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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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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대와 혐오를 뿌리는 ‘삐라 잔혹사’

남북연락사무소 폭파 불씨 된 대북 전단 살포,
증오를 먹이 삼아 자라온 75년 ‘삐라 잔혹사’
등록 2020-06-20 14:31 수정 2020-06-21 08:44
2015년 7월 경찰의 제지로 멈춰선 화물차 안에 실린 삐라(대북 전단). 한겨레 자료

2015년 7월 경찰의 제지로 멈춰선 화물차 안에 실린 삐라(대북 전단). 한겨레 자료

정부 없는 나라(해방공간)에서, 정부만 있는 나라(전쟁과 권위주의 정부)를 거쳐, 정부와 시장과 시민사회가 복잡하게 얽힌 나라에 이르기까지. 삐라(대북 전단·bill의 일본어 표현)를 흩뿌리는 손은 변해왔다. “해방공간 속 극단적인 이념을 지닌 단체나 개인에서, 전쟁이나 냉전을 수행하는 국가로, 그리고 2000년대 이후 다시 극우단체로 삐라를 뿌리는 주체가 바뀌어왔다.”(이승욱 카이스트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뿌리는 손은 변해도 내용은 안 변하는

그러나 또한 변하지 않았다. “명확한 선악 구분, 폭력성, 증오 같은 삐라 속 문장의 성격은 75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로 반복된다.”(정선태 국민대 한국어문학부 교수) ‘위선자 김정은’(5월31일, 자유북한운동연합)을 적어 날린 삐라에 북한은 ‘망나니짓’(6월4일 <노동신문>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 담화)으로 답한다. 거친 언어로 가득한 종잇조각에 불과하지만 파국의 빌미가 된다. 북한은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6월16일 폭파했다. 콘크리트 더미 위로 남과 북은 ‘말폭탄’을 주고받는다.

잊을 만하면 흩날려 한반도를 얼어붙게 하는 종잇조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전문가들 설명을 따라 삐라의 끈질긴 생명력을 살펴본다.

“신문 보기 어려운 세상에, 신문 이상으로 고마운 것은 이 삐라가 아닙니까. 신문에는 통 비치지도 않는 소리가 여기에는 쑥쑥 나오지 않습니까.”(1946년 박노갑 소설 <역사>) 해방됐으나 어느 것 하나 정해지지 않은 1940년대 한반도에서 의견은 격하게 분출되고 입장은 첨예하게 갈린다. 정부도 언론도 자리를 못 잡았다. 갈등을 정제해 목소리 내줄 통로는 없다. ‘개인이나 정당을 막론하고 누구나 만들어 뿌릴 수 있는’ 삐라는 일종의 ‘게릴라 언론’이 된다.

정선태 교수가 당시 시대상을 담은 소설과 전단물에서 확인한 삐라의 성격은 한편 어쩔 수 없고, 한편 우려스럽다. 김남천의 소설 <1945년 8·15>에서 삐라 뭉치를 뒤적이는 인물은 온갖 주장이 난무하는 내용에 혼란스러워하다가도, 이내 그것들이 해방의 선물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이른다. 삐라는 제도 안에서 제 목소리를 구하지 못한 이들이 현실정치를 학습하는 교재로 묘사된다.(정선태, ‘삐라, 매체에 맞서는 매체’, 2012)

그러나 그 속에 담긴 언어는 우익과 좌익의 대립이 격해질수록 절망적으로 변해간다. “이 매국적 악행이야말로 천참만시(수만 번 동강 내 죽임)하여도 부족함이 있습니다.”(대한청년의혈당, ‘시민 여러분에게 고함’, 1946) “차라리 우리 손으로 무찔러버리고 자살은 할지언정…”(자살동맹, ‘오냐!! 싸우자!!! 올 것은 기어코 왔고’, 1946) “증오와 원한으로 가득한, 그리고 각각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날것’ 그대로의 언어는, 서로의 소통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해버린다는 점에서 해방공간에서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비극적 현대사를 예고하는 불길한 징후로 읽힌다.”(정선태, ‘전단지의 수사학-해방 공간의 ‘삐라’를 중심으로’, 2011)

적대가 사회의식을 규정하다

“적군과 시민들에게 1일당 한 개의 전단(삐라)이 전달돼야 한다. 오직 전단 투하만을 위해 폭격기를 배치해야 한다.”(미국 국무부, 1950) 휴전에 이르기까지 미군은 40억 장의 삐라를 한반도에 뿌린다. 군사조직을 갖추고 ‘작전’ 형태로 삐라가 이용되기 시작한다. 국가가 전면에 나선다. 심리·커뮤니케이션·사회학 이론에 따라 만들고, 뿌리고, 검증하고, 재생산하는 체계적인 과정이 도입된다. 무엇보다 적을 향한 미군의 심리전으로 시작한 삐라의 논리는 그대로 한국 사회의 의식을 규정하는 데 쓰였다. 미군의 심리전 프로그램은 포로 교육으로, 포로 교육 자료는 한국의 학생 교육 프로그램으로 전환됐다. 교과서의 삽화와 이미지, 상징은 상당 부분 삐라와 심리전 대본을 닮아 있다.(이임하, <적을 삐라로 묻어라>) 그렇게 적을 넘어 자국의 아이들을 세뇌했다. 이임하 교수(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는 한국전쟁 당시 삐라를 분석한 이 책 후기에 적는다. “삐라를 통한 심리전이 그러했듯 남과 나를 편 갈라 남을 배타하고 적개심을 드러내는 방법부터 배웠다. 결코 나와 남이 어떻게 갈리고 무엇이 다른지는 배우지 못했다. 그것은 선험적으로 주어졌기에.” ‘사악한 적’과 ‘정의로운 우리’가 당연하게 나뉜 세상에서 우리를 향한 질문은 멎는다. 다양한 목소리는 묵살된다.

“지역경제 다 망치는 대북 전단 살포 즉각 중단하라.”(김포 월곶마을 펼침막, 2020년 6월) 그래도 변화가 있었다. 1990년대 이후 세계는 냉전과 안보의 자리를 세계화와 경제로 대체한다. 평범한 시민 대부분 익숙해진다. 여기에 2000년대 초반 남북관계가 진전한다. 변화 속에 북한과 맞닿은 접경지도 ‘지경학적 희망’으로 들뜬다. ‘세계화 시대를 맞은 통일 한국의 심장 파주’(<경향신문> 2009년 4월27일) 같은 새로운 개발 비전을 강조한다. 미군 부대를 떠나보내고 산업시설을 짓는다. 관광객을 유치한다.

그러나 여전히 삐라는 뿌려진다. 수차례 남북 합의문 안에 ‘상호 비방 중단’을 적어놓은 터라 과거처럼 정부가 삐라를 들고 전면에 나설 수 없다. 제도권 바깥 극우 성향 단체가 나선다.(이승욱, ‘접경지역의 도시지정학: 경기도 파주시 대북 전단 살포 갈등을 사례로’, 2018)

지역 입장에서 보면 오래 억눌리다 이제 막 싹튼 경제적 비전과 가능성이, 극우 성향 단체가 소환하는 철 지난 혐오와 적개심으로 발목 잡히는 모양새다. 일상적으로 주민과 극우단체가 갈등한다. 갈등은 때로 더 큰 차원으로 번진다. “이번처럼, 그리고 2014년 삐라를 향한 북한의 고사포 발사처럼 곪아 있던 큰 갈등이 터지는 계기가 되면서 다시 국가 차원의 지정학적 갈등으로 번져나가기도 한다. 이런 갈등이 다시 지역의 갈등에 영향을 미친다.”(이승욱 교수) 오랜 시간 국가 사이 갈등에 집중하면 그만이던 지정학은 한국, 삐라가 날아다니는 접경에서 다양한 주체가 뒤얽히며 영향을 주고받는 복잡한 상황에 놓여버렸다. 통제 바깥 툭 불거지는, “존재감을 과시하기 위한 퍼포먼스, 혹은 비즈니스적인 목적으로 추정되는”(이승욱 교수) 우익단체의 삐라 살포가 국가 전체의 위기로 번진다.

삐라의 수사학을 담은 혐오

격렬한 삐라의 언어, 북한의 언어, 아직은 버티고 있되 점점 격해지라고 요구받는 우리 정부의 언어가 2020년 여름 맞부딪친다. 1940년대 삐라가 보여준 ‘비극적 징후’는 한층 짙게 한국 사회에 드리운 채다. 소통을 포기한 적의(해방공간), 성찰을 멎게 하는 동원 수단(냉전), 존재감에 대한 집착(현재)을 하나둘 덧붙이며 삐라는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잠깐, 삐라와 북한의 격렬한 갈등을 넘어 그 안에 담긴 혐오의 수사, 자체를 생각한다. “적의로 차 있고 자기성찰이 사라져 있고, 존재감을 과시하는 삐라의 특징은 남북관계를 넘어 각종 혐오표현에서 공통으로 나타난다. 최근 들어서는 온라인을 중심으로 이런 삐라의 수사학을 담은 혐오가 강화되고 있다. 그렇게 보면 온라인 뉴미디어가 새로운 시대의 삐라가 되는 건 아닐까 걱정스럽다.”(정선태 교수)

방준호 기자 whor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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