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겨울, 문구를 보고 떠올리는 건 어쩔 수 없이 디스토피아에 대한 예감이다. 기후위기와 감염병, 파편화한 노동, 훼손된 존엄, 이기적인 욕망, 심화되는 불평등. 문구에는 음험한 기운이 서려 있다. 어둡고 두렵다.
어제와는 다른 세계.
문구를 보고 유토피아를 떠올린 어느 겨울도 있었다. 세상에 알 수 없는 위험이 도사린대도 한데 모인 우리의 함성, 열망, 촛불 같은 것이면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제와 다른 세계의 위험을 줄이고 가능성은 극대화하며, 달라진 지평을 아름답게 유영하는 어제와 다른 나라를 만들 것이다. 유토피아의 어원처럼, 유토피아는 세상에 없는 땅일지도 몰랐다. 함께 모여 바꿀 것을 정하고, 바꾸고, 나아가는 기분 좋은 순간이 이어지는 땅이라면 굳이 완성된 유토피아가 아니라도 상관없다. 나아가는 매 순간이 유토피아다. 어제와 다른 세계, 문구에는 유쾌함이 서려 있다. 뜨겁고 감동적이다.
2022년, 어제와 다른 세계의 징후 몇 개는 짙어질 것이고 몇 개는 마침내 현실이 될 것이다. 한국에서는 제20대 대통령 선거가 열린다. 새해를 열며 디스토피아의 예감을 애써 떨친다. 변화의 가능성을 믿고 고군분투하는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과 머리를 맞대고 유토피아를 그렸다. 어제와 다른 나라를 이끌 청년단체 활동가들과 대선 공약을 평가하고 제안했다.
책상맡에 붙여둘 이상과 결심을 적은 셈이다. 그 어떤 어둠과 두려움 앞에서라도 새해라면, 새해이니까 그래야 한다. _편집자주
이 이야기는 2021년 각 분야에서 눈에 띄는 활동을 한 시민단체 활동가들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지어졌다. ‘기후위기’ 대응에서 석탄발전의 문제점을 인근 지역 주민과 함께 알린 ‘석탄을넘어서’(박지혜 변호사·배여진 활동가), 코로나19 속에 공공병원과 공공의료를 통한 ‘보편적 건강권’을 요구한 ‘보건의료단체연합’(전진한 정책국장), ‘노동권’ 보호에서 예외 취급을 받는 5명 미만 사업장의 노동자와 ‘무늬만 사장’인 노동자(특수고용직 등)를 위한 노동조합을 꾸린 ‘권리찾기유니온’(하은성·김도하 노무사), 가난한 시민의 ‘사회안전망과 복지’를 고민한 ‘빈곤사회연대’(정성철 사무국장),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의 부동산 투기를 폭로하며 자산 ‘불평등’과 이익 배분 문제를 제기한 ‘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박효주·김주호 활동가)를 2021년 12월 차례로 만났다.
활동은 2021년 작은 성과를 이루었다. 의미 있었으나 성공이라 이를 수는 없다. 활동가들은 아쉬운 점을 주로 말했다. 아쉬움이 메워졌을 때의 세상을 ‘그 나라’ 이야기로 재구성해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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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국인 ‘그 나라’의 면적은 약 10만㎢,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네 계절이 뚜렷하다. 특히 그 나라의 겨울에는 견딜 만한 추위와 견디기 어려운 추위가 정신없이 갈마든다. 견디기 어려운 추위에도 사람들은 곧잘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선다. 하얀 입김, 촛불 한 줌의 온기, 같은 곳을 바라보는 눈빛, 함성, 농담, 웃음, 분노, 눈물 같은 것은, 이 모든 것이 어디로 향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던 한때 슬프고, 또한 따뜻했다. 그 나라 시민은 5년 전 추운 거리에서 임기가 남은 대통령을 끌어내리고 새 대통령을 당선시켰다.
그 나라는 당신이 익히 아는 ‘이 나라’는 아니다. 그날 이후 그 나라에서는 어제와 다른 세계 앞에 어제와 같은 꿈을 지키고 이루기 위한 작업이 이어졌다. 발견하고 손질했다. 거듭났다. 이를테면 유토피아, 혹은 어느 순간 이 나라와 갈린 평행우주 속 어느 나라. 그 나라가 이 나라의 미래일 가능성은 아직 있다.
‘그 나라’는 당면한 외부의 위험을 명확히 알고 있다. 기후위기와 감염병. 외적의 침입 방어와 치안을 목적으로 삼은 최소한의 국가, ‘야경국가’는 수백 년이 흐른 뒤 다시 규정돼야 했다. 기후위기를 막고 감염병에 대응해야 최소한의 국가였다. 더는 야경국가와 자유주의, 복지국가와 사민주의를 분리한 채 다툴 법한 상황이 아니다. 최소한의 안전(즉 생명)을 지키기 위해 공동체 전체가 머리를 맞대야 했다.
그리하여 그 나라는 2030년 석탄발전을 퇴출하기로 했다. 전세계가 약속한 기후 1.5도 상승을 막기 위해서 2029년까지 석탄발전이 멎어야 한다는 분석(클라이밋 애널리틱스)을 따랐다. 에너지 구조 전환은 산업과 삶 전반에 영향 미친다. 단호한 정부 덕에 가능했던 일이다. 실은 민간기업과 시민의 깨달음이 먼저 있었다. 시민은 더는 석탄기업에 투자하는 금융기관과 탄소를 배출하는 기업을 신뢰하지 않았다. 석탄발전소를 짓기 위한 자금을 조달하기 어려워졌다. 제조기업은 탄소를 배출하며 만든 전기 사용을 중단했다. 큰 부담을 지고 발전소를 세워봐야 수요가 없다. 발전 비용은 늘었다. 그 비용을 한동안은 전기세로 메웠다. 왜 비싼 돈을 내며 세상을 더 위험하게 하는 전기를 써야 하는지 시민은 한층, 이해할 수 없었다. 석탄발전을 둘러싼 부조리한 순환은 시민 모두의 결단으로 깨졌다. 신재생에너지로 전환했다. 전환 기금을 마련했다. 발전소 폐쇄로 손해 입는 주민과 노동자는 기금의 사용 방법을 함께 모여 논의했다. “절차적 정의에 대한 믿음”(박지혜 변호사) 덕분에 갈등은 걱정만큼 크지 않다.
나름 애쓴다 해도 이미 상당히 진행된 기후변화 속에 감염병, 폭염, 홍수 등은 그 나라 역시 여느 나라처럼 여전했다. 물리적 피해는 취약한 이들에게 집중됐다. 가난에 더해 기후위기 앞에 다치고 쓰러진 이들을 살려야 했다. 그 나라는 공공병원을 70개 중진료권별로 최소 1개 또는 2개를 지었다. 의사와 간호사는 충분히 늘었다. 이미 민간병원 중심으로 병상이 많기는 했는데 당장 수익을 넘어 긴급한 위기에 대응하고, 취약계층을 돌보는 공공병원이 필요했다. 환자가 병상을 구하지 못하고, 기존 취약계층 환자를 몰아내는 코로나19 때의 참상에서 구한 깨달음이다.
위험한 세계 앞에 그 나라가 적응하는 사이, 수도권과 지역 사이 위화감이 줄어든 건 의외의 효과다. ‘외지다’고 여겨진 석탄발전소 지역에서 만든 전기를 역시 힘없는 지역에 세운 거대한 송전탑을 따라 수도권으로 나르곤 했다. 또한 모든 의료자원이 수도권의 대형 민간병원으로 향할 때 나머지 지역은 응급의료기관과 분만시설조차 제대로 갖지 못했다. ‘잘 보이지 않는 곳을 희생해 편리를 구하고, 잘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최소한의 권리마저 지키지 못했다니’, 정의롭고 반성하길 좋아하는 그 나라 시민들은 자책했다. 자책은 구조적인 지역 소외 전반을 향해 번졌다. 하나하나 잘못을 지워나갔다. 아무리 도로를 넓히고 시설을 지어대도 좀체 활기 없던 지역에 다시 사람이 모였다.
* 이 나라, 한국에서 석탄화력발전 비중은 총발전량의 40%를 넘나든다. 14개 지역에서 총 58기 석탄화력발전기가 운전 중이다. 강원도 삼척, 강릉 등에 석탄발전소 5기를 새로 짓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제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에서 2050년까지 석탄발전을 전면 폐기할 것을 선언했다. 선진국에 대한 국제에너지기구(IEA)의 권고(2030년) 등에 견줘 한참 느리다.
한국의 공공병상은 전체 병상의 10.3% 수준이다. 10.3%밖에 되지 않는 공공병상이 코로나19 환자의 80%를 책임지고 있다. 2021년 9월 정부는 보건의료노조와 노·정 합의를 통해 공공의료 확충과 병상당 간호인력 기준을 마련했다. 하지만 2022년도 예산안에는 필요한 비용이 반영되지 않았다. 국회 논의 과정에서 일부 증액됐을 뿐이다.
‘그 나라’는 노동하는 모든 이에게 노동권을 보장한다. 당연한 말이다. (현대 국가 헌법의 전형이 된) 1919년 바이마르공화국 헌법을 비롯해 대개 공화국에서 노동자의 권리 보장은 분명 ‘일하는 모두를 위한’ 보편적인 약속이었다. 물론 그 나라의 헌법(제32조)도 민주화 이후 줄곧 근로의 권리, 근로의 존엄성을 누릴 이들을 ‘모든 근로자’로 적었다. 다만 5명 미만 영세사업장 노동자, 복잡한 계약으로 얽힌 비전형 노동자가 늘었다. 이들의 노동권은 실제 법률에선 예외 취급받았다. 누군가에게 노무를 제공함에도 사업자 아닌 노동자임을 증명하는 데서부터 고군분투하는 상황이 잦았다.
그 나라는 근로기준법 제2조를 개정해 계약의 성격과 관계없이 누군가한테 노무를 제공하면 모두 노동자로 인정했다. 같은 법 제11조를 개정해 5명 미만 사업장에 속해 있어도 다른 노동자와 동등하게 보호했다.
누군가 ‘영세자영업자와 거기 속한 노동자의 대립이 시작될 것’이라고 염려했다. 그렇지 않았다. 헌법의 약속대로 모든 노동자를 법과 사회안전망으로 들이고, 법을 지키는 데 드는 비용은 국가가 부담했다. 그게 마땅하다고, 그 나라는 생각했다. “사업자와 노동자의 갈등, 법의 보호를 받는 노동자와 그렇지 못한 노동자 사이의 갈등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을 생각하면 그 편이 이익”(하은성 권리찾기유니온 정책실장)이었다. 영세자영업 사업장은 일할 맛 나는 공간이 됐다. 자영업자도 내 사업장에 자부심을 가졌다. 알고 보니 일하는 이들의 처지를 가장 염려한 이들이 노동자와 매일 얼굴을 맞대는 자영업자였다.
위험한 세계 앞에(①) 불안한 노동자를 지키기 위한 국가의 지원은, 곧 자영업자를 지키기 위한 지원이기도 했다. 직원 수가 적은 영세사업장이야말로 그 어느 곳보다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이 귀했다. 이제는 어떤 상황에서도 쉽게 사람을 떠나보내지 않는다. 노동자는 안정적인 일터에 애착을 느꼈다. 그 일터를 곧 벗어나야 할, 잠깐 머물고 떠날 곳으로 여기지 않았다. 노동자는 숙련을 더했다. 영세사업장은 애초의 계획대로 규모를 키우며 번창했다. 경제는 아래서부터 탄탄해졌다.
한쪽 노동자의 권리가 모든 노동자의 권리가 된 건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한정된 파이를 사이에 둔 노동자 사이의 미묘한 갈등은 사라졌다. 모든 노동자가, 자영업자도 함께 큰 기업과 정부에 요구할 뿐이다. 같이 서서 요구하다가 어느 노동자는 “아, 우리의 권리는 언제나 모두 함께 이렇게 구한 거였다”고 새삼 당연한 말을 했다고 한다.
* 이 나라, 한국에서 근로기준법은 5명 미만 사업장에 일부 조항만 적용한다. 사유 없는 해고(계약 해지)가 가능하고 연차, 추가근로수당 등이 없다. 5명 미만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최소 350만 명으로 추정한다. 중대재해처벌법,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공휴일법 등 새로운 법들도 근로기준법을 따라 5명 미만 사업장을 차별한다. 노동자 보호법들이 차별 조항을 남겨둔 채 확대되면서, 법을 피해가기 위한 ‘가짜 5명 미만 사업장’도 늘고 있다. 실제로 노동자이지만 개인사업자처럼 위장하기 위해 노동자가 사업소득세(3.3%)를 내는 ‘가짜 3.3 사업장’도 상당수일 것으로 본다. 국회는 ‘5명 미만 사업장 차별 철폐’에 공감대를 형성하는 듯했으나 2021년 12월30일 현재까지 논의를 시작하지 않았다.
(전후 복지국가의 바탕을 만든) 1942년 영국 베버리지 보고서 이래 20세기의 빈곤은 물론 늘 국가적 문제였다. 다만 빈곤은 또한 개인의 개별적인 존엄에 얽힌 문제라는 걸 ‘그 나라’는 알게 됐다. 정상 가족, 정상 상태의 모습을 국가가 정하고 딱, 거기까지만 지원하는 복지는 ‘정상’을 규정할 수 없는 시대가 되자 폭력이었다. 복지 사각지대에서 어느 시민이 목숨을 끊고, 복지시설에서 폭력이 벌어지는 경악스러운 사건 몇 개를 겪고서야 그 점을 깨달은 게, 다만 뼈아팠다. 복지는 시민이라면 누구든 제 모습 그대로 존엄할 수 있도록 공동체 전체가 책임지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그 나라는 기초생활보장제도의 부양의무자제도를 주거급여, 생계급여에 이어 의료급여에 이르기까지 완벽히 폐지했다. 복지에는 개인과 국가의 관계만 있을 뿐이다. 한 사람의 삶을 보장하는 데 구태여 가족의 부재를 증명하거나 존재를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다. 위험한 세계(①)와 불안정한 노동(②) 앞에, 삶의 어느 순간 국가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은 지원 여부 앞에 마음 졸이기보다 내 존엄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을 먼저 생각했다. 복지 수혜자가 되는 모든 과정은 단순했다. 시민 누구든 이해할 수 있다. 국가가 보장해야 할 최소한의 삶(빈곤선)을 정하는 기준중위소득은 경제성장에 맞춰 합리적으로 올랐다. 이는 그 나라의 가장 부유한 이들과 가장 가난한 이들의 간격을 유지하는 것 역시 국가의 책임이라는 의미였다.
가난한 그들만의 일이 아닌 건 분명했다. 생애주기의 어느 순간, 사랑하는 이들 가운데 누군가 어찌할 수 없는 위험에 처할 수 있다. 여전히 예기치 못한 폐업, 실업, 사고, 재난, 질병 같은 위험은 그 나라에도 도사렸다. 그래도 최소한의 안전망이 있으므로, “삶의 위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어차피 소수만 남는 과도한 경쟁에 모두가 내몰리지 않는다.”(정성철 빈곤사회연대 사무국장) 위험을 맞은 친구에게, “괜찮아, 다시 하면 돼” 위로하며 미안함을 느끼지 않는다. 정말 그럴 테니까.
* 문재인 정부는 주거급여(2018년), 생계급여(2021년)에서 부양의무제를 폐지(소득·자산 기준은 있음)했다. 이전에는 일정한 소득과 재산이 있는 1촌 직계혈족이 살아 있으면, 연락이 끊겼어도 부양의무자에 해당해 생계급여를 받을 수 없었다. 의료급여 부양의무제는 유지됐다. 장애인 복지 수요의 다양성을 특정 등급 안에 묶어 획일화하는 장애등급제는 2019년부터 단계적으로 폐지됐지만, 개인의 필요에 맞춘 복지시스템은 갖춰지지 않았다. 탈시설과 커뮤니티케어(노인·장애인 등이 시설 밖으로 나와 지역사회에 살면서 통합돌봄을 받는 체계)는 아직 일부 지역에서 실험적인 수준(선도사업)에 머문다. 기준중위소득을 결정하는 데 참조하는 통계 자료가 좀더 실제 소득에 가까운 가계금융복지조사로 점진적으로 대체되고 있다. 다만 문재인 정부 들어 2021년까지 기준중위소득은 평균 2.06%로 낮은 인상률을 보였다. 2022년 5.02% 인상했지만, 경상성장률은 물론 실제 중위소득 증가율과도 여전히 격차는 크다.
자산 소유와 축적, 증여에 대한 욕망과 그것이 낳는 불평등은 ‘그 나라’에서도 깊고 오랜 고민거리다. 1516년 나온 소설 <유토피아>의 아이들은 많은 토지를 소유한 집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달콤한 망상에 도취한 모습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배웠다. 주민들은 해변에 널린 다이아몬드와 진주를 시시하고 하찮은 장난감처럼 여겼다. 500년을 이어온 꿈이라는 건 그만큼 닿기 어렵다는 의미일 터다.
그 나라 사람들도 꼭 유토피아 사람들 같을 수는 없었다. 개인의 욕망이 자원의 효율적 배분에 어느 정도 기여하는 면도 인정했다. 다만 상상 이상으로 폭등하는 부동산 가격, 세대 사이 증여되며 더 커지는 불평등(그 나라는 불평등의 첫 세대가 노년에 접어들며 막 자녀에게 증여를 시작한 참이다), 그로 인한 분노가 사회 전체의 효율을 외려 갉아먹기 시작하자, 깨달았다. 사적인 욕망으로부터 지켜내야 할 최소한의 자산이 있다는 것, 소유했다는 사실만으로 주어지는 어떤 이익은 공정하게 재분배돼야 한다는 것. 그 나라는 일단 그것이 부동산 개발과 개발에 따른 이익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위험한 세계(①)에서 불안정한 노동(②)을 하며 밀려났을 때의 존엄(③)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최소한 살 곳만큼은 있어야 했다. 그럴 수 없는 시민이 늘어갔다. 소유에 대한 욕망이 ‘모두의 주거권’을 침해했다.
그리하여 새로 지어지는 그 나라의 주택은 대개 소유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 사는(living) 것만을 목적으로 짓는다. 집을 둘러싼 분위기가 반전했다. 물론 택지 개발은 그 나라에서도 막대한 이익을 남겼다. 소유자는 공공이고, 그래서 이익이라 해봐야 어차피 우리 모두의 것이므로 크게 관심 가지는 이는 없다. 주택을 이미 소유한 이들이 얻는 과도한 이익 역시 세금으로 공공에 환수됐다. 집은 가치의 저장 수단으로 매력을 잃었다. ‘산다’는 사용가치만 남자 수급 문제도 풀리기 시작했다. 실수요를 초과하는 무분별한 공급은 줄었다. 완벽히 유토피아 같진 않았지만, 비슷한 사회를 향하는 것도 같았다. 이를테면, “유토피아 사람들이 거주하는 모든 집은 이미 국가가 철저한 계획 아래 지어 공급했기 때문에, 새 부지에 새집을 짓는 일은 극히 드뭅니다.”(토머스 모어, <유토피아>)
“유주택자와 무주택자, 제도 변화에 영향받는 유주택자와 그렇지 않은 유주택자, 집을 소유할 수 있을 것 같은 무주택자와 가능성이 전혀 없는 무주택자 등으로 복잡하게 나뉘어 갈등했던”(김주호 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 팀장) 시절은 우스운 과거다. 집을 둘러싼 정체성으로 나와 너를 구분했던 일은 자조 섞인 농담을 좋아하는 그 나라 사람들이 자주 꺼내는 말장난 소재다.
* 2021년 LH 등 공직자의 3기 신도시 부동산 투기 사태로 공공기관 내부정보를 이용한 재산 취득 등을 금지하는 공직자 이해충돌방지법, 농지법 개정 등이 이뤄졌다. 더 근본적인 부동산 개발 이익 문제나 공공주택 확대 문제는 해소되지 않았다. 공공주택지구에서 공급하는 주택의 최소 80%를 공공주택(임대 50%)으로 짓도록 하는 법(공공주택특별법 개정안)은 발의됐으나 논의되지 않았다. 2021년에도 전국 집값은 10% 이상 올랐다. 거대 양당 대선 후보는 종합부동산세, 양도소득세, 취득세 등 부동산 소유자에게 부과하는 세금을 줄이고 유예하는 공약을 내놨다.
‘그 나라’처럼 ‘이 나라’에도 다시 견딜 만한 추위와 혹독한 추위가 갈마드는 계절이 왔다. 곧 새 대통령을 뽑는다. 감염병 탓에 5년 전 그 나라(혹은 이 나라)처럼 한데 모여 훈기를 나눌 수는 없다. 그래도 이 나라 활동가들은 여전히 거리에서 외치고, 기자회견을 열고, 현실을 고려해 요구를 정교하게 다듬고, 법안을 발의한다. 그러다 문득 이 모든 일이 어디로 향하는 걸까 막막할 때면, ‘그 나라’를 생각한다. 그 나라의 가장 훌륭한 미덕이라면 모든 제도가 시민 사이를 가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역, 일터, 처지, 소득을 넘어 연대하도록 북돋는다는 점이다. 그들의 미래가 내 미래이고, 그들이 곧 내 주변 사람들임을 잘 아는 정의로운 시민으로 가득한 ‘이 나라’에서도 이룰 수 있는 일 같다. 어제와 다른 지평 앞에 어제와 다른 이 나라가 될 것 같다. 5년 전처럼 서로가 아직 곁에 있으리라는 생각에 슬픔도, 추위도 잠시 가신다.
방준호 기자 whor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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