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유권자 깔보는 ‘여론조사 공표 금지’

선거 전 6일간 여론조사 공표·보도 금지는 시대착오적 법조항국민의 알 권리 제약하는 반민주적 규정, 폐지하거나 기간 줄여야
등록 2022-03-02 16:11 수정 2022-03-03 00:56
제20대 대통령선거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 2022년 2월15일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 각 당 대선 후보들의 펼침막이 걸려 있다. 연합뉴스

제20대 대통령선거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 2022년 2월15일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 각 당 대선 후보들의 펼침막이 걸려 있다. 연합뉴스

“여론조사 결과의 보도 금지는 국민에 대한 모독이다.” 1998년 캐나다 대법원의 판결문 일부다. 당시 캐나다는 선거 전 3일(72시간) 내 여론조사 결과 발표를 연방법에서 금지했는데 이를 폐지하라고 판결한 것이다. 그로부터 24년이 지난 2022년 한국에선 ‘선거 전 6일의 여론조사 공표 금지’ 규정을 여전히 적용하고 있다.

유권자 판단 흐려 vs 유권자가 판단할 일

우리나라의 선거여론조사 공표 및 보도 금지 역사는 오래됐다. 처음에는 선거여론조사 자체를 금지했다. 이승만 정부 시절인 1958년 제정된 참의원의원선거법에 “누구든지 선거에 관하여 당선 또는 낙선을 예상하는 인기투표를 할 수 없다”는 규정이 등장했다. 이후 선거여론조사는 할 수 있되, 공표 금지 기간을 두는 것으로 변화했다. 1994년부터 2005년까지는 공식선거운동 기간에 선거여론조사 결과를 공표하지 못하도록 했다. 지금은 공직선거법 제108조 1항에서 “누구든지 선거일 전 6일부터 선거일의 투표 마감 시각까지 선거에 관하여 정당에 대한 지지도나 당선인을 예상하게 하는 여론조사의 경위와 그 결과를 공표하거나 인용하여 보도할 수 없다”는 규정으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선거 전 여론조사 공표 금지는 일견 합리적이고 타당한 제도로 보일 수도 있다. 선거가 임박해 불공정하고 부정확한 여론조사가 나오면 유권자에게 왜곡된 정보를 줘 판단을 흐리게 할 수 있으므로 이를 막기 위한 장치라는 논리가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민주주의 관점과 배치될 뿐 아니라 시대착오적이다. 유권자를 자유롭고 능동적인 의사결정 주체로 보는 게 아니라 주변 환경에 휘둘리는 피동적 존재로 보는 반민주적 인식이다. 선거는 유권자의 주인됨을 확인하는 이벤트인데 유권자를 객체로 보는 것이다.

공표 금지가 필요하다는 쪽에선 밴드왜건 효과(대세를 추종하는 현상)와 열세자 효과(언더도그 이펙트·열세에 놓인 후보를 응원하는 심리 때문에 약체 후보의 지지율이 오르는 현상)를 얘기한다. 여론조사 결과로 인해 다수에 포함되고 싶은 사람들은 이기는 후보로, 동정심이 생기는 사람들은 뒤처진 후보로 쏠린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근거는 희박하다. 측정될 수도 없다. 투표자가 이에 영향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다. 각국의 선거에서 이 이론이 보편적으로 증명되지도 않았다. 열세 후보를 지지하는 경우 다수와 의견이 달라 자유로운 의사표현이 제약되는 이른바 ‘침묵의 나선’ 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다는데, 투표는 선거일에 아무도 보지 않는 기표소 안에서 이뤄지므로 침묵이 강화돼 투표에 영향받는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반면 이로 인해 국민의 알 권리를 제약하는 문제는 심대하다. 유권자는 선거 전반의 상황을 알 권리가 있다. 유권자는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이것이 여론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고 싶어 한다. 충분한 정보를 바탕으로 유권자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 공표나 보도만 금지하므로 이 기간에 여론조사는 실시된다. 각 정당이나 단체, 언론사는 공표 금지 기간에도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 이는 형평에도 맞지 않는다. 왜 이들에 비해 유권자를 차별하는가.

개인 온라인 유통엔 무용지물

방송에서는 금지 기간 직전 조사 결과를 계속 내보낸다. 그 시점의 여론과 맞지 않는 ‘과거’의 정보가 제공되는 것이다. 선거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는 시기에 부합하지 않는 정보가 전달됨으로써 오히려 유권자에게 혼란을 준다.

이는 세계적 흐름과도 맞지 않는다. 2017년 기준 세계여론조사협회(WAPOR) 조사를 보면 미국, 영국, 독일, 스웨덴, 덴마크, 네덜란드, 벨기에, 일본은 법적으로 금지 기간이 없다. 우간다, 세네갈, 리비아, 필리핀, 방글라데시, 보츠와나 등도 없다. 프랑스, 러시아, 스페인, 멕시코, 아르헨티나, 인도, 파키스탄은 우리보다 짧다. 우리와 비슷하거나 더 긴 나라들도 있다. 이탈리아, 우크라이나, 볼리비아, 에콰도르, 레바논, 몽골 등이다. 튀니지는 150일, 카메룬은 90일, 온두라스와 볼리비아는 30일로 길다. 어떤 사례를 참조해야 할지 설명이 필요 없다. 조사된 133개국 전체를 보더라도 금지 기간의 중앙값이 한국보다 짧은 5일이다.

온라인 중심 환경에선 제도의 효과도 사라진다. 오히려 부작용이 크다. 정당이나 언론 등에 지인이 있는 경우 사적 메신저로 결과를 알 수 있다. 단지 공식 공표가 금지될 뿐이지 개인 간 정보 유통이 활발하게 나타난다. 오히려 특정 후보나 정치세력 쪽이 확인되지 않은 유리한 결과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유포하는 행위가 횡행한다. 공개된 곳에 올리면 처벌받지만 현실적으로 개인 간 유통을 막지 못한다.

세계가 연결된 상황에서 해당 규정이 무용해지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외국에서 한국의 선거조사 결과를 보도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과거에는 국가 간 정보 이동이 제약됐지만 지금은 외국의 주식 시황도 손바닥에서 알 수 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 프랑스는 7일간의 공표 금지 기간을 뒀는데 옆 국가인 스위스의 언론사가 프랑스 선거조사 결과를 공개하는 일이 있었다. 결국 프랑스는 선거 전날과 당일만 금지하는 것으로 단축했다.

무자격 여론조사기관의 부정확한 조사 결과가 난무하는 상황이라면 공표 제한이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산하 여론조사심의위원회가 선거조사를 엄격히 모니터링하고 있다. 규정을 위반하면 처벌도 이뤄진다. 선거 막판에 공표되는 여론조사도 조건을 충족하고 규정을 준수한 경우에만 공개할 수 있다. 따라서 공표 금지 기간이 없으면 무자격 여론조사기관의 부정확한 조사 결과가 나온다고 우려하지 않아도 된다.

선관위, 6일→2일 단축안 국회 제출하기도

여론조사 공표 금지 규정은 서둘러 폐지하거나 하루 이틀 정도로 단축해야 한다. 선관위를 비판할 일은 아니다. 선관위는 공표 금지 기간을 현행 6일에서 2일로 단축하는 안을 국회에 제출한 바 있다. 하지만 몇 해 동안 잠들어 있다. 입법으로 속히 해결해야 하는데 국회가 미온적이어서다. 자신들을 뽑아준 국민을 부화뇌동하는 존재로 보는 데 동조하는 것이다. 이 또한 국민을 모독하는 일이다.

윤희웅 오피니언라이브 여론분석센터장

*윤희웅의 여론 읽기: 여론조사의 허와 실을 파헤쳐 정확하게 여론 읽는 법을 전하는 칼럼입니다. 격주 연재.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