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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설동 농부는 왜 점 찍기까지 팔을 떨까

외할아버지가 하지 감자와 함께 보낸 일필휘지 시를 보며 든 생각
등록 2022-07-12 15:19 수정 2022-07-13 02:41
일러스트레이션 제천간디학교 이담

일러스트레이션 제천간디학교 이담

한참 비가 내린 뒤에 구름 틈새로 햇살이 조각조각 내려앉았다. 학교 건물 뒤편에서 운동장으로 나 있는 완만한 내리막길에는 빗물이 조그맣게 개울 지어 흘렀다. 보도블록이 개울물에 새끼줄처럼 꼬인 무늬를 만들어냈다. 길옆에는 언덕으로 시작되는 산이 있다. 산과 길의 경계에는 바위가 담처럼 쌓여 있다. 바위틈으로도 작은 폭포처럼 물이 흘러내렸는데 그 사이에 있던 거미줄에 물이 맺혔다. 은실에 매달린 구슬 같았다. 원래라면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비 온 뒤 아름다운 모습으로 드러났다. 오랫동안 그것들을 바라보다가, 뒷걸음쳐서 물웅덩이에 양말이 젖는 줄도 몰랐다. 휴대전화를 들고 가지 않아 사진으로 남길 수 없었다. 기억하기 위해서는 오래오래 보는 수밖에 없었다.

비록 며칠째 습하기만 한 나날이었지만, 장마가 시작됐다고 한다. 학교에서는 친구들이 내 우산 가져간 사람이 누구냐며 성내고 마른날이 이어지던 학교 연못에는 모처럼 물이 불어나 콸콸 흐른다. 장마 온 뒤 맑아진 물을 좋아한다.

지난해보다는 일찍 매미가 우는 것 같다. 무더위도 일찍 시작된 것 같다. 기후변화로 실제 그런 건지 기분 탓인지 모르겠다. 여름 시기를 측정하는 것은 매양 낯설다. 그래서 24절기가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 매년 날씨가 똑같지만은 않아서. 그리고 여름의 상징인 하지 감자와 옥수수를 빼놓을 수 없다.

강원도 원주에서 작게 농사지으시는 외할아버지께서 하지 감자를 보내주셨다. 감자와 함께 온 한지에는 서예를 하시는 할아버지의 시(時)가 일필휘지로 쓰여 있었다. “壬寅(임인)/ 춘분에 감자 심고/ 입하엔 꽃도 보고/ 하지에 캔 농심입니다/ 맛있게 드십시오/ 관설동 농부 드림” 할아버지의 서예는 그야말로 온 가족의 자랑거리여서, 예전에 내가 ‘나이 들면 시골에 가서 글씨나 쓰며 살고 싶다’고 말했다가 엄마한테 글씨 쓰는 일을 가벼이 보지 말라고 혼나기도 했다.

외갓집에 가면 할아버지께서 글씨 쓰시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할아버지는 식사 때가 되어 불러드리기 전까지 글씨를 쓰실 때가 많다. 잘 쓴 글씨인지 못 쓴 글씨인지 내가 감히 구분할 안목은 못 되지만, 숱하게 수상도 하신 할아버지는 언제나 진지한 얼굴로 글씨를 쓰신다. 붓을 들어 종이에 점을 찍기까지, 떨리는 할아버지의 팔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종이에 번지는 먹이 아스팔트를 검게 칠하는 빗방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팔을 떠신 이유가 긴장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정말 긴장하셔서 떨렸을 수도 있지만, 매 순간 다시 떨릴 만큼 할아버지에게 서예가 각별하다는 해석이 될 수도 있지만, 나는 근육통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농사도 하시고, 서예도 하시고, 성당 관련 일도 하시고, 내가 아는 것만 이만큼으로 시간을 쪼개어 사시는 할아버지다. 할아버지는 내가 꽤 어렸을 때 위암을 앓으셔서 위를 절제했다. 꾸준한 운동으로 비교적 건강을 유지하시는 할아버지지만, 아픈 사람으로서 남는 아쉬움도 있을 거다. 존경받을 만한 일상의 영위에 그런 것이 미세한 팔 떨림으로 드러나는 게 아닐까? 오랫동안 서서 서예를 하겠다는 의지, 부지런하고 규칙적으로 살아내겠다는 의지의 반향 같은 것으로 말이다.

내 책을 냈을 때 할아버지의 전화를 받았다. 많은 축하의 말 가운데서도 마냥 축하할 수 없다던 할아버지의 말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걸 쓰느라 얼마나 힘들었냐. 책 한 권으로 그 시간이 다 담아지겠냐”고 하셨다. 지난여름 할아버지 댁에 머무르면서, 내가 아파서 포기해야 했던 많은 것에 대해 고민할 때 할아버지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것으로 얻는 게 있다고 하신 것도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할아버지가 많은 것을 아시고 많은 것에 신중하신 까닭이 오래되고 험난한 시간을 헤쳐왔기 때문이라는 걸 아는 까닭이다.

신채윤 고3 학생·<그림을 좋아하고 병이 있어> 저자

*노랑클로버: 희귀병 ‘다카야스동맥염’을 앓고 있는 학생의 투병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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