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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건 신의 질투?

장기하의 <부럽지가 않어>를 학교에서 듣고
등록 2022-04-13 01:54 수정 2022-04-13 09:26
일러스트레이션 제천간디학교 이담

일러스트레이션 제천간디학교 이담

지난주 우리 학교에서는 장기하의 앨범 《공중부양》의 타이틀곡인 <부럽지가 않어>가 유행했다. 점심시간이나 쉬는 시간에 선생님, 학생 할 것 없이 각자의 노트북과 휴대전화로 이 노래를 듣는 이를 많이 볼 수 있었다. 어느 반의 누구가 이 노래를 그렇게 잘 부른다더라, 하는 이야기가 떠돌기도 했다.

다들 이 노래를 두고 ‘독특하다’ 하는데, 음악에 대해 잘 모르는 내가 듣기에도 새롭게 느껴진다. 나는 노래를 들을 때 가사에 집중해서 듣곤 한다. 이 노래의 가사는 굳이 자막을 보지 않아도 귀에 쏙쏙 들어와 꽂혔다. ‘너네 자랑하고 싶은 거 있으면 얼마든지 해/ 난 괜찮어/ 왜냐면 나는 부럽지가 않어’라는 가사가 몇 번이나 반복되는 후렴구가 매력적이었다.

‘부럽다’라는 말, 부러워하는 것은 질투로 변질되기 쉽다. 조선시대에는 ‘칠거지악’, 즉 경계해야 할 7개 악의 하나로 분류됐던 질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경계의 대상이었다.

12살 때, 할머니는 패키지 여행으로 나와 사촌 동생을 터키에 데려갔다. 터키 음식은 어린 나의 입맛에 맞지 않아 담백한 빵과 벌집째 나온 꿀을 주로 먹은 기억이 있다. 하지만 하얀 계단식 물웅덩이에 새파란 하늘이 비치던 파묵칼레의 석회 온천에 발을 담근 것, 카파도키아에서 열기구를 타고 하늘을 날던 것 등 소중히 간직한 추억도 있다. 그리고 그곳 어느 노점상에서든 볼 수 있던, 잔뜩 사가지고 와 주변에 나눠준 기념품을 종종 생각한다. ‘이블 아이’, 악마의 눈이라고도 부르는 나자르 본주우 액세서리.

주로 파란색을 띠는 눈 모양의 나자르 본주우 뜻에 관해서는 여러 속설이 있지만, 현지에서 긴 생머리의 여행 가이드가 설명해준 의미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터키에서는 타인의 질투가 자신에게 불행을 가져온다고 믿었기에 ‘질투를 막아주는 눈’ 나자르 본주우를 행운의 부적으로 지닌다고. 사람의 악한 감정이 얼마나 많은데 콕 집어 ‘질투’를 막아준다고 할까. 또 굳이 따지자면 질투의 감정이 힘들게 하는 것은 그 감정을 지닌 사람이 아닐까. 어린 마음에도 이런저런 추측을 하며 그 진의를 궁금해했다.

<부럽지가 않어>를 들으면서 다시 나자르 본주우에 대해 떠올렸다. 어쩌면 나자르 본주우는 자신의 질투를 막는 것일지 모른다. 동시에, 타인이 내게 하는 질투가 나를 행복하게 만들지 않으니 ‘좋은 일을 섣불리 자랑하지 말라’는 뜻을 가진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입 밖으로 드러내 자랑하지 않아도 나를 질투하는 사람은 생길 수 있다. 전혀 의도하지 않은 행동이라도 타인에게 어떻게 비칠지는 모르는 일이니까. 다른 사람의 질투로 인한 액운이야말로 샤머니즘적 부적에 기대지 않고는 막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터키 사람들이 ‘타인의 질투가 액운을 부른다’고 믿었던 것은 혹시 나쁜 일을 당한 사람을 위로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넌 잘못이 없고, 이 모든 건 남이 질투할 만큼 네가 뛰어났기 때문에 온 액운인 거야. <부럽지가 않어>라는 노래와 터키의 나자르 본주우를 지나치게 내 멋대로 해석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기치 못한, 인과가 없다고 느껴지는 일을 당한 사람, 이를테면 아픈 사람들에게 ‘당신에겐 잘못이 없다’는 위로가 어떻게 다가갈지 생각해보면, 역시 이런 생각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아무리 병이 잘잘못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그런 말 한마디가 절실할 때가 있는 법이니까.

신채윤 고3 학생

*노랑클로버: 희귀병 ‘다카야스동맥염’을 앓고 있는 학생의 투병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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