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일 저녁, 경남 창원의 ㄱ시장 한 막창집에는 손님이 가득했다. 코로나19가 막무가내로 휩쓸고 지나가며 텅 비었던 가게는 3개월 만에 활기를 찾고 있었다. 코로나19가 퍼지기 직전인 지난 1월, 3년째 막창집을 운영하던 이영혜(55)씨는 2호점인 ㄱ시장의 가게를 팔려고 내놓았다. 당시엔 코로나19 같은 세계적으로 대유행하는 감염병은 예상하지 못했다. 먼저 운영하던 1호점에 더 집중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2호점까지 챙기기엔 힘이 부쳤고, 사람을 새로 뽑기도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일주일 뒤, 코로나19가 터졌다. 2월부터는 손님이 한 팀도 없는 날이 늘었다. “코로나19 이전에는 1·2호점 모두 손님이 가득 차서 정신없었는데, 대구에서 확진자가 대거 나온 뒤론 손님이 정말 한 테이블도 없었어요. 장사 경력이 20년인데 이런 위기는 처음이었어요. 그래도 4월부턴 마스크 쓰고 오는 손님이 조금 있었어요. 물론 팔려고 내놓은 가게는 안 나갔죠. 누가 사겠어요?”
석 달 만에 손님이 찾아왔다
5월11일부터 전 국민에게 긴급재난지원금이 지급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재난지원금 쓸 수 있냐”고 물으며 들어오는 손님이 하나둘 늘었다. 이씨는 종이에 “재난지원금 사용 가능합니다”라고 직접 써서 문 앞에 붙였다. 가게를 팔겠다는 생각을 접고, 직원을 한 명 더 뽑았다. “재난지원금을 쓸 수 있는 기한이 8월이니, 그 뒤로 또 손님이 없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용기를 얻었어요. 다시 잘해보려고요.”
재난지원금을 둘러싼 논란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보편지급과 선별지급 가운데 무엇이 적절한 방식인지, 정부의 현금 지급이 코로나19로 침체된 경제에 구원투수가 될지 의견이 엇갈린다. 하지만 재난지원금이 일단 누군가의 숨통을 틔워주고, 시장에 활기를 불어넣은 것은 분명하다.
행정안전부 자료를 보면, 재난지원금은 5월11일~6월7일 총 2160만 가구에 13조5908억원이 지급됐다. 전체 가구(2171만 가구)의 99.5%에 이른다. 이 돈은 어디서, 어떻게 쓰이고 있을까? 코로나19로 힘든 시기를 보내는 사회구성원에게 이 돈은 어떤 의미일까? 재난지원금은 한 달 동안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계속되는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한겨레21>은 6월1일부터 9일까지 재난지원금을 받은 10명을 만났다.
바이러스는 사람을 가리지 않고 공격하지만 그로 인한 고통은 사람마다 다르다. 재난지원금 쓰임새 역시 각자의 사정에 따라 변주한다.
경기도 성남에 사는 1인가구 하진복(73·가명)씨는 동네 쌀집에 달아뒀던 외상 6만원부터 갚았다. 그는 정부에서 37만4천원(1인가구는 40만원이나, 지방자치단체별로 지급액이 다름)을 받고 경기도·성남시에서도 20만원을 받았다. 기초연금 외에 별다른 수입이 없는 그에게 재난지원금은 ‘생계비’가 됐다. “4월 중순, 단골 가게에서 쌀을 샀는데 다 떨어져서요. 재난지원금 나오면 갚는다고 외상으로 했죠. 5월에 재난지원금을 받고 바로 쌀집에 가서 갚았어요.”
외상 쌀값을 갚은 뒤에는 ‘상하지 않고 오래 두고 쓸 수 있는’ 물건으로 소비를 돌렸다. “여름이불이 10년 된 거라, 여름이불을 6만원 주고 샀어요. 화장지, 물비누, 커피, 섬유유연제… 생필품도 샀지. 상하지 않고 오래 두고 쓸 수 있는 거, 대개 그런 거 샀어요.”
필수품을 구매한 것은 제약회사 영업사원인 1인가구 신강현(31)씨도 마찬가지다. 그는 먼저 주유부터 했다. 코로나19로 사람들이 병원을 찾지 않아 영업 실적에 타격이 있었던 그는 예전보다 더 열심히 서울 시내 병원을 찾아다닌다. “주유하고 밖에서 밥을 사 먹다보니, 거의 다 썼어요. 돈을 쓰는 곳이 재난지원금으로 소비를 촉진해야 하는 업종인지 의문이 들기도 했지만 일단 필요한 데 써야죠.”
쌀, 자동차 정비, 학원비, 도마…
코로나19에 상대적으로 타격을 덜 입은 이들은 당장 필요하진 않지만 선뜻 지갑을 열지 못하던 곳에 돈을 썼다. 대기업에 다니는 홍수완(39)씨는 재난지원금을 받자 동네 자동차 정비소부터 찾았다. “미루고 있던 것에 다 쓰니까 금방이더라고요. 자동차 엔진오일과 브레이크 패드, 필터 등을 가는 데 30만원을 썼고 아이 학원비와 운동센터 등록비로 썼어요. 동네 음식점 가면 메뉴를 하나씩 더 시켰고요. ‘작은 플렉스(flex·돈 쓰는 것을 뽐낸다는 온라인 용어)’를 했다고나 할까요?”
평소 안경을 쓰고 다니던 전업주부 안혜경(32)씨는 콘택트렌즈와 렌즈 세척액을 손에 넣었다. “렌즈는 자주 바꿔줘야 해서 비용이 부담돼 잘 안 썼거든요. 안경을 계속 써도 일상생활엔 문제가 없지만, 안경에서 해방되니까 좋더라고요.” 대기업에 다니는 남편과 함께 60만원을 받은 혜경씨는 재난지원금을 아껴뒀다. “7월 남편 생일 때 초밥을 먹으려고 해요. 남편이 자전거에 빠져 있는데 자전거용 운동화도 사주려고요. 평소에 아깝다는 생각이 들던 것을 사는 게 추억에도 남고 좋을 거 같아요.”
건물 청소를 하는 김연자(65)씨는 재난지원금을 받자마자 동네 가게에서 도마와 국자부터 샀다. “집에 있는 도마가 오래돼 끝부분에 곰팡이가 생겨서… 예전부터 사야지 미루다가 이번에 샀어요.”
6월10일 행정안전부가 8개 카드사의 5월11∼31일 신용·체크카드 긴급재난지원금 사용 현황을 분석한 결과, 신용·체크카드 재난지원금 사용액(5조6763억원) 가운데 가장 사용액이 큰 업종은 대중음식점(카페·패스트푸드 포함)으로 집계됐다. 전체 사용액의 24.8%에 해당하는 1조4042억원이 음식점에서 소비됐다. 그다음은 마트·식료품점 1조3772억원(24.2%)으로 많았고, 병원·약국에서도 5904억원(10.4%)이 쓰였다. 주유 3049억원(5.4%), 의류·잡화 3003억원(5.3%), 편의점 2596억원(4.6%), 학원 2048억원(3.6%), 헬스·이미용 1796억원(3.2%), 여가·레저 1672억원(2.9%) 등이 뒤를 이었다.
“대면 소비로 사회 연대 확인”
사용처는 천차만별이었지만 돈을 쓰는 이들은 자연스레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하는 소비가 동네와 지역에 힘을 보탤 것이다.’ 재난지원금 소비는 코로나19로 고통을 겪는 다른 사회구성원에게 자연스레 눈을 돌리는 계기가 됐다.
대기업을 다니는 맞벌이부부 이연우(32)씨는 평소 온라인쇼핑을 주로 이용했지만, 재난지원금을 받자 동네 시장으로 향했다. “이수역에 남성사계시장이란 곳이 있는데, 시장에서 돼지고기와 소고기 8만원어치를 사고, 꽈배기를 사 먹었어요. 어차피 세금을 내서 돌아오는 돈이니 정부 정책 목적에 맞게 시장 소상공인에게 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앞으로도 최대한 시장에서 장 볼때 사용할 거예요.”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유주명(33)씨는 코로나19 이후 월급이 20%가량 줄었다. 회사에서 사흘에 한 번씩 무급 휴업을 권고했기 때문이다. 이 경험을 계기로 그는 지역 공동체에 관심을 갖게 됐다. 재난지원금을 받자마자 동네 시장의 정육점과 채소가게에 장부를 달았다. 남편과 둘이 사는 그는 재난지원금 60만원으로 정육점에 30만원, 채소가게에 10만원 선결제를 한 뒤, 장부에 결제 내역을 쓰고 차감하는 방식을 택했다. “남편이 정육점, 채소가게, 동네 서점에 삼등분하자고 했어요. 그런데 집 근처 서점은 규모가 크고 장사도 꽤 잘되는 듯해 제외했습니다. 선결제하겠다고 하니 정육점과 채소가게 사장님이 무척 좋아하셨어요.”
그는 재난지원금으로 인한 ‘대면 소비’가 “사회구성원 간 연대를 확인시켜주는 것 같다”고도 말했다. “(사람을 상대하는) 길거리 가게가 (코로나19로) 생계가 어렵잖아요. 소비자는 불편하지만 온라인쇼핑에선 재난지원금을 쓸 수 없도록 한 것은 잘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일부 대형마트나 고가 매장 등에서 재난지원금을 사용할 수 있다는 비판이 나왔지만, 대부분 정부 의도대로 중소 자영업으로 흘러간 것으로 보인다. 행정안전부 자료를 보면, 카드 충전 형태 재난지원금 사용액의 64%인 3조6200억원이 연매출 30억원 이하 중소 신용카드 가맹점에서 쓰였다. 연매출 3억원 이하 영세 가맹점에서 쓰인 금액은 1조4693억원으로, 충전금 전체 사용액의 26%를 차지했다. 또 8개 카드사의 전통시장 매출액도 5월 넷째 주 3243억원을 기록해, 5월 첫째 주보다 20%가량 늘었다.
세금을 내지만 피부로 와닿는 복지를 경험하지 못한 이들에게 현금성 복지는 나를 보살펴주는 ‘구체적 존재’로서의 국가를 체감하도록 했다. 서울의 한 대학교에서 시간강사로 일하는 유혜영(35)씨가 말했다. “세금은 일종의 사회안전망, 울타리로 공동체를 위해 필요한 부분이지만 그동안 얼마나 정당하게 쓰이는지 크게 느낄 만한 부분이 없었어요. 이번에 세금이 공동체를 위해 제대로 쓰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적이 없다보니 국가에 고마운 마음이 들기도 하더라고요.” 김연자씨도 “세금을 허투루 낸 게 아니구나, 국민의 의무를 다했더니 이렇게 돌아오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예전에는 국민, 국가라는 개념이 추상적이었다면 지금은 생존공동체, 운명공동체 느낌이 있어요.”(대학 시간강사 박아무개(40)씨)
세대별 지급 기준에 “짜증”
정부가 전 국민에게 재난지원금 지급을 결정하며 고소득자의 ‘기부’를 권했지만, 실제 기부액은 약 6500억원(전체 지급액의 약 0.5%)에 그칠 것으로 추정된다. 고소득자는 아니지만 공동체와 연대하는 마음으로 재난지원금을 나누는 이들이 있다.
초등학교 방과후 수업 강사인 허정연(46)씨는 2월 말부터 수업이 없다. 언제 개학할지 몰라서 다른 아르바이트도 하지 못한다. 최근 초등학교에서 방역 도우미 일자리를 구했지만, 월수입은 코로나 이전의 20% 수준이다. 그럼에도 허씨는 재난지원금 60만원 가운데 소액을 지정 기부하려 한다. “재난지원금으로 소고기 판매량이 늘었다는데, 한편으로 속상하더라고요. 제가 오지랖이 넓어서 그런지 당장 쌀을 사야 할 분이 눈에 먼저 들어왔어요.” 그가 주변을 둘러보게 된 것은 코로나19로 방과후 수업 강사 같은 특수고용직 노동자의 처지가 명확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방과후 교사의 절반 정도는 가장이에요. 다들 개학이 여러 차례 미뤄지면서 힘들어했어요. 코로나19 사태로 제 위치가, 신분이 뭘까 의문이 들더라고요. 저처럼 방과후 교사들은 업체에 소속돼, 학교 의뢰를 받아서 수업하거든요. 실업급여가 나오는 정규직이 부럽죠. 학교에서 일하기 때문에 교사의 품격을 요구받으면서도, 이런 재난이 닥쳤을 때는 아무런 혜택을 받을 수 없더라고요.” 그는 “재난지원금은 비빌 언덕조차 없는 이들에겐 마지막 비빌 언덕 같다”며 ‘언덕’을 다른 이들과 나누겠다고 했다.
그럼에도 ‘세대별 지급’이란 낡은 기준에는 다들 아쉬움을 표했다. 남편의 카드로 들어온 지원금을 같이 쓰는 유주명씨는 “받는 건 2020년처럼 받았는데, 1970년처럼 써야 하는 것이 짜증 났다. 세금은 각자 내는데 세대주에게 몰아주는 건 가부장적 사고 아니냐”고 꼬집었다. 게다가 이혼소송 중이거나 같이 살지 않는 세대원은 지원금을 받을 수도 없다. 서류로 가정불화를 명확하게 증명하지 못하면 지원금을 나눠받기 어려운 탓이다. 5월31일까지 행정안전부에 들어온 이의신청은 26만 건이 넘는다. 또 가족 울타리와 행정 체계 바깥에 있는 노숙인도 ‘거주 불명자’라는 이유로 지원에서 제외돼 논란이 일었다.
소득과 상관없이 전 국민에게 재난지원금이 지급된 경험은 지난 몇 년간 지방자치단체에서 불을 지피기 시작한 기본소득제 도입 필요성 논의로 한 걸음 나아간다. 전업주부인 민경원(33)씨는 재난지원금을 계기로 기본소득제 도입에 찬성하게 됐다. “재난지원금을 70%만 줄지, 전 국민에게 줄지 논란이 있었을 때 전 70%만 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받고 보니 생각이 바뀌었어요. 내 소비가 내 공동체와 사회를 낫게 한다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그러면서 기본소득제 도입에도 찬성하게 됐어요. 가난하고 병든 자만 국가의 돈을 받을 수 있다는 인식이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국가 재정 부담 걱정은 한마음
반면 이연우씨는 기본소득제 도입이 여전히 ‘시기상조’라고 생각한다. “복지 차원의 기본소득이라면, 인구 고령화로 인한 세수 부족 발생을 먼저 논의하고 세수 증진 방법부터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직은 아닙니다.” 인터뷰한 이들은 재난지원금 추가 지급이나 기본소득 도입에 긍정적 평가를 하면서도 대부분 ‘나랏빚’ ‘국가 재정 부담’에 대해 걱정했다. “(국가 재정이) 적자인데 또 주면 어떡해.”(김연자씨) “그 정도 감당할 수 있는 (국가) 재정 상태인지 모르겠어요.”(홍수완씨)
재난지원금 지급이 2차, 3차로 이어질지 기본소득제 도입 논의로 확산될지는 미지수다. 중요한 건 코로나19와 재난지원금이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게 무엇이냐는 질문을 우리 사회에 던졌다는 사실이다. “재난과 위험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지 않다는 것을 이번에 느꼈어요. 이번 기회에 우리 주변을 더 살펴보고, 고민하는 계기가 됐으면 해요. ‘인간다움’에 대해, ‘인간다운 삶’의 조건에 대해 우리 사회가 생각했으면 해요.”(유혜영씨)
신지민 기자 godjimin@hani.co.kr·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이승환, ‘구미 사태’ 후 공연 요청 줄이어…“7월까지 ‘헤븐’ 투어”
[단독] 입법조사처 ‘한덕수, 총리 직무로 탄핵하면 151명이 정족수’
[단독] ‘총선 전 계엄’ 윤석열 발언 당일 신원식, 김용현 불러 대책 논의
‘내란 비선’ 노상원 수첩에 정치인·언론인 ‘사살’ 표현 있었다
대만 전자산업노조 “삼성 반도체 경쟁력 부족은 근로시간 아닌 기업무능 탓”
북 충돌 빌미로 계엄 노린 듯…노상원 수첩엔 ‘NLL서 공격 유도’
[단독] 윤석열, 3월 말 “조만간 계엄”…국방장관·국정원장·경호처장에 밝혀
세계서 가장 높이나는 새, ‘줄기러기’가 한국에 오다니
12월 24일 한겨레 그림판
윤석열 쪽 “엄연한 대통령인데, 밀폐 공간에서 수사 받으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