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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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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하늘의 높이를 누가 재어보았나

병 때문에 놓쳤지만 이제는 할 수 있는 것들
등록 2022-10-26 07:18 수정 2023-02-02 02:44
일러스트레이션 제천간디학교 이담

일러스트레이션 제천간디학교 이담

사계절의 하늘을 모두 사진 찍어 비교해보면 정말 높이가 다른 것을 알 수 있을까? 푸른 가을 하늘은 언제나 높다고 느껴지는데 정말 봄, 여름, 겨울의 하늘과 다른지 궁금하다.

2022년 10월15일 토요일에는 엄마와 동생과 함께 오랜만에 자전거를 타고 서점에 다녀왔다. 탄천변에 줄지어 늘어선 갈대의 머릿결을 보고, 휘청거리며 선 코스모스 묶음도 봤다. 서점에는 여전히 내가 찾는 책 빼고 모든 책이 있었다. 물병에 싸간 물로 시원하게 목을 축이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내 자전거는 힘을 덜 들이고도 쉽게 나가는 전기자전거인데 동생의 자전거는 그렇지 않다. 속도 내는 걸 좋아하는 동생은 앞으로 쭉쭉 치고 나가면서도 누나가 힘들이지 않고 쫓아오는 것을 얄미워했다.

10월19일은 동생의 운동회가 있다. 이 글을 쓰는 날의 다음날이다. 동생은 지난주부터 잔뜩 기대했다. 청군과 백군 중 청군에 배정받았는데 운동회날 온통 파란색 옷을 입고 가겠다고 했다. 오늘은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친구와 둘이 큰 깃발을 만들었다. 친구가 철물점에서 얻어온 부러진 골프채에 파란색 도화지를 테이프로 이어 붙였다. 그러고는 엄마에게 부탁해 깃발 한가운데에 푸를 청(靑)을 크게 써넣었다. 내일 친구와 아침 8시30분에 만나 같이 들고 가기로 했단다. 동생은 “어머니, 저 내일 운동회 관계로 일찍 자도 될까요?” 하곤 수학 숙제도 하지 않고 잠들었다.

초등학교 때 운동회에 큰 기대를 걸지 않았던 나로서는 동생의 행동이 신기할 따름이다. 학교에서 나눠준 파란색 아대(손목보호대)를 몇 년 써먹은 것이 나의 유일한 응원도구였다. 그러나 돌이켜보니 올해 체육대회 때는 나도 만만치 않게 신났던 것 같다. 슈퍼마켓에 가서 버튼이 세 개나 있지만 같은 음밖에 나지 않는 플라스틱 나팔과, 흔들면 서로 부딪쳐 손뼉 소리가 나는 손바닥 모양 응원도구가 달린 비눗방울을 사갔다. 비눗방울은 친구들과 열심히 불고 결국 집에 돌아오지 못했지만 나팔은 동생에게 주어 동생이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것 같다. 코로나19로 3년간 못했던 한을 다 풀고야 말겠다는 듯, 동생과 나는 학교 축제에 ‘진심’이 됐다.

병 때문에 놓쳤지만 이제는 할 수 있게 된 것들을 생각한다. 얼마 전 학교 축제가 있던 날에는 꼬박 3년 만에 줄넘기를 했다. 그동안은 약 부작용으로 척추가 무너질 위험이 있어 최대한 자제했는데, 줄넘기를 오랜만에 하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원래 무척 싫어해서 줄넘기를 못하게 된 게 별로 아쉽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줄넘기 실력은 녹슬지 않아서 꽤 잘한 것 같아 뿌듯했다.

옷입기도 나에게는 그런 것 중 하나다. 이 역시 약 부작용으로 부은 몸에 적응하지 못해 포기한 일이었다. 부은 몸에는 그대로 어울리는 옷, 입고 싶은 옷을 찾아 입으면 되지만, 내가 미리 정해놓은 ‘몸의 모양’이라도 있었는지 나는 예쁜 옷을 포기하고 살아왔다. 변명하자면, 체형이 워낙 흔하지 않게 변해서 시중에 제대로 맞는 옷이 잘 없기도 했다. 이제는 부기가 빠지고 있지만 요즘 단것을 워낙 좋아해서 살이 쪘다. 건강을 위해 단것 섭취를 줄이지만, 살찐 몸에도 어울리는 옷을 찾아 입고, 내 몸을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 노력한다.

얼마간 그것을 잃는 경험은, 무언가를 정말 신나게 즐기게 할 수도 있다. 그 사실을 잊지 않으려 한다.

신채윤 고3학생

*노랑클로버: 희귀병 ‘다카야스동맥염’을 앓고 있는 학생의 투병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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