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찬란했으나 황무지가 된 ‘푸른사막 아아루’

‘푸른사막 아아루’ 표지. 네이버웹툰 갈무리
인류에게 죽음과 소멸을 상징하는 계절은 오래도록 겨울이었지만, 이제 인류의 끝을 말하기에 적합한 계절은 아무래도 여름이 된 것 같다. 모든 것을 녹일 듯 작열하는 더위 속에서 에어컨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허술한 임시방편이고 결국 더 큰 더위를 부르며 상황을 악화한다. 다음달, 다음해, 앞으로 더 더워질 일만 남았다는 뉴스는 종말이 여름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깨달음에 확신을 더한다. 우울한 계절이다.
차마 드러낼 기력도 없어 은밀히 죽음을 기다리듯 품어온 감정에 이름이 있다는 걸 얼마 전에 알게 됐다. ‘솔라스탤지어’(Solastalgia). 탄광 개발로 고향이 파헤쳐지는 것을 지켜본 주민들의 고통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말이다. 떠나온 적 없으나 잃어버린 세계에 대한 상실감이다. 기후가 변하면서 생업을 잃거나 전과 같은 풍경을 볼 수 없게 됐을 때의 무력감도, 장마가 한 달씩 계속되는 속에서 느꼈던 올여름의 불길한 우울도, 넓게는 이 감정에 해당한다.

‘푸른사막 아아루’ 7화. 네이버웹툰 갈무리
‘푸른사막 아아루’(글·그림 달꽃, 네이버웹툰)는 왕녀 소티스가 행성 아아루의 예견된 멸망에 맞서는 이야기다. 숲은 사막으로 변하고 정령 대신 마수가 활개 치게 된 황량한 땅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세계가 망가진 채로, 멸망 직전에서 시작하는 판타지를 읽는 일은 괴롭고 쓸쓸하다. 한때 찬란히 존재했으나 이제는 잃어버린 세계이기 때문이다. 사라진 과거의 풍경이 장대하고 아름다울수록 그 괴로움과 쓸쓸함은 또렷해진다. ‘푸른사막 아아루’가 정확히 그런 작품이다. 이 작품을 읽을 때면, 망가진 계절을 견딜 때와 거의 같은 감정을 느낀다.
그도 그럴 것이 작품이 그려내는 행성 아아루는 너무도 직접적으로 지구를 연상시킨다. 지구와 아아루는 한때 푸르게 번영했으나 이제는 황무지가 되었다는 점에서, 어쩌면 그 끝이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노골적이라 해도 좋을 만큼 닮아 있다. 그 황폐화의 원인이 인간에게 있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사막화와 식수 부족, 기형적으로 변이된 생태계는 판타지 세계만의 사정이 아니고, 작품도 그런 은유를 숨길 생각은 없어 보인다.
물론 자연과 섭리로 치환되는 신의 세계와, 그에 필적하려는 인간의 대립 구도가 아주 특별한 것은 아니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대표작 ‘모노노케 히메’(1997)만 떠올려도, 섭리를 거스르는 인공에 의해 세계가 망가진다는 설정을 익숙하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식상할 정도로 익숙한 소재가 단지 장르 문법이나 은유에 머물지 않는 것은, 작품과 현실을 엮어 읽는 우리 시선이 점점 더 의미심장해지기 때문이다. 당장 ‘푸른사막 아아루’가 연재를 시작한 2017년과만 비교해도 작품이 건네는 실감이 이 정도는 아니었다. ‘모노노케 히메’가 개봉한 지난 세기의 끝자락은, 그 정도면 호시절이었다는 생각까지 든다. ‘그나마 나았던’ 시절은 빠르게 아득해지는 반면, 작품이 그리는 멸망의 때는 살갗에 닿을 듯이 선명해진다. 솔라스탤지어라고 이름 붙인 그 유감스러운 감정을, 판타지 안에서도 밖에서도 생생히 느끼게 됐다.
이 상실감을 한층 선명하게 하는 것은 아아루의 긴 역사를 네 세대에 걸쳐 풀어나가는 작품의 구조다. 아아루 멸망의 출발과 끝에는 마아트라는 가문이 관통하듯 놓여 있다. 마아트는 신에 필적하는 힘을 탐해 수많은 인간과 정령을 실험으로 희생시켰고, 그 부작용과 정령의 저주가 지금의 아아루를 만들었다. 만화는 황무지에서 나고 자라 한때 행성이 푸르렀다는 사실을 믿을 수조차 없게 된 후세대 소티스를 중심에 두고, 앞세대가 어떤 과오를 거쳐 여기까지 왔는지 층층이 거슬러 올라간다. 회상과 환상을 통해 전달되는 각 세대의 아름다웠던 풍경은 황량한 현재를 아는 이들에게 더 큰 안타까움으로 다가온다. 순정판타지 특유의 아름다운 작화와 섬세한 감정 묘사 역시 상실에 무게를 더한다.

‘푸른사막 아아루’ 16화. 네이버웹툰 갈무리

‘푸른사막 아아루’ 16화. 네이버웹툰 갈무리
소티스와 카라크, 뜻을 함께한 사람들은 아주 많은 것을 잃되 가장 소중한 것을 지켜낸다. 대가를 감수하며 벌여놓은 세계를 책임지는 결연한 태도와 그럼에도 소중한 것을 붙드는 끈기를 좋아한다. 성실한 판타지만이 보여줄 수 있는, 이야기를 완결하고 독자를 이해시키는 훌륭한 솜씨다. 하지만 허구의 이야기를 지탱하는 현실의 중력이 위태로울 정도로 강력할 때, 이야기 자체의 완결성에도 불구하고 메시지가 무력해지기도 한다. 소티스를 통해 보여준 용기와 희망이 실감되기엔, 우리가 사는 이 ‘푸른 행성’의 운명이 너무도 가혹해서다.
정령도 주술도 없는 판타지 밖 현실에서 ‘운명’ 같은 말을 쓴 것은, 지금 지구의 미래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이 그런 말로밖에는 설명되지 않는 탓이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상실감과 앞으로 잃을 것을 향한 두려움은 사람을 지치게 한다. 나는 지쳤다. 마비된 것 같기도 하다. 신의 손길도, 주술의 힘도 빌릴 수 없는 이 지극한 현실에서 우리가 과연 무엇을, 어떻게 희망할 수 있을까?
오히려 눈에 밟힌 것은 카나스였다. 카나스는 마아트 가문의 수장이자 카라크의 아버지로, 주인공들이 적대하는 악역이다. 그는 가문에서 전해 내려오는, 아아루를 파괴하는 실험을 위해 아주 많은 것을 희생시켰는데 사실은 카나스 본인 역시 학대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저주처럼 물려받은 운명과 병든 몸을 안은 채 그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아아루를 파괴해 이 모든 역사와 운명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자판에 몇 번이나 푸른사막이라는 말을 쓰면서, 문득 지구의 별명이 ‘푸른별’이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어릴 때 교과서나 표어에서 봤던 거로 기억되는, 그러나 이제는 어색하고 낯설어진 낡은 별명. 행성의 운명 앞에서, 그 운명과 맞서길 결심하는 소티스와 소멸을 통해 완전한 탈출을 기원하는 카나스 사이에 가늠할 수 없는 거리가 놓여 있다. 작품을 다 읽었음에도 저쪽으로 가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너무 많은 여름이 남았다.
최윤주 만화평론가
*현실 연애엔 무관심하면서도 로맨스 만화는 가세가 기울 만큼 읽어왔다. 그 경력을 살려 다양한 관점에서 로맨스 만화를 읽어보려 한다. 6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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