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토론으로 후보 지지율 순위는 변하는가. 대선 후보자 TV토론을 앞두고 빈번하게 듣는 질문이다. 사실 이에 대한 답은 거의 정해져 있다. 지지 후보가 바뀌는 ‘변경 효과’보다는 기존 지지층의 표심을 굳히는 이른바 ‘강화 효과’가 주로 있다고 말이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선 대체로 TV토론의 영향이 제한적이라는 시각이 퍼져 있다.
TV토론이 시작된 미국에서는 몇몇 사례로 인해 TV토론이 선거에서 결정적 구실을 한다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1960년 민주당 존 F. 케네디가 현직 부통령인 공화당 리처드 닉슨과 맞붙었을 때다. TV토론에서 정치 신예 케네디는 “미국은 훌륭한 나라지만 더 훌륭해질 수 있다. 미국은 강한 나라지만 더 강해질 수 있다”는 메시지를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전했다. 이에 견줘 닉슨은 시종일관 맥없고 지친 모습을 보이며 무너졌다고 평가된다.
1984년 재선에 출마한 로널드 레이건은 당시 73살이었는데 56살이던 도전자 월터 먼데일이 TV토론에서 레이건의 나이를 문제 삼았다. 이에 레이건은 “저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상대 후보의 어린 나이로 인한 경험 부족을 이용하지 않겠다”고 말해 방청객과 시청자를 크게 웃게 하며 승기를 잡았다. 자신의 최대 약점을 방어하고, 상대의 약점을 드러내면서도 대인배 이미지를 얻었다고 평가된다.
우리나라 대선에선 이처럼 TV토론으로 후보들의 당락이 결정되는 일이 없었고, TV토론 중 기억에 남는 결정적 장면도 많지 않은 편이었다. TV토론이 지도자들의 토론답게 수준 있게 진행되지 못하고 부실했던 점도 TV토론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하게 한 요인이었다.
그럼에도 TV토론은 선거기간에 가장 중요한 이벤트임을 부인할 수 없다. 선거운동은 결국 유권자의 관심을 끄는 일인데 TV토론만큼 유권자 관심을 끄는 것은 없다. 후보들을 나란히 세워놓고 유권자가 직접 비교평가할 기회도 TV토론 외에는 없다. 정치 혐오와 외면을 얘기하지만 대선 TV토론의 시청률은 단연 최고 수준이다. 모든 게 결정되는 유일한 기회는 아니지만 이보다 더 영향력 있는 선거캠페인 기회를 찾기 힘들다.
후보들 정보가 충분하지 않은 상황이라면 TV토론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더 고조된다. 누구에게 투표할지 마음을 정하지 못한 유권자가 많은 상황에서도 TV토론의 영향력은 높아진다. 또 누군가에 대해 막연한 지지는 하지만 정작 투표장까지 갈지 고민하는 유권자가 많을 때도 이들을 투표장으로 이끌어내는 유인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TV토론은 중요해진다. 후보들이 TV토론을 우습게 보거나 치명적인 실수를 하는 경우 TV토론은 한국에서도 언제든 결정적일 수 있다.
지나간 대선이라 주목도는 떨어지지만 2017년 대선의 선거 사후 조사를 보면, TV토론이 후보 지지에 미친 영향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다. 후보자 토론회가 후보 지지에 미친 영향을 물었는데, ‘더욱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가 응답자의 38.1%, ‘토론회가 지지 후보에 별로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31.6%, ‘토론회를 보고 지지 후보가 바뀌었다’ 19.7%, ‘지지 후보가 없었는데 토론회 후 생겼다’ 9.3%로 나왔다.(중앙선거관리위원회, ‘제19대 대통령선거 후보자토론회 효과 분석 연구’, 2017년 5월10~15일 조사)
토론회가 지지 후보에 별 영향을 주지 않았다는 응답과 기존 지지 후보에게 더욱 호감을 갖게 되었다는 응답이 높지만, 토론회를 보고 지지 후보가 바뀌었다거나 지지 후보가 없었는데 토론회 후 생겼다는 응답을 합하면 29%로 이는 상당히 의미 있는 수준이다. 후보들 간 격차가 크지 않은 상황이나 유동층이 많은 경우 선거 결과에 영향을 주기에 충분한 규모다.
TV토론을 과소평가하는 시각은 ‘토론 잘하는 것과 당선은 별개’라는 인식과 닿아 있기도 하다. 도널드 트럼프와 힐러리 클린턴의 TV토론에서 힐러리가 압승했지만 당선은 트럼프 차지였다. 우리나라의 지난 대선 뒤 실시한 조사에서 누가 TV토론을 잘했는지 물었는데 1위는 심상정(44.2%), 2위는 유승민(26.8%)이었다. 다음으로 문재인(14.4%), 홍준표(6.9%), 안철수(1.9%) 순이었다. 선거 결과와는 차이가 있었다.
실제로 유권자는 TV토론에서 누가 토론을 잘하는지 보는 게 아니다. 누구의 공약이 더 훌륭하고 더 나쁜지 보는 것도 아니다. 유권자는 TV토론에서 주로 후보자들의 ‘인물 됨됨이’를 본다.
앞에서 인용한 동일한 조사에서 “대선 후보자 토론회를 통해 다음 중 어느 영역이 가장 잘 검증됐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질문했는데, 무려 61.8%가 ‘후보자의 자질’을 꼽았다. 다음으로 17.8%는 ‘후보자의 능력’, 10.9%는 ‘후보자의 정책’이라고 답했다.
토론회가 정책과 공약을 부각하기 어렵게 설계됐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오히려 TV토론이라는 매개에 대해 유권자가 후보들의 자질을 평가하는 기회로 적극 활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각에서 TV토론을 정책과 공약 발표의 장으로 인식하지만 실제 유권자는 다르게 보는 것이다. TV토론이 끝나면 특정 사안에 대한 후보들의 입장 차이나 정책 내용이 어땠는지보다는 누가 예의와 품격이 더 있었는지를 사람들이 주로 얘기하고 기억하는 것을 보아도, 유권자에게 작동되는 TV토론의 기능은 공약이나 토론 실력이 아니라 인물 평가임을 알 수 있다.
제20대 대선에서도 TV토론이 시작됐다. 어느 때보다 TV토론에 유권자의 관심이 높을 것으로 보인다. 지지 후보를 확고하게 정하지 않은 유권자가 많은 편이어서 역대 선거보다 TV토론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다. 준비된 모습과 품격 있는 모습을 통해 후보들은 유권자의 신뢰를 얻고, 유권자는 냉정하게 옥석을 가리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윤희웅 오피니언라이브 여론분석센터장
*윤희웅의 여론 읽기: 여론조사의 허와 실을 파헤쳐 정확하게 여론 읽는 법을 전하는 칼럼입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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