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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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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얼굴이 있는 이야기

발달장애 자녀 둔 어머니들의 삶을 기록한 인권활동가들
등록 2016-05-04 10:54 수정 2020-05-02 19:28

문(紋). 무늬, 결. 문(文)의 뿌리는 문(紋). 본디 무늬와 글은 하나다. 그러므로 글은 무늬를 잡아채야 한다. 그러지 못하는 글은 추상의 낭떠러지로 곧잘 추락한다. 허황한 요설이 대개 그러하다. 글은 사람의 무늬여야 한다.

여기 글의 힘, 무늬와 결을 온전히 담은 기록의 힘을 믿는 사람들이 있다. 인권기록활동네트워크 ‘소리’. 몇몇 인권활동가들이 2014년 10월 모였다. “기록은 종이 위에 남겨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입과 손과 발을 통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사회 구성원의 삶 속에서 되새겨질 때 비로소 그 의미를 가진다.” 이들이 뭉친 이유다. ‘소리’ 사람들이 “사회적 소수자의 삶이 ‘들리는 소리’가 되도록 긴 호흡으로” 만든 첫 책이 나왔다. (오월의봄 펴냄). 발달장애 자녀를 둔 ‘여성’ 16명의 이야기다. 전국장애인부모연대와 함께 기획했다.

“왜 이 어머니들은 발달장애인 자녀의 이야기를 넘어서 ‘자신의 삶’에 대한 목소리를 낼 기회를 가지지 못하는 것일까. 우리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여기에서 출발한다.”(책 ‘들어가는 말’) 책의 기획 의도다. 발달장애는 지적장애와 자폐성장애를 아우르는 말이다. 현재 발달장애인은 20만 명에 이른다.

“소수자의 삶이 ‘들리는 소리’ 되도록”
<그래, 엄마야>에 실린 한 삽화. 카푸치노 거품 위 아이와 집. 찻잔을 힘껏 쥔 엄마의 손. 조그만 파문에도 거품 위 아이와 집이 위태롭다. 발달장애 자녀를 둔 엄마들의 무거운 현실이다. 일러스트레이션 이선일

<그래, 엄마야>에 실린 한 삽화. 카푸치노 거품 위 아이와 집. 찻잔을 힘껏 쥔 엄마의 손. 조그만 파문에도 거품 위 아이와 집이 위태롭다. 발달장애 자녀를 둔 엄마들의 무거운 현실이다. 일러스트레이션 이선일

4월28일 서울역에서 책의 필자인 인권활동가 6명 가운데 3명을 만났다. 책을 준비한 계기, 만남의 소회, 활동 계획, 사회·제도적 문제점 등을 두루 들었다. “투박하더라도 가필하지 않고 그 사람의 목소리로 전달한다”는 게 인권기록활동네트워크 ‘소리’의 구술 기록 원칙이다.

정주연_ 48·인권교육센터 ‘들’

엄마들 탓 아니에요

“정책보다 더 중요한 건 지역에서 발달장애인들이 촘촘하게 비장애인들과 같이 살 수 있게 만드는 거다. 우리나라에서는 이게 안 된다. (장애인 복지) 시설을 찾아갈 때마다 산 너머 산 너머 격리돼 있다. 분리시키기만 하고 지역에서 못 살게 한다. 엄마들이 불행하다, 아니다가 중요한 게 아니라 교류관계가 끊어지는 데 있다. 불행이 아니라 이들이 (사람 사이) 관계에서 제한되느냐에 주목해야 한다.

책을 보고 위로받았다는 어머니들 연락을 받았다. 들어줄 사람이 필요한 사람한테 들어주는 자리와 사람이 있다면 좀더 인간적으로 살 수 있지 않을까. 상대가 있고, 인정하고 관계 맺을 수 있는 힘, 그게 인간의 존엄 아닐까. 이 엄마들은 거기서 배제돼 있다.

발달장애인들이 이번 4·13 총선을 앞두고 기자회견을 했다. 부모들만 나오다가 자녀들도 나오는 게 굉장히 의미 있다고 본다. 그분들이 손수 쓴 글씨로 기자회견문도 만들었다. 나는 이게 너무 좋았다. 라고 가사를 바꾼 노래도 만들었다. 이분들 얘기가 ‘선거공보물도 너무 어려워 투표할 수 없게 만든다’는 거다.

엄마들은 죄책감으로 먼저 (발달장애) 아이들을 만나는데, 아빠들의 출발은 안타까움이다. 감정의 출발이 다르다. 엄마는 더 얘기를 못하는 거다. 그분들한테 말해주고 싶었다. ‘엄마 탓 아니라고.’ 그분들 이야기를 들으러 갔지만, 꼭 말해주고 싶었다.”

3월29일 발달장애인들이 모인 한국피플퍼스트추진위원회는 선거권 보장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우리도 선거에 참여하고 싶다”고 외쳤다. 현실은 참담하다. 5월30일 임기가 시작되는 제20대 국회에 장애인들을 대표하는 비례대표 국회의원은 단 한 명도 없다.

명숙_ 46·인권운동사랑방

성인 된 발달장애인 지원 전무

“발달장애 하면 불쌍하다는 식으로 보지 말고, 구체적으로 삶의 결을 보아야 한다. 어떤 토양에서 어떤 햇빛을 받느냐에 따라 다른 거다. 타자화하는 게 아니라 공동체로서 손을 잡게 하는, 그런 기록을 하고 활동도 하려고 한다. 서로 만나는 지점을 찾는 게 공감이고 소통이다. 어두워지면 색깔이 안 보이지만 색깔은 다 있는 거 아닌가. 발달장애는 20만 가지 경우가 있다고 말한다. 행복하다, 불행하다 이렇게 단순하게 말할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성인이 된 발달장애인에 대한 지원은 아예 없다고 보면 된다. 엄마들을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거다. 사회적 편견도 깨져야 하지만 활동보조서비스, 교육센터, 작업장 등 사회적 지원도 필요하다. 한 엄마가 장애인 연금제도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신청하러 갔는데 심사를 새로 해야 한다는 거다. 결국 장애등급이 오히려 떨어져 연금도 못 받고 활동보조서비스 시간도 줄었다. 발달장애 특성에 맞게 맞춤형으로 가야 하는데 기본적인 서비스도 안 되고 있다. 정책뿐 아니라 ‘우리와 다르다’는 식의 배제에서 벗어나려는 지역 분위기가 됐으면 좋겠다.

이전에는 소수자 집단이 어떻게 국회에 구성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는 척이라도 했는데 지금은 그것도 아니다. 진보정당의 후퇴다. 씁쓸하다.

발달장애인들의 이야기는 대부분 아빠들 얘기였다. 이 책은 어머니, 여성에 초점을 뒀다. 엄마의 시선으로 본 발달장애 이야기다.”

박근혜 정부는 출범 직후인 2013년 4월 등급을 매겨 차별 지원하는 장애등급제 폐지를 약속했다. 그러나 지난해 5월 정부는 현행 6단계인 등급을 중증(1~3급), 경증(4~6급)으로 나눈다고 발표했다. 장애인단체들은 크게 반발했다. 지금도 장애인 감면·할인제는 크게 2단계(1~3급, 4~6급)로 운영되는 까닭이다. ‘눈 가리고 아웅’이다. 장애인들은 2012년 8월부터 서울 광화문역 지하 이동통로에서 장애등급제, 부양의무제 폐지를 요구하는 노숙농성을 1300일 넘게 하고 있다. 1988년 도입된 장애등급제는 ‘87년 체제’의 또 다른 그늘이다.

유해정_ 41·인권연구소 ‘창’

사람들한테 어떻게 전할까 고민

“인권단체 활동가들이 그동안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아왔는데 ‘시대 이슈’로 한정된 느낌이었다. 용산 참사도 그렇고, 밀양 투쟁도 그렇다. 우리가 기획해서 발굴하고 목소리를 전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사람들한테 회자되는 방식이 아니라 ‘이야기가 있는 얼굴’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인권기록활동네트워크 ‘소리’가 만들어졌다.

발달장애인이 20만 명이라고 하는데, 가구로 치면 최소 60만 명이다.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 아닌 사람이 없다. 해고 위협, 불안에 시달린다. 그런데 일상에서는 남의 얘기처럼 한다. 당사자는 될 수 없지만 그 엄마들을 만났을 때 곁을 지켜줄 수는 있는 것 아닌가. 때로 서먹하고 불편할지라도 공존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책은 이야기의 시작이다. 세상 사람들한테 어떻게 전할까 고민하고 있다. 책을 통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만남을 통해서 또 다른 변주를 어떻게 만들까 고민하는 것도 우리 활동의 하나다.

책에 나오는 엄마들은 굉장히 용기 있는 분들이다. 자기 삶을 날것으로 드러내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대부분 엄마들 실명을 썼다. 모두들 ‘한번은 맞닥뜨려야 할 문제, 남편·시부모 있어도 한번은 이야기하고 가야 할 문제’라고 생각했다.

아이를 낳았을 때, 발달장애라는 말을 들었을 때 엄마들은 어떤 마음이었는지, 보통 자녀들도 소통이 잘 안 되는데, 심지어 발달장애일 때 어땠을지, 엄마들 마음의 파동을 잘 못 담은 점은 아쉽다.”

‘소리’는 체온이 있는 기록

인터뷰 뒤 필자들은 말했다. “우리보다 책이 부각되게 해주세요. 우리의 공동작업이기도 하지만 엄마들과의 공동작업이기도 해요. 엄마들이 좀더 부각되게 해주세요.”

인권기록활동네트워크 ‘소리’는 ‘인권+기록+활동+네트워크’다. 언제까지나 인권의 관점에서, 저마다 다른 삶의 결을 담아 기록하고, 기록의 결과물을 같이 나누는 활동에 나서고, 더 많은 이들과 모이고 뭉쳐 연대하는 것. 그것이 이들이 바라는 ‘소리’, 체온이 있는 기록이다.

책  속  엄마들의  말,  삶,  시


인공지능보다  인지상정


“물풍선 같은 말/ 물기로 가득 차서/ 너에게 가 닿기 전/ 주르륵 흘러내리는/ 사랑이라는 그 말// 감정마저 학습하고 훈련해야만 하는/ 미어짐 속에서/ 나는 몇 번이나 말했을까/ 너는 몇 번이나 들었을까// 너의 조그만 입 사이/ 새어나온 풋콩 같았던/ 연둣빛 음절들/ 어 엄 마 아/ 사 롸 앙 해 요/ 와락/ 껴안을 수밖에 없었지” -양은영씨 자작시
“힘든 건 지나서 괜찮고, 네 탓이야 하는 건 오기가 생겨서 그런지 힘이 났어요, 지금부터 잘하면 되지. 정말 지지해주는 사람을 만나면 힘이 나고, 그 굽이굽이를 지나 지금 생각하면 이 말도 이런 식의 힘이었고, 저 말도 저런 식의 힘이었고… 근데 누군가 어깨를 두들겨주면 아직도 울컥 눈물이 나요.” -이념씨
“도자기를 만들고 운동하는 게 취미이자 오롯이 나를 위한 일이기도 해요. 무룡이 어렸을 때는 혼자 나가는 거 상상도 못했어요. 그러다 둘째 학부모 모임도 가고 조금 더 여유 있게 다른 사람들을 만나게 되니까 제 마음도 삶도 더 풍요로워졌다고 해야 하나. 내 시간이 없었다면 매일 우울하고 힘들었을 거 같아요. 또 내가 만든 걸 다른 사람한테 선물할 수 있어서 스스로에게 뿌듯함도 생기고. 내 상황에 적응하면서 그 안에서 작은 기쁨을 찾고 만들면서 그렇게 쭉 살고 싶어요.” -이상희씨
“얘를 끝까지 지켜줄 수 있을까? 내가 부자가 돼 돈을 유산으로 준다고 얘가 지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 호성이한테 주고 갈 수 있는 게 뭘까 생각해봤어요. 사회의 복지나 정책을 바꾸는 거예요. 사람들은 진보냐 보수냐를 이야기하면서 이걸 구분하는데 호성이가 사회에 나갔을 때 시설에 갇혀 사는 게 아니라 사회에서 밥벌이라도 하는 사람이 되게 하려면 엄마인 내가 좋은 환경을 만드는 수밖에 없더라고요.” -전향숙씨
사람들은 인공지능을 말한다. 절실한 것은 차라리 ‘인지상정’(人之常情) 아닐까.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는 마음. 그것은 결국 더불어 사는 마음이다. 장애와 비장애를 가르는 추악한 차별의 개울을 건널 ‘인지상정의 징검다리’를 놓는 마음, 내가 아닌 그를 위한 노둣돌을 놓는 마음.
전진식 기자


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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