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여론조사의 나라’이다. 전방위적으로 여론조사가 활용되고 도처에서 여론조사를 만날 수 있다. 정치 영역에서는 사람이나 정당보다 여론조사가 단연 주인공이고, 각종 선거도 여론조사로 시작해 여론조사로 끝난다. 정치의 미덕이라는 ‘대화와 타협’은 여론조사의 위세에 눌렸고 여론조사를 통하지 않으면 합의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는 여론조사를 적극적으로 실시해 정책 결정과 중단의 근거로 삼는다. 여론조사 결과를 따랐다고 하면 추후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책임을 면할 수 있다. 공공기관의 서비스와 정책을 평가할 때도 설문조사 방식이 주로 활용된다. 이른바 ‘평가의 시대’가 되면서 외부 평가로서 시민 여론이 핵심 지표가 됐다.
시민단체가 정부 정책에 항의할 때도 여론조사 결과는 빠지지 않는다. 언론 기사를 모아놓은 포털에서도 여론조사 기사를 매일 만난다. 몇몇 조사기관이 자체적으로 발표하는 여론조사 결과는 거의 모든 언론이 속보 경쟁하듯 그대로 기사로 옮겨 온라인에서 클릭을 유도한다. 사람들은 여론조사에 대해 문제가 심각하다고 비판하면서도 어떤 이슈에 불만이 있을 때 여지없이 여론조사 결과를 인용한다.
여론조사가 공공영역에서 활발하게 사용되는 것은 물론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미국에서도 연방과 주 차원에서 다양한 여론조사가 실시된다. 프랑스에서는 여론조사 관련 법안까지 마련돼 시행될 정도다. 영국에서도 브렉시트 논란 때 보듯 다양한 여론조사가 활발히 이루어진다.
하지만 국내외를 두루 경험한 전문가들의 의견은 여론조사 활용이 한국에서 유독 심하다는 데로 모인다. 프랑스는 여론조사위원회에 등록된 정치조사업체가 13곳인데, 지금 한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에 80개 넘는 업체가 이름을 올렸다. 일본은 <엔에이치케이>(NHK) <아사히신문> <요미우리신문> 등 주요 언론사 중심으로 간간이 여론조사가 보도돼 한국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의미 없을 정도다.
미국의 <뉴욕타임스> 같은 주요 언론을 보면 여론조사 결과 자체에 대한 보도는 대선이 임박한 특수한 시기가 아니면 찾기 쉽지 않다. 여론조사 보도라 해도 심층분석 내용에 조사 결과가 일부 인용되는 형식이다. 한국처럼 여론조사 결과만 그대로 보도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제목에서도 국외 언론은 한국 언론과 다르게 수치를 그대로 적는 경우가 별로 없다.
조회수 높이기를 목표로 하는 언론사에서 여론조사 보도를 대량으로 생산해내는 데는 온라인 시장에서 ‘장사’가 잘되기 때문이다. 여론조사에 대한 상당한 관심과 맞물려 상승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한국의 여론조사 역사는 긴 편이 아니다. 현대 여론조사 방식이 미국에서 1930년대 시작돼 발전했고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국사편찬위원회의 1973년 자료집에는, 1946년 7월 미군정청 여론국에서 서울 지역 1만 명에게 선호하는 정부 형태와 경제체제를 물었다고 나온다. 본격적으로 여론조사가 도입된 것은 1987년 대선 즈음이다. 당시 대선에서 한국갤럽조사연구소가 대선 예측 조사를 냈고 이것이 결과에 부합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해 대세가 됐다.
정치권도 한몫했다여론조사가 뒤늦게 시작됐지만 한국이 신속하게 여론조사 공화국으로 이동한 이유는 무엇일까. ‘공적 권위와 신뢰의 부재’ 때문이다. 한국에서 사회와 관련한 주요한 결정을 내리는 국회에 대한 신뢰도는 형편없다. 다른 공공기관도 전반적으로 신뢰도가 낮은 편이다. 공공기관에 대한 신뢰가 높다면 각 정책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문화가 작동했을 것이다. 그러면 여론조사 과잉도 적절히 제어됐을 것이다.
공적 부문에 대한 신뢰가 약하면 국민은 직접 자신들의 의견을 확인하고 결정해야만 수긍할 수 있다. 공공기관의 의사결정이 불투명할 경우 대중적 수용성을 갖지 못하는 사례는 빈번하게 발생한다. 불신이 팽배한 사회가 여론조사 의존 현상을 심화한 것이다.
직접민주주의를 선호하는 기류도 영향을 줬다. 개헌 논의와 관련해 서구에서 보편적인 내각제에 대한 거부감이 큰 것은 대통령은 직접 선출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하지 않으면서 민주주의의 일면인 다수결주의가 최고선이 된 것도 배경 중 하나다. 여론조사가 어느 후보 또는 어느 입장이 더 우세한가를 확인하는 데 주로 쓰인다.
여론조사를 뜻하는 영어 단어 ‘폴’(poll)을 메리엄웹스터사전에서 검색해보면 머리, 머리카락의 의미가 들어 있다. 머릿수를 세어 더 많은 쪽이 어디인지 보는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런 애초 기원에는 충실할지 모르나 여론조사가 단지 다수가 어디인지 확인하는 데 그치고 민주주의 심화를 제약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정치권에서 스스로 신뢰를 키우지 않고 여론조사에 기댄 정치를 해온 것도 영향을 줬다. 정당 내 선출직 후보를 대상으로도 여론조사를 도입하면서 여론조사가 결국엔 답이라는 인식을 확산시켰다. 언론 책임도 크다. 마치 대단한 사건이 벌어진 양 여론조사 결과를 자극적으로 보도한다. 결과에 담긴 다양한 가능성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은 없고, 단지 수치 위주의 자극적 보도를 반복한다.
부실하지만 여론을 반영하는 게 여론을 외면하는 것보다 낫지 않냐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무조건 여론조사 결과에만 의존하는 사회의 미래는 위험하다. 영국의 학자이자 정치가인 제임스 브라이스는 여론의 중요성을 얘기하면서도 자칫하면 ‘정치인이 여론을 형성하는 데 집중하기보다는 점점 더 여론을 찾아내 그것에 복종하려 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소신과 비전을 국민에게 설명하고 동의를 얻어나가는 과정은 소홀히 하고, 지금 당장의 여론에 아부하려는 기술에 매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언론도 논쟁 있는 이슈에 대한 여론조사 보도에만 매몰되면서 정작 사회에 필요한 새로운 의제를 찾는 조사와 보도에는 소극적이게 될 수 있다. 여론조사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문화는 구성원 간 대화와 토론을 막는 부정적 결과도 야기한다. 여론조사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조사 만능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윤희웅 오피니언라이브 여론분석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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