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장에 쓸 말이 없다는 건 어쩌면 삶이 아주 안정적인 궤도에 올랐음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지금의 행복이 너무도 특별하여 기록하는 것마저도 새어나갈까봐 두려운 마음인지도. 그리고 지금, 2020년 3월31일 화요일 오전 9시29분에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은, 삶이 제대로 예상에서 이탈하고 있다는 뜻이다.”
일어나자마자 정확히 8시3분에 아침 식사를 한 후 무얼 해야 할지 모르던 3월31일 화요일 아침에 쓰기 시작한 일기는 이렇게 서두를 연다. 이틀 전, 일요일 밤에 나는 오랜만에 다이어리를 꺼냈다. 성실하게 쓰기로 마음먹었지만 일주일 이상 하얀 빈칸이 지속되던 다이어리를. 다음날인 월요일은 병원 외래진료가 예약됐다. 병원에 다녀온 뒤 세워놓은 계획에 맞춰 시간을 알차게 보내보자는 생각이었다. 수학 문제집 두 권을 조금씩 풀고 영어 문법을 약간 정리하겠다는, 약소한 학습 계획을 세웠다. 계획을 세우는 순간 이전 공백이 외면할 수조차 없도록 드러나지만, 계획을 세우려는 마음을 먹은 나를 기특하다 위로하면서.
월요일 아침이 밝았다. 일찍 일어나 집에서 출발했다. 오전에 혈액 검사를 해놓고 조금 이른 점심을 먹었다. 점심 메뉴도 아주 계획적으로 골랐는데, 먹고 싶었던 우동이다. 그러나 이후 계획대로 흘러가는 일이 없을 거라는 전조였을까, 우동은 기대보다 단맛이 강했다. 다시 병원으로 들어가서 의사 선생님 한 분에게 진료를 보았다. 다시 두어 시간 대기한 뒤, 마지막 진료실에 들어갔다. 마지막 진료가 끝나고 나는 집에 전화를 걸었다. 병원에서 나와 집에 가는 건 맞는데, 귀가일이 월요일이 아니게 되었다. 검사 결과가 좋지 않았고, 의사 선생님은 당장 오늘 입원해서 집중치료를 받는 게 좋겠다고 했다.
“너를 위해 병상을 마련해놓았단다.”
그렇게 된 것이었다. 한 시간 뒤 나는 환자복을 입고 7인실 침대에 앉아 있었다. 동행한 아빠도 나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많이 당혹했다. 계획이 완전히 어그러진 것도 실망스러웠다. 그러나 나쁜 것만도 아니라고 여기기로 했다. 일이 계획에서 벗어나는 게 내 잘못이 아니었고, 병원처럼 내가 ‘일상’이라고 여기던 데서 완전히 동떨어진 곳에 있다보면 끊임없이 새로운 자극을 마주해서 들이쉬는 먼지 하나에도 깜짝 놀랄 만큼 기발한 생각을 떠올리게 될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이런 식으로, 그렇게 적극적인 태도는 아니더라도 최대한 긍정적으로 지내려고 노력했다. 그럼에도 면회객이 전면 금지돼 보호자 한 명만 상주할 수 있는 병실은 쓸쓸했다. 주변 아픈 사람들의 분위기도 침울했다.
나는 병원에 일주일 있으면서 끊임없이 집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퇴원 날짜가 하루 늦춰져 목요일이 아닌 금요일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기약 없는 게 아님에도 그날 종일 축 처져 있었다. 그래서 하루에 네 번, 6시간마다 혈압을 재고 약을 주러 오는 간호사 선생님들, 언제 퇴근하는지 알 수 없는 주치의 선생님, 하루 두 번 회진 오는 지정의 교수님을 보면서 놀랍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그렇게 열성적일 수 있을까. 어떻게 연고도 없는 사람들에게 헌신적일 수 있을까. 계획대로 흘러가는 게 적어 보이는 이런 공간에서 일하며, 최소한 겉으로나마 우울해 보이지 않을 수 있을까. 퇴원하는 날, 이런 내 물음에 일주일 내내 하루에 두세 번 만났던 주치의 선생님은 “건강하게 나아서 나가는 모습을 보면 좋고, 내가 선택한 일이니까”라고 대답했다.
퇴원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밝은색 벚꽃이 무리지어 피어 있었다. 개화와 만개는 짧다. 벚꽃이 피기까지 긴 시간 동안 벚나무는 존재감이 덜하다. 그것은 벚나무의 선택일까. 벚나무는 건강하게 피어난 벚꽃을 보면 즐거울까. 화려하지 않고 조용한 벚나무의 성실함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신채윤 학생
*‘노랑클로버’는 희귀병 ‘다카야스동맥염’을 앓고 있는 학생의 투병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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