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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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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워질 때는 친구들 편지를 읽어”

앤 친구 다이애나, 내 친구 Y
등록 2020-03-07 23:46 수정 2020-05-03 04:29
일러스트레이션 제천간디학교 이담

일러스트레이션 제천간디학교 이담

얼마 전 친구 Y에게서 편지 한 통을 받았다. Y의 생일이었다.

Y가 내게 편지를 줬다. 손바닥 반만 한 크기의 갈색 봉투에 예쁜 인장으로 마감된, 예상치 못한 편지였다. 친구의 깨알 같은 글씨가 작은 편지지의 앞뒤 면을 가득가득 메우고 있었다.

Y가 날 위해 골라 담아준 따뜻한 말들 가운데서도 특히 내 마음을 직접 때린 건 “2019년 말 네가 가지고 있는 고민들이 굉장히 신경 쓰였다. 뭐라고 말하고는 싶은데 누군가에게 힘이 될 말을 고르기가 참 어렵더라”라는 말이었다. 몸이 병을 모르던 때부터 병이 몸을 서서히 잠식해갈 때, 생활의 리듬이 슬며시 망가지고 원하는 일을 원하는 만큼 해내지 못해 좌절하기 시작했을 때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나를 지켜봐온 친구다. 오랜 시간을 함께했으니 나를 잘 안다고 생각하고 여러 말을 늘어놓았을 법도 한데 힘이 될 말을 고르려 했다는 그 섬세함이 따뜻한 위로로 마음에 내려앉았다.

2~3년 전쯤 언니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기분이 낮게 침잠해 있던 밤이었다. 그러나 옥상달빛의 노래 에 나오는 가사처럼 ‘나에게 실망한 하루’들 중 어떤 밤이었다. “내가 너무 초라해”라고 말하는 나에게 언니는, “나는 그럴 때는, 내가 미워질 때는 친구들이 써준 편지를 읽어”라고 말했다. 또 언니는 친구들이 자신의 어떤 점을 보고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지 자세히 써준 편지를 보고 힘을 얻는다고 덧붙였다. 내가 갓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였다. 나는 초등학교 생활을 하는 동안 친구들과의 관계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사람보다 책이 많은 정보를 주고, 책을 많이 읽고 성적이 좋으니 내가 또래 친구들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사회성이 부족했고 나 자신도 모르게 외로웠다. 그때, 언니와의 대화 끝자락에서, 나는 언니와 언니 친구들의 관계와 편지에 담은 선한 영향을 주는 말들이 부럽다고 생각했다.

그 대화가 결정적인 계기가 된 건 아니었지만 중학교 때의 나는 초등학교 때보다 ‘사람들’에게 집중했다. 인간관계를 맺는 것에 대한 고민이 흘러간 시간의 틈새마다 알알이 박혀 있다. 고민이 내게 남겨준 것은 내 모습을 애정 담아 관찰한 뒤 개성 가득한 문체로 편지를 써주는 친구들이다. 그것 하나만 보고서도 나는 내 중학교 3년이 성공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Y의 편지는 3년 동안 공들여서 고민한 나의 시간이 낳은 더할 나위 없는 산물이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 사람에게 상처를 받지만 사람으로 치유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가능하면 서로 행복한 상태에 머무르기 위해서, 가장 안전하게 마음을 보호하기 위해서 관계에 대해 고민하는 것을 멈춰서는 안 된다. 나는 언니가 가진 관계가 부러워서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 갖고 관계를 맺는 것에 신경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고민에서 내가 알게 된 것, 관계에 대해 생각하는 것에 지치지 않기 위해 기억해야겠다고 결심했던 것이 있다. 다른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나를 중심으로 맺어지는 관계를 비교하지 않는 것. 세상에 완벽히 똑같은 관계는 없다는 것을 알고, 관계들의 다름에 지치지 않기로 했다. 언니가 친구들이 보낸 편지에서 위로받은 부분과 내가 Y로부터 위로받은 부분에는 차이가 있다. 그것은 내가 언니가 아니고, Y 또한 언니 친구와는 다른 세계를 구축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런 것이다. 앤이 아니기에 다이애나를 만날 수 없는 것, 웬디가 아니기에 피터팬을 만날 수 없는 것, 해리 포터가 아니기에 론 위즐리를 만날 수 없는 것. 내가 Y를 만났고, 내가 Y와의 관계를 지속해서 고민하는 것이다.

신채윤 학생*‘노랑클로버’는 희귀병 ‘다카야스동맥염’을 앓고 있는 학생의 투병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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