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많고 머리가 번다할 때는 삶을 쪼개서 단위를 작게 만드는 일이 좋은 것 같다. 작은 것에 집중하고, 삶이 얼마나 작은 일들로 이뤄졌는지 아는 것.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엄마의 사랑을 알게 해주는 것은 잘 정리된 침대다. 나는 매일 아침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학교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선다. 요즘 날씨가 추워지면서 더 일어나기가 힘들다. 밥도 겨우 몇 술 뜨는 둥 마는 둥 하고, 휴대전화를 집에 놓고 다니기 일쑤다. 원래는 조금 더 꼼꼼한 성격이었던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잠시 해보지만 지금의 건망증과 허술한 생활 태도 앞에서 과거를 우상화하는 일만큼 의미 없는 것도 없다.
집에 돌아오면 깨끗하게 정리된 침대가 나를 기다린다. 아침에 출근하기도 바쁜 엄마가 나 대신 침대 정리를 해놓고 나가신다. 엄마는 나와 동생이 집에 돌아와 이불 속에 쏙 들어가면 좋을 듯해 정리해준다고 했다. 내가 직접 정리해야 하는데 죄송하면서도 감사하다. 단정하게 정리된 이불 속에 들어가는 일이 엄마가 나를 얼마나 생각하는지, 그 번잡한 아침에도 침대를 정리할 만큼 나에게 마음을 내주신다는 걸 알게 한다.
계절이 지나감을 알게 해주는 건 잘 말린 나뭇잎이다. 가을에 책 사이에 끼워넣은 단풍잎이 다 마를 때쯤 겨울이 온다. 내가 어릴 때 할아버지는 온전하게 떨어진 예쁜 나뭇잎을 주워 두꺼운 책 속에 끼워넣어 잘 말리는 법을 가르쳐주셨다. 지금도 가끔 두꺼운 책을 펼치면 할아버지와 함께 끼워넣은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질 때가 있다. 그러면 다음에 이 책을 꺼내들었을 때를 위해 다시 끼워넣는다. 올해는 수업 시간에 교재로 읽은 동서문화사판 <방법서설>이 알맞아 보여 단풍잎을 소중히 주워다 끼워놓았는데, 책을 눕히지 않고 세로로 꽂아뒀더니 단풍잎이 우글우글 말려 있었다. 속상하면서도 이제 그렇게 나뭇잎을 끼워놓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11월20일에는 다 끝난 김장에 숟가락을 얹으러 시골에 계신 할머니 댁에 갔다. 김장을 끝내고 할머니 댁과 산을 끼고 이웃한 이모할머니 댁에 들렀다. 빻은 원두에 끓는 물을 부어 커피를 내리고, 각종 차를 우리고, 세상에서 가장 예쁜 자수를 놓는 이모할머니다. 오랜만에 뵌 이모할머니는 캘리그래피와 펜드로잉을 시작하셨다. 모든 것을 새로 할 용기는 그런 이모할머니를 보는 데서 나온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할머니는 다육식물 화분 두 개와 수틀에 쓴 캘리그래피 작품 하나를 주셨다. ‘그럼에도 가을은 저편으로 가고 있다.’
어제는 친구 P와 노래방에 갔다. 그 친구와 노래방에 가는 건 처음인데 그것이 무색할 정도로 신나게 놀았다. 마지막에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을 목이 터져라 부르고 추임새도 넣었다. 다 아는 노래를 부르면서 왜 그리 신났는지 모르겠다. 친구와 노래를 공유하는 건 시절을 공유하는 것이므로, 다음에 이 노래를 들으면 친구와의 그때가 생각날 것을 알기에 노래에 책갈피를 끼워놓은 기분이 들었다.
이런 순간을 모으면 알알이 예쁜 목걸이를 만드는 것 같다. 뒤통수를 때리고 지나가는 큰일만 있다면 나는 충격의 고통 속에 하루하루를 헤매야 할 것이다. 내 정신을 붙잡게 해주는 것은, 기나긴 길을 견디게 해주는 이정표가 되는 것은, 이렇게 작은 일들이다. 작은 마음을 모아 모아 따뜻한 조각이불을 만들어 겨울을 나고 싶다.
신채윤 고3학생
*노랑클로버: 희귀병 ‘다카야스동맥염’을 앓고 있는 학생의 투병기입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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