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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서는 무조건 예스라고 해야 했다

지난 3년간 세 광역지방단체장이 성범죄 연루, 그 구조적인 문제
등록 2020-07-18 13:20 수정 2020-07-19 12:08
7월15일 오후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붙은 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성추행 의혹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대자보. 한겨레 김혜윤 기자

7월15일 오후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붙은 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성추행 의혹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대자보. 한겨레 김혜윤 기자

인권변호사 6년, 시민운동가 16년, 서울시장 9년. 그의 역사는 한국 사회에서 인권이란 말이 제 이름값을 찾아가는 역사였다. 그가 걸어온 길은 시민운동의 길이기도 했다. 변호사 박원순은 고통받는 이들을 변호했고, 시민운동가 박원순은 고통받는 이들의 호소를 사회 의제로 다듬었다. 행정가이자 정치가인 박원순은 의제를 정책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가 산으로 올라간 7월9일, 모든 것은 ‘과거형’이 돼버렸다.
소중한 이를 떠나보낸 슬픔은 ‘성추행 의혹’이라는 길목에서 분노와 좌절, 무기력을 마주해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1993년 ‘서울대 신 교수 성희롱 사건’을 변론하며 성희롱과 성추행을 불법으로 가장 먼저 제기하고, 서울시 성평등 정책을 공들여 만들었던 그가 성추행 혐의로 피소당하는 역설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피해자에 대한 사과 한마디 없이 ‘공소권 없음’이라는 다섯 글자만 남긴 채 극단적 선택을 했다. 초현실적 시간 속에 ‘자살생존자’로 남은 우리 사회 구성원들은 애도와 진실규명, 성찰 사이에서 갈등하고, 반목한다.
인권변호사, 시민운동가, 서울시장 박원순의 역사는 빛이 바랬지만, 그가 실천해온 가치와 철학은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간이다. 고통받는 사회적 약자를 변호하는 것. 고통의 호소를 의제로, 정책으로 만들어 똑같은 일이 다시 벌어지지 않게 하는 것. 남겨진 우리가 그와 온전히 작별하기 위해 직시해야 할 과제다.
“그는 갔다.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 슬픔을 딛고 정의를 바라는 사람들은 살아남아서 다시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야 하지 않는가.”(노무현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박 시장의 글, 책 <박원순이 걷는 길>, 임대식 지음, 2015)_ 편집자 주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2017년 7월부터 2018년 2월까지 업무상 위력을 이용한 정무비서(전 수행비서) 성폭력 범죄로 징역 3년6개월 선고받고 복역 중

오거돈 전 부산시장: 2020년 4월 시장 집무실에서 여성 공무원을 성추행한 사실 인정해 시장직에서 사퇴. 강제추행 혐의 경찰 수사 중

고 박원순 서울시장: 2017년부터 4년 동안 비서를 시장 집무실에서 성추행한 혐의 등으로 피소

2018년부터 3년 동안 무려 세 명의 광역지방자치단체장이 성폭력 사건에 연루됐다. 피해자들은 JTBC <뉴스룸> 생방송, 부산성폭력상담소, 서울지방경찰청을 찾아 일터에서 겪은 일을 고발했다. 피해 내용과 정도는 차이가 있지만 시·도청을 넘어 반복적으로 터져나온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울부짖음에는 우리 사회가 직시해야 할 사회구조적 문제가 깔려 있다. 세 사건의 씨줄과 날줄이 맞닿는 지점을 열쇳말 세 개로 짚어본다.

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발인이 진행된 7월13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시청에서 고인의 위패와 영정이 영결식장으로 향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발인이 진행된 7월13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시청에서 고인의 위패와 영정이 영결식장으로 향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① 심기 보좌

2020년 7월13일 박원순 시장을 성추행 혐의로 고소한 피해자 법률대리인 김재련 변호사와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의전화가 연 기자회견에 따르면, 피해자는 공무원으로 임용돼 다른 기관에서 일하다 서울시의 연락을 받고 시장실 면접 뒤 비서로 일했다. 시장 집무실과 집무실 내 침실에서 신체적 접촉, 퇴근시간 뒤 비밀대화방 초대, 속옷 차림 사진 전송 등의 피해가 4년간 지속됐다고 했다.

이들은 7월16일 피해자 상담 내용을 바탕으로 보도자료를 추가로 내어 “(서울시장) 비서 업무 성격은 시장의 ‘기분을 좋게 하는 것’으로 구성됐으며 비서 평가와 교체 여부 역시 이를 중심으로 정해졌다”고 사례를 들어 밝혔다. 예컨대 박 시장이 “평소 1시간 넘게 (마라톤을) 뛰는데 여성 비서가 함께 뛰면 50분 안에 들어온다며 주말 새벽에 나오도록 요구”하고, “시장의 기분이 좋은 상태에서 원하는 답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공무원)이 비서에게 ‘기분을 좋게 하는’ 역할을 암묵적, 명시적으로 요구”했다고 한다. 이를 “심기 보좌 혹은 ‘기쁨조’와 같은 역할”이라고 이름 붙였다.

비서 업무는 그 범위가 명확하지 않고 공사 영역 구분이 모호하다. 뭐든지 해야 하기에 윗사람의 지시가 부당해도 거스르기 어려운 상황이다. 특히 시·도 광역단체장은 ‘소통령’으로 불릴 만큼, 공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권력이 큰 인사다. 지방의회 견제와 감시가 상대적으로 약한 가운데, 공무원과 산하 공공기관장 인사권, 예산 편성권, 각종 인허가권을 쥐고 있다. 동시에,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유력 정치인이기도 하다. 비서들이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2000년대 이후 지자체장 비서실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ㄱ씨는 “처음엔 시도 때도 없이 부름에 응해야 하는 구조가 이해되지 않았으나 ‘모든 사람이 노(No)라고 할 때, 비서는 예스(Yes)라고 말해야 한다’는 선배들의 말을 계속 듣다보니 세뇌되듯 관행에 순응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런 관행을 따르지 않고 이의를 제기하면 좁디좁은 정치권에서 평판이 나빠져 결국 설 자리가 없어진다. 또 “시민 손으로 뽑힌 지자체장 중에는 탈권위와 민주화를 강조하다, 왕처럼 떠받들어주는 조직문화에 익숙해지고 변해가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고 전했다. 국회의원 비서 ㄴ씨는 “비서라는 직무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사회적으로 제대로 논의되지 않았으며, 업무를 하다 (범죄 등의) 피해를 고발할 경우 되레 불이익을 받는 구조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범위를 알 수 없는 업무 영역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수행비서였던 김지은씨는 성폭력 고발 554일간의 기록 <김지은입니다>에서 “무슨 업무든지 수행하고 비밀을 엄수해야 한다는 수행비서의 철칙이 나를 옥죄었다”고 고백한다. “새벽에 출근해서 밤늦게 퇴근했고 휴일도 거의 없었다. 고통스러웠던 일은 노동자로서 내가 할 이유가 없으며 해서도 안 되는 일들을 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더러 주위에 어려움을 토로하면 ‘비서는 업무 범위가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지시하는 것이라면 뭐든 해내야 한다’는 말이 돌아왔다. 오히려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더 잘 보좌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김지은입니다> 105~106쪽)

지자체장은 50대 고학력, 남성, 거대 정당 출신의 정치인 및 행정가가 다수(‘한국 지방자치단체장의 사회적 배경의 변화에 관한 연구-다양성 분석을 중심으로’, 2017)로  남성 중심적 문화가 형성돼 있는데다, 비서 업무 경계가 불투명한 탓에 성폭력이 일어날 가능성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시장이 운동 등을 마치고 온 후 시장실에서 샤워를 할 때 속옷을 비서가 근처에 가져다주어야 함. 샤워를 마친 시장이 그대로 벗어두면 운동복과 속옷을 비서가 집어 봉투에 담아 시장의 집에 보냄.” “시장실 내 침대가 딸린 내실에서 낮잠을 깨우는 건 여성 비서가 해야 했음. 여성 비서가 깨워야 기분 나빠하지 않으신다며 해당 업무를 요구.” “시장 건강 체크를 위해 아침·저녁으로 혈압을 잼. ‘자기(피해자)가 재면 내가 혈압이 높게 나와서 기록이 안 좋아’ 등의 성희롱적 발언에도 업무 지속.”(7월16일 보도자료)

범죄에 해당하는 피해를 겪어도 불이익을 우려해 감내해야 하는 구조에선, 권력자가 자신의 힘에 대해 성찰하지 않고 타인의 인격을 존중하지 않을 위험이 얼마든지 존재한다. 권인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7월15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나와 반복되는 지자체장 성폭력 문제에 대해 “자신의 권력이 주변에 일하는 사람을 꼼짝 못하게 하는 힘이 위력인데, 위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고위층 권력을 가진 분들이 실감을 잘 못하는 것 같다”고 짚었다. 그는 “같이 일하는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는 것, 그 사람의 의사가 중요하지 않은 것, 나의 의사만이 고려되는 상황이 (위력의) 핵심”이라며 “굉장히 위계적인 조직문화와 남성주의적인 질서, 오래된 성문화가 결합해 이러한 의식들이 배어나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2018년 서울시 공무원 성평등 및 성희롱 실태조사 설문조사 대상: 본청·사업소·자치구 공무원 6810명(본청 817명 참여), 기간: 2018년 10월25일~2018년 11월15일 단위: %

2018년 서울시 공무원 성평등 및 성희롱 실태조사 설문조사 대상: 본청·사업소·자치구 공무원 6810명(본청 817명 참여), 기간: 2018년 10월25일~2018년 11월15일 단위: %

② 조직의 묵인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서울시장 성폭력 사건 피해자가 고소를 결심하게 된 데 대해 “서울시 내부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시장은 그럴 사람이 아니라며 단순한 실수로 받아들이라고 해 더는 피해가 있다는 말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설명했다. 법률대리인 김재련 변호사도 “피해자가 성적 괴롭힘에 대해 비서관에게 부서를 옮겨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고 말했다.(7월13일 기자회견) 피해를 알렸으나 서울시나 비서실 차원에서 이를 무마·은폐한 것인지 규명이 필요한 대목이다.

서울시 성희롱·성폭력 사건 처리 매뉴얼(2018)을 보면, 부서장이 고충 상담을 요청받은 경우 사건에 대해 판단하거나 행위자와 피해자 사이를 조정하려 하지 말고 피해자 상황을 경청하고 서울시 내부의 고충 처리 절차 등에 대해 필요한 정보를 전달하게 돼 있다. 그러나 이런 매뉴얼은 매뉴얼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더구나 시장을 보좌하며 권력이 집중된 비서실은 이런 규율에서 열외로 자리잡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피해자가 원칙에 따라 전보 요청을 한 것에 대해 ‘비서실에는 해당 사항이 없다’며 전보 요청을 승인하지 않았다.”(7월16일 보도자료)

4월14일 서울시장 비서실 소속 남성 직원이 다른 부서 직원을 성폭행한 혐의로 서초경찰서에 입건돼 수사를 받고 있다는 것이 뒤늦게 알려진다. 서울시는 가해자로 지목된 직원을 사건 인지 직후 바로 대기발령(직무배제)을 하지 않고 다른 부서로 인사이동만 시켰다. 그러다 언론 보도가 나온 4월23일에야 대기발령 뒤 경찰로부터 수사 개시를 통보받았다며 다음날 직위 해제한다. 김태균 서울시 행정국장은 조처가 늦어진 것에 “인지한 정보가 얼마나 정확한 것인지 확신이 부족했다”고 해명했다.(4월28일 서울시의회 행정자치위원회) 그러나 서울시 안팎에서는 가해자로 지목된 직원이 비서실 소속이기 때문에 늑장 대처했다는 뒷말이 나왔다. 서울시 성희롱·성폭력 사건 처리 매뉴얼에 따르면 ‘행위자·피해자 분리를 위한 인사 조처’ 방법으로 행정국 대기근무(원칙), 즉시 직위 해제(비위 정도가 중대할 경우)로 돼 있다.

지자체장 비서실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ㄱ씨는 “인사권은 지자체장에게 있고, 이러한 지자체장을 보좌하는 비서실은 삼성그룹으로 치면 미래전략실 같은 조직이다. 소속 직원들은 국·과장급보다 영향력이 크고 공무원들도 선호하는 부서”라고 설명했다. “서울시 사정을 자세히 알 순 없지만 비서실에서의 불미스러운 일이 외부에 알려지면 모시는 수장과 조직에 누를 끼친다고 생각하므로 성폭력 사건도 최대한 조용히 처리하고 싶어 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고 박원순 서울시장을 성추행 혐의 등으로 고소한 피해 여성을 대리하는 김재련 변호사가 7월13일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실에서 박 시장이 피해자를 텔레그램 비밀대화방에 초대한 휴대전화 화면 사진을 공개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고 박원순 서울시장을 성추행 혐의 등으로 고소한 피해 여성을 대리하는 김재련 변호사가 7월13일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실에서 박 시장이 피해자를 텔레그램 비밀대화방에 초대한 휴대전화 화면 사진을 공개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시장은 어떻게 피소 사실을 알았을까

실제로 박 시장과 보좌진은 ‘운명 공동체’였다. 박 시장이 숨지면서 그가 기용한 비서실장 등 별정직 공무원 27명은 7월10일자로 당연퇴직 처리됐다. 지자체장이나 지방의회 의장 보좌를 위해 지방별정직 공무원으로 임용된 경우 단체장과 의장의 임기 만료·퇴직 등과 함께 면직(지방별정직 공무원 인사규정 제12조)된다. 서로를 ‘순장조’라고 부르며 잘못된 일을 묻어주는 메커니즘이 작용하는 배경이다.

시장의 피소 사실을 서울시가 어떻게 알게 됐는지도 밝혀야 하는 부분이다. 피해자가 고소장 접수 1시간30분 전인 7월8일 오후 3시, 임순영 서울시 젠더특보가 박 시장에게 피소 사실을 알렸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으나, 임 특보는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이를 부인했다. 서울시 외부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다’고 들어 ‘실수한 것 있으시냐’ 물었을 뿐 피소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날 밤, 박 시장이 최측근과 한 대책회의도 ‘늘 하던 현안 회의 중 하나’였다고 말했다.

앞서 7월8일 오후 4시30분께 피해자는 김재련 변호사와 함께 고소장을 내며 증거인멸 등이 우려돼 경찰에 각별한 보안을 요청했다. 휴대전화나 컴퓨터 등을 이용한 음란행위(성폭력처벌법 제13조)는 물적 증거를 확보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피해자 조사는 이튿날(7월9일) 새벽 2시30분에 끝났다. 그리고 박 시장은 이날 오전 10시44분께 공관을 나서 숨진 채 발견됐다. “고소와 동시에 피고소인(박 시장)에게 수사 상황이 전달됐다.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되기 전에도 증거인멸의 기회가 주어지는 상황에서 누가 국가 시스템을 믿고 위력에 의한 성폭력 피해 사실을 고소할 수 있겠나.”(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장, 7월13일 기자회견)

③ 제도 불신

광역단체장의 성폭력 사건이 잇따라 불거질 때마다 피해자 신상털기, 가십성 언론 보도가 줄을 이었다. 성폭력을 별일 아닌 것으로 묵인하는 현실에서 피해자들의 침묵과 불신은 오히려 깊어간다.

여성가족부는 2018년 6월 기초지자체 공무원 10만8천 명에게 온라인 설문조사(응답률 41.3%)를 벌였다. 응답자의 11.1%가 ‘3년 이내에 성희롱 등 피해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피해 경험이 있다고 답한 응답자 중 74.5%는 ‘그냥 참고 넘어간다’고 답했다. 직장 내 공식기구에 신고한 응답자는 3.9%에 그쳤다. 서울시 여성가족정책실이 2018년 10월 서울시청과 자치구 공무원 등 직원 6810명에게 한 ‘성평등 및 성희롱 실태조사’의 결과보고에 따르면, 직장에서 성희롱이 발생할 경우 사내 처리에 대한 신뢰 정도는 성별과 연령에 따라 큰 차이를 보였다. 여성은 33.4%, 20대는 34.8%만이 ‘사내에서 적절한 처리를 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반면 같은 답변을 한 남성은 74.6%, 50대는 76.3%에 이른다. 적절한 처리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응답한 이들은 그 원인으로 ‘성희롱을 조직이 아닌 개인 문제로 보는 경향’(50.7%), ‘직장 내 묵인·방관 문화’(47.2%) 등을 꼽았다.

안희정 전 지사가 사임한 직후인 2018년 3월 충남도는 ‘성희롱·성폭력 예방 종합대책’을 마련했다. 그러나 익명을 요청한 충남도 공무원은 “전담기구 등 제도가 아무리 잘 마련돼 있어도 도지사가 절대 권력인 폐쇄적, 수직적 분위기에서는 불이익을 우려해 피해자가 문제를 제기하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막강한 권력을 감시하는 구조는 없어

오거돈 전 시장이 성추행을 인정하고 사퇴하자 2020년 5월 부산시는 시장 직속 감사위원회에 ‘성희롱·성폭력 근절 추진단’ 신설, 전 직원 성인지 감수성 교육 등을 뼈대로 하는 대책을 마련했다. 그러나 오 전 시장 사례처럼 가해자가 시장인 경우 시청이 할 수 있는 조처가 없다. 부산시 관계자는 “오 전 시장 성폭력 사태가 불거지고 여성가족부와 한국여성인권진흥원에 정책 조언을 받았지만, 선출직인 시장은 조직 안에서 감시·견제·징계할 방법이 사실상 없다는 이야기만 들었다”고 했다. 서울시의 경우 성희롱·성폭력 사건 처리 매뉴얼 적용 대상에 시장도 포함돼 있긴 하다. 그러나 시장이 가해자일 때를 대비한 구체적인 절차는 마련돼 있지 않다.

광역단체장들에 대한 성폭력 의혹 제기와, 잇따른 불명예 퇴진이 우리 사회에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 첫째, 막강한 권력을 감시하는 체계 부재다. 둘째, 권력자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을 때 불이익을 당할 수 있는 폐쇄적 문화와 제도다. 피해 신고·처리 절차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낮은 ‘성인지 감수성’(일상에서 성별에 따른 차별과 불균형을 민감하게 인지하는 능력) 등 오랜 시간 굳어져 바꾸기 힘든 가부장적 구조다.

그러나 용기 있는 사람이 나오고, 절박한 저항에 부딪혀 이것들은 하나둘 파열음을 내고 있다. ‘피해 호소인’이라는 낯선 용어를 고집하기에 앞서 피해자의 간절한 호소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 먼저 아닐까.

“아무리 힘센 권력자라도 자신이 가진 위력으로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는 일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피해자 김지은, 2019년 1월9일 항소심 최후진술서)

“(신상털기와 가십성 보도) 우려에도 불구하고 저는 오 전 시장의 사퇴를 요구했습니다. 그것이 상식이기 때문입니다. 잘못한 사람은 처벌받고, 피해자는 보호받아야 한다는 너무나 당연한 이유 때문입니다.”(피해자 ○○○, 2020년 4월23일 입장문 )

“그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꿉니다. 거대한 권력 앞에서 힘없고 약한 저 자신을 지키기 위해 공정하고 평등한 법의 보호를 받고 싶었습니다.”(피해자 ○○○, 2020년 7월13일 입장문)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고한솔 기자 sol@hani.co.kr·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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