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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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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은 항상 옳은가

여론대로 한다고 전제하면 국회·대통령 없이 행정부만 필요할 텐데 여론은 불완전
등록 2021-06-29 07:48 수정 2021-07-13 05:27
인천국제공항 전경. 여론대로 했다면 영종도 입지는 어려웠을 것이다. 당시 막대한 재정이 투입되는데다 안개가 잦고 지반이 단단하지 않은 바닷가 매립지에 공항을 세운다는 점에서 반대가 상당했다. 인천국제공항공사 제공

인천국제공항 전경. 여론대로 했다면 영종도 입지는 어려웠을 것이다. 당시 막대한 재정이 투입되는데다 안개가 잦고 지반이 단단하지 않은 바닷가 매립지에 공항을 세운다는 점에서 반대가 상당했다. 인천국제공항공사 제공

여론정치 시대를 살고 있다. 매일 쏟아지는 여론조사 결과에 사회적 사안의 의미와 평가, 추진 여부, 방향 등이 결정된다. 민심이라고 불리는 여론은 정부를 공격하는 창이 되기도 하고, 방어하는 방패가 되기도 한다. 여론이 하라고 하면 해도 괜찮고, 여론이 하지 말라고 하면 하지 못하는 분위기다. 헌법이 보장한 대통령의 인사권도 여론에 영향받는다. ‘여론이 곧 왕’이다.

“반대 여론이 심해서 강행은 위험하다”

자칫 여론에 맞서다가 힘겹게 얻은 권력을 다음 선거에서 내려놓아야 하는 일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민심에 부합하지 않는 일이 축적되면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선거에서 여지없이 매서운 회초리를 맞는다. 주권자에게서 권한을 위임받더라도 제한 없는 사용은 불가능하고, 매 순간 여론이라는 제약함수 아래 놓인다.

10여 년 전, 정국 여론 분석을 부탁받아 발표한 적이 있다. 당시 정부가 추진하던 일이 관련 여론조사 결과에서 반대가 높았다. 그래서 지금 반대가 상당하고 민심과 배치되기에 강행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발언했다. 이를 듣고 한 참석자가 확인된 여론대로만 하는 게 옳은지 되물었다.

‘여론이 항상 옳은가’라는 질문을 받은 것이다. 여론을 조사하고 분석하는 입장에서 이는 매우 본질적인 이슈다. 이른바 여론정치로 진행되는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정을 운영하는 사람들과 또 새롭게 권력을 획득하려는 이들에게도 정책 준비와 역량 못지않게 중요한 사항이다. 이에 대한 분명한 견해 없이 정치를 시작하는 건 국정의 불안함과 미숙함을 예고한다.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니 위정자는 항상 국민의 뜻인 여론을 존중해야 한다. 이를 무시했다가는 오만과 독선이라는 비판을 넘어 독재와 권위주의라는 비난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성난 대중에 쫓겨날 수도 있다.

그런데 여론이 옳다고만 전제하면, 여론이 시키는 대로만 해야 한다면 대통령도 국회도 필요 없게 된다. 어떤 사안을 결정할 때 여론조사만 해보면 되기 때문이다. 찬성이 많으면 추진하고 반대가 많으면 민심에 따라 하지 않으면 된다. 집행 기능이 있는 행정부만 있으면 된다. 정부 산하에 여론조사 기능을 갖춘 기관만 하나 만들면 그만이다. 국민은 정부를 욕할 이유도 없고, 당연히 민심과 맞서는 상황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여론은 불완전하다. 그리스 아테네를 기반으로 활동한 철학자들이 일찍이 경고했듯이, 여론은 변덕스러운 면이 있다. 이를 전적으로 따르는 건 위험하다. 결과에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시점·방법 따라 달라지는 결과

책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남긴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대참패로 끝난 아테네의 시칠리아 원정과 관련해 아테네 시민들의 ‘여론’이 무모한 전쟁에 적극 나서게 했다고 기록한다. 파병 열기가 아테네를 휩쓸고 원정 반대자들은 비애국자로 낙인찍힐까 두려워 입을 닫았다고 적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영역한 토머스 홉스는 여론을 옹호하면서도 여론에 따른 정치적 결정에 우려를 표했다.

여론을 얻어내는 현대 여론조사 방법에 허점도 많다. 어느 시점에, 어떻게 묻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여론조사는 합리모형에 기반하는데, 이는 완전한 정보환경 아래 인간이 합리성을 갖고 최적의 대안을 선택한다고 전제한다. 하지만 여론조사 응답자는 모든 걸 알지 못하고 합리성도 제한적이다.

이런 면을 두루 고려하면 ‘여론이 항상 옳다’는 명제는 채택되기 어렵다. 여론의 불완전성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지도자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지도자나 지도자가 되려는 자는 여론에 편승하려고만 하면 안 된다. 미래를 위해 소신을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여론과 다르더라도 용기 내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여론이 옳다면, 그래서 여론대로 해야 한다면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고속도로 건설도, 대한민국의 관문 구실을 하는 인천공항의 영종도 입지도 어려웠을 것이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나라가 가난할 때 막대한 재정을 투입한다는 점에서, 인천국제공항은 안개가 잦고 지반이 단단하지 않은 바닷가 매립지에 공항을 세운다는 점에서 반대가 상당했다.

여론이 옳다는 의미에서 자주 인용되는 ‘민심은 천심’이라는 표현이 있다. 이것의 뜻도 다르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민심은 천심이란 말은 민심이 항상 옳다는 게 아니라 민심을 다룰 때 하늘의 마음처럼 귀하고 조심스러워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비록 여론이 반대하더라도 미래를 위해 필요하다면 하늘을 대하듯 낮은 자세로 대중에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고 설득해야 한다.

세종의 ‘토지세금제도 개정’ 여론조사

세종대왕에게서 이런 예를 찾을 수 있다. 세종은 백성을 위해 토지세금제도를 개정하려 했다. 관리들의 농간이 심해 이를 없애기 위해 ‘공법’(貢法)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문무백관에서 촌민까지 무려 17만2648명에게 대규모 여론조사를 했다. 5개월이 걸렸다. 조사를 맡은 호조(戶曹)는 1430년 8월에 찬성 9만8657명, 반대 7만4149명이라고 보고했다. 새 제도에 찬성이 더 많았다. 하지만 반대도 적지 않았기에 세종은 새 제도를 강행하지 않고 집현전 학사들의 추가 연구를 거쳐 14년이 지난 뒤에야 확정했다. 세종이 이룬 업적도 대단하지만 그 과정은 더 훌륭했다. 후대에 여론을 다루는 모범을 보여줬다.

청취하고 설명하고 기다리고 설득해야 한다. 영화 <역린>에는 정조의 서간을 관리하는 내관 상책이 <중용> 23장을 읊는 장면이 나온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나오고, 겉에 배어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민심은 천심이다’에 이어지는 문구가 있다면 아마 ‘지성이면 감천이다’일 것이다. 대선이 다가오고 있다. 여론과 민심을 바라보는 시각이 정립되고, 순간의 여론에 눈치만 보는 인물이 아니라 소신과 통찰, 비전을 갖고 대중을 설득할 수 있는 지도자를 만나길 기대한다.

윤희웅 오피니언라이브 여론분석센터장
*‘윤희웅의 여론 읽기’는 여론조사의 허와 실을 파헤쳐 정확하게 여론 읽는 법을 전하는 칼럼입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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