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이다. 여름의 중간이고, 큰 여름이고, 거센 여름이다. 고등학교에서 여름 한 철 한 달짜리 방학을 주는 건 왜일까? 아픈 나만 지친 것이 아니기 때문일까? 선생님은, 친구들은 한여름을 얼마만큼의 에너지로 나고 있을까.
얼음정수기에서 밤새 얼음이 달그락달그락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정수기가 ‘띵’ 하고 울리면 컵으로 시원한 물이 떨어진다. 시원한 물과 얼음을 거의 항상 가까이에 두고 취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드물고 귀한 일인가. 낮에 물과 얼음을 하도 많이 빼 먹어서 밤이 돼야 만빙(滿氷)과 만수(滿水)의 노란 불빛을 볼 수 있다. 가득 찰 만(滿)에, 얼음 빙(氷)과 물 수(水). 그렇게 가득 채워지는 일이, 그렇게 될 능력이, 나에게도 있었으면. 그러면 이 답답한 더위를 헤쳐나갈 힘이 생길 것만 같다.
습기와 더위를 견뎌내려고 다방면으로 노력하고 있다. 하루에 한 시간은 요가를, 체력이 가능한 날에는 한 시간 더 수영을 한다. 그리고 지난주 토요일에는 친구들과 함께 바다에 다녀왔다. 친구들이 바다를 보러 가자고 했던 오래전의 약속을 지켜준 것이다. 날짜를 잡았고, 버스 티켓을 예매했고, 어디를 볼지 대강의 얼개만 잡아놓고 새벽 6시에 길을 떠났다. 난생처음으로, 친구들과 함께 시외버스를 탔다. 창문에 코를 박고 바깥을 쳐다보고 이따금 졸기도 하는 친구들과 두 시간 반 동안 버스를 타고 강원도 강릉에 도착했다.
점심과 저녁 두 끼를 친구들과 함께 먹었고, 두 번 카페에 들렀고, 두 곳의 해변에 가서 오래도록 바다를 바라보고 이야기했다. 만약 하고자 했다면 선교장이나 오죽헌 같은 더 유명한 곳에 들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바다를 보고 카페에 가서 새로운 도전을 하는 소소한 시간이, 만(滿)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를 많이 채워줬다. 소소하게, 우리 가족이 강릉에 갈 때면 들르곤 하는 초당의 순두부 식당을 친구들이 좋아해줬다든가, 하지만 그곳에서 가자미식해 먹는 것에 도전할 엄두는 아직 내지 못했다든가 하는 이야기에 시간을 쓰는 건 쉽게 가질 수 없는 여유다. 충분히 채워진 정수기처럼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있게 해준다.
열아홉의 여름이다. 나이의 앞자리가 2로 바뀌기 전 마지막 여름을, 대부분의 친구는 채우기보다는 고갈될 때까지 사용하곤 한다. 누군가는 이 시기에 고3이고 또 누군가는 이 시기에 청춘이다. 두 단어 사이에는 도저히 메울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간극이 있다.
고3의 여름은 현세에 찌들고, 팔다리가 축 늘어질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책상에 오래 앉아 있는 시간이 대학의 당락을 결정한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심상이다. 반면 청춘의 여름은 어쩐지 푸르거나 붉은 원색으로 떠오른다. 청춘을 맞은 누군가는 두 팔을 활짝 벌려 젊음을 만끽하거나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열정적으로 달린다. 그러나 그 사이에는 두 곳 다에 속하지만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타협점이라고도 부를 법한 사람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나는 내가 그곳에 있다고 생각한다. 청춘이라기에는 다소 조용하고 무기력해 보일 수도 있고, 고3이라기에는 무계획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의 여름은, 한 학기 동안 비워낸 것을 충분히 채우는 데 사용되고 있다. 바다에 가서 물에 머리까지 담그거나 서로에게 물을 튀기지 않고도 충분히 즐길 방법을 찾는다. 가만히 앉거나 누워 파도 소리를 들으며 함께하거나 각자 존재했던 시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학기 중에는 하지 못했던 운동을 하고 읽지 못한 책을 읽는 것. 여름방학을 충실하게 보내고 있다.
신채윤 고3 학생·<그림을 좋아하고 병이 있어> 저자
*노랑클로버: 희귀병 ‘다카야스동맥염’을 앓고 있는 학생의 투병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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