지내면서 마주치는 상황은 더 늘었다. 이 부장은 모든 훈련이 끝난 늦은 밤 기숙사 자기 방에서 술을 자주 마셨다. 성희씨도 같은 기숙사에 있었기 때문에 이 부장 방에서 열리는 술자리를 매번 거절하기는 어려웠다.

이 부장은 술을 마시면서 “탄력을 보자”며 성희씨 허벅지를 만지기도 하고 “근육량을 확인하자”며 팔을 만지기도 했다. 또 성희씨의 신체 부위를 거론하며 성희롱했다. 성희씨는 “그런 얘기는 애들(학생들)한테 하지 마세요. 바로 ‘철컹철컹’이에요”라고 말하는 등 에둘러 경고했다. 그러나 이 부장은 늘 “딸 같은 사이인데 무슨 말이냐”라며 농담으로 넘기려 했다.

어떻게든 버텨보려 노력했지만 노래방 사건을 목격하고 중간에서 방어해줬던 감독마저 팀을 나가자 더는 참기 어려웠다. 성희씨는 2022년 4월 신고 직후 경찰에 신고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같은 기숙사에 거주하다보니 얼굴 마주치는 일도 많았고요. 같이 저녁 먹고 술자리 요구하는 게 너무 스트레스받았어요. 감독이 다른 곳으로 간 뒤엔 (직접) 식사 자리를 거절하는 것도 너무 스트레스받아요.”(경찰 진술 조서 중)

3년 만에 신고했지만 2차 가해 만연

신고 이후엔 또 다른 고통이 기다렸다. 성희씨는 신고 직후 학교에 이 부장과 분리 조치를 요구했다. 이 부장은 곧바로 직무에서 배제됐지만, 학교는 (축구부 행정 업무를 담당한) 이 부장에 대한 분리 조치를 해야 하니 성희씨에게 직접 행정 업무를 하라고 했다. 가해자와 분리 조치는 됐지만, 사실상 성폭력 신고를 한 사람으로 낙인찍힌 셈이다.

신고 이후 나간 대회에선 “쟤가 없는 사실을 지어 소속팀 부장님 신고한 사람”이라거나 “왜 저렇게 일을 만드냐”는 말이 들려왔다. 거짓 소문이 퍼진 것이다. 병가를 쓰면서 몇 개월을 버텼지만 결국 학교를 그만둬야 했다. 이후 다른 팀에 들어갔지만 “쟤가 성추행 신고한 별난 ×이야”라는 말을 또 들어야 했다. 그 팀에서도 결국 오래 있지 못했다. 성희씨는 2023년을 끝으로 지도자 생활을 그만두고 여자축구를 전문으로 하는 에이전시를 운영하고 있다.

모든 사실을 부인하는 이 부장, 2차 가해를 하는 사람들과 싸우는 일은 지난하고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로 힘들 줄은 몰랐어요. 너무 억울한데 사람들은 잘 모르니까 매일 무너질 것 같더라고요. 내가 죽으면 증명될 수 있지 않을까, 기득권자들을 진실로만 이길 수 없을 것 같은데… 그러다가도 ‘아니야, 누구 좋으라고’ 이러면서 하루에도 여러 차례 왔다 갔다 했어요.”

결국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됐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다. 형사사건과 별개로 진행 중인 민사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이 부장과 다투고 있기 때문이다. 민사소송도 1심에서 이겼지만, 이 부장 쪽에서 항소해 2심이 진행 중이다.

“제가 겪은 일은 여자축구 안에선 정말 수많은 사건 중 미미한 사건 중 하나예요. 이런 일들은 여성스포츠계 안에서 수백·수천 건이 아니라 수억 건은 될 거예요. 그런데 대부분 (밖으로) 표현을 못해요. 비인기 스포츠 종목은 좁다보니까 서로 누가 누군지 모를 수 없기 때문에 (피해자가) 잘 나설 수도 없거든요. 이런 사례(가해자가 처벌받음)가 회자돼서 뭔가 바뀔 수 있다면, 제 안의 고통도 조금은 해소될 것 같아요.”

 

류석우 기자 raintin@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