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에 썼던 학습지 위에 커터칼로 연필을 깎았다. 대패로 깎은 것처럼 밀려나온 나무가 종이에 눈처럼 내려 쌓였다. 날리는 먼지에 재채기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톱밥이 고요히 쌓인 모습은 흰 눈 쌓인 밤처럼 가만히 바라봄 직한 모습이다. 하지만 쌓인 장소가 책상 위 얇은 학습지 한 장이라면 오랫동안 두고 보기에는 난감하다. 문제집을 펼치고 노트북을 당겼다가 밀고 하는 동안 가루가 날려 수습할 일이 걱정스럽게 될 것이다. 학습지를 휘어 얌전히 모인 연필의 조각들이 흩날리지 않게 모아 들고 쓰레기통으로 향했다. 나는 방에 쓰레기통 놓는 것을 싫어해서 쓰레기를 버리려면 방을 나와서 베란다나 부엌으로 가는 수고로움을 감수해야 한다.
우리 집 쓰레기통 중 뚜껑이 없는 것은 베란다에 있는데 정강이까지 오는 작은 검은색 통이다. 베란다의 세로폭이 좁아서 거실과 베란다의 경계에 있는 유리 미닫이문 문간에 앉아서도 충분히 손이 닿는다. 연필 부스러기를 버리고, 학습지를 탈탈 터는 짧은 시간 동안 고요하다면 집 안팎의 시공간이 분리된 듯한 기분이 든다. 그러나 고요는 잠깐이고 이내 배수구로 연결된 기둥을 타고 2층에서 엄마 아빠가 대화하는 소리가 들린다. 엄마가 ‘여보’ 하고 부르면 아빠가 ‘응’ 하고 대답하는 소리. 가끔은 아랫집 피아노 소리를 길어 올리던 그 기둥에는 비가 오는 날이면 불어난 냇가에 있는 것처럼 물이 세차게 흘러 내려가는 소리가 들린다. 하나의 기둥에도 날씨와 사람과 상황에 따라 들고 나는 소리가 이렇게나 다르다.
나는 이제 열아홉 살이고, 고등학교 졸업 뒤의 미래를 생각해야 한다. 열아홉 살까지 살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지금의 현재를 살 것을 정확히 알았던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번이 고등학생으로서 마지막 겨울방학이 될 텐데 나는 지난해와 똑같이 1월에 계획한 것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괴로워하고 있다. 이거야말로 스무 살이 된다고 선을 긋듯 어른이 되는 게 아님을 증명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스무 살의 일을 생각하면, 대학교에 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 대학교에 가는 것을 추천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생각난다. 그들의 말대로 하려면 올해는 아마 책상 앞을 떠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올해 대학교 입학 시험을 보려면 지금부터 공부하는 것은 이미 늦었다는 이야기도 많다. 실제로 나와 같은 나이의 친구들은 그런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중요한 것은 나에게 그럴 만한 체력도 없거니와 그러고 싶지도 않다는 것이다.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올해를 어떻게 보내야 할까? 숱한 우울과 무의미한 무기력이 아니라 올해의 방향성이야말로 지금 고민해야 할 가장 큰 과제다.
병은 호전세를 띠고 있다. 지난해 여름과 지금 수강할 수 있는 요가 수업의 강도가 다르다. 지금은 낮잠을 죽은 듯 자지 않아도 버틸 수 있는 날이 늘어가고 있다. 지난해 겨울에 비하면 우울감과 더 거리를 둘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이 모든 긍정적 신호가 달가우면서도 달갑지 않다. 병을 핑계로 미뤄뒀던 일들을 나중에 떠올리며 후회할 것 같다. 지금처럼 고통에 민감한 감수성을 유지할 수 없을 것 같다. 아, 그러나 이는 상황이 변화함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다. 변화는 누구에게나 두려운 일이다. 나는 제발 아무것도 변하지 않기를 바라며 똑같은 집에서 나만의 규칙을 고집스럽게 주장하고 있다.
겨울이 지나간다. 겨울은 사계절 중 가장 정적임을 표방하는 계절이다. 올겨울은 지난해보다는 추웠고 그 전보다는 온난했다. 날씨의 변화폭을 더하고 빼서 결국 평균의 기온을 구가하더라도 매일과 매해의 변화는 있는 것이다. 변화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방법을 강구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신채윤 고2 학생
*노랑클로버: 희귀병 ‘다카야스동맥염’을 앓고 있는 학생의 투병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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