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4일 오후 <한겨레21> 회의실에서 황예랑 기자(오른쪽 두 번째)가 교육연수생 5명과 취재 뒷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진수 기자
비정규직은 낯익은 단어가 됐다. 비정규직 문제를 전면에 다룬 대중문화 상품도 등장했다. 지난해에는 영화 , 만화와 드라마 이 인기를 끌었으며, 웹툰 도 곧 드라마로 재탄생된다.
언론이 재현하는 비정규직은 어떨까. 숫자이거나 시위자, 혹은 안타까운 사례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지난 3월 세 차례에 걸쳐 내보낸 비정규직 기획 기사는 달랐다. 비정규직 노동자 1070명의 삶에 관한 실태 조사와 심층 면접을 병행했다(제1052호 표지이야기 ‘평생, 비정규직 패밀리’, 제1053호 특집 ‘불안과 분노의 경고등’, 제1054호 특집 ‘점점 조여오는 덫’ 참조).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일터와 삶터 경험을 통계와 심리 분석으로 엮었다. 나이거나 친구, 이웃, 친척일 수 있는 이들의 노동생애사를 기록했다.
설문 문항 직접 설계… 단어 연결망 분석도기획을 주도한 황예랑 기자는 2007년 비정규직법(기간제 및 단시간 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시행 이후, 사회부에서 노동 담당 기자로 1년6개월 동안 이랜드·코스콤·기륭전자 등의 비정규직 문제를 취재했다. 그 뒤에는 경제부에서 자동차·조선·물류(화물·택배) 영역을 담당하며 역시 비정규 노동 문제를 기사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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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조사기관에 설문을 의뢰하는 대신, 비정규직 문제라면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노동경제·사회학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아 직접 45문항짜리 설문지를 만들었다. 한국복지패널과 노동패널의 설문조사를 토대로 기본 인적 특성과 소득·자산, 생활 여건, 노동시장 이동 경로 등의 항목을 재구성했다. 노조 활동가들의 도움을 받아 전국 곳곳에 흩어져 있는 다양한 직업군의 비정규직들을 설문과 인터뷰에 참여시켰다. 1070명의 응답을 통해 ‘비정규직 A씨’의 평균 모습을 그려냈다.
유일한 주관식 문항이었던, “비정규직이라는 단어를 생각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를 자유롭게 적어주세요”의 응답으로 단어 연결망 분석도 했다. 정규직 노동자의 응답과 비교 분석함으로써, 비정규직의 위험한 심리 상태가 뚜렷하게 드러났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이란 단어에서 ‘하루살이’ ‘3류 인생’ ‘노비’ ‘연명’ 등을 떠올렸다. 부정적 단어가 쓰인 비중이 85.5%에 달했다. 반면 정규직들은 ‘계약직’ ‘고용불안’ 등 감정이 섞이지 않은 단어로 응답한 비율이 높았다.
황 기자는 “그동안 (비정규직 관련) 취재를 많이 해와서 스스로 비정규직의 고통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게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구나’라고 느끼게 됐다”고 말했다. “(비정규직 문제) 뒤에 숨겨진 이런 공통적인 불안의 정서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위험’으로 이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이기도 했습니다.”
“기자는 편견 없이 듣는 사람”교육연수생들은 황 기자가 ‘기사가 노동자의 편을 든다’는 일부 시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해했다. 한 교육연수생은 “저널리즘스쿨에서 ‘아르바이트도 파견이다’를 주제로, 파견업체를 통해 뷔페식당에서 서빙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려고 했는데, 결국 완성하지 못했다. ‘너무 아르바이트생 입장에서만 생각하는 게 아니냐, 기업이나 파견업체도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란 이야기를 들으면 혼란스러웠다”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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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기자는 먼저 “기자는 답을 내는 사람이 아니라 듣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큰 원칙을 이야기했다. “물론 사회에 대해서 자기의 시각과 입장을 갖는 건 필요하지만, 취재·보도를 할 때 자기의 주장을 답으로 정해놓으면 편견과 틀에 갇힐 수 있어요. 기자는 열린 자세에서 최대한 많은 이야기를 듣고, 답을 향한 길을 터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기사의 ‘결론’은 필요하다고 했다. “이해관계자들의 입장을 최대한 들어주고 반영하려고 해야 하는 건 맞지만, 그렇더라도 최종적으로는 자신의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취재를 다 하고 내리는 결론이죠. 누구의 편을 들어주는 게 아니라, 기자가 가능한 한 여러 입장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가장 진실에 가깝다고 판단하는 걸로 기사를 쓰는 겁니다.”
노동 이슈는 다른 사회문제가 그렇듯 이해 당사자가 첨예하게 얽혀 있어, 본류가 무엇인지 파악해 기사로 잘 풀어내는 게 쉽지 않다고 했다. 노동 담당 기자를 하다가 산업부에 자원해서 간 이유도 그런 고민에서였다고 했다. “경제와 산업 구조를 모르면 노동 기사를 제대로 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황 기자는 비정규직 문제가 노동과 고용의 문제만이 아닌, 복지·교육·경제 등 여러 이슈가 응축된 것이라고 했다. “‘청년고용 절벽’이란 단어를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들어요?” 황 기자가 교육연수생 5명에게 질문을 던졌다. 정부는 지난 7월27일 ‘청년 고용절벽 해소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그는 정부의 ‘자기고백’을 듣는 것 같았다고 했다. “물론 청년실업의 심각성을 강조하기 위해 (그 표현을) 썼겠지만, 한편으로는 정부가 ‘절벽’이라는 단어를 쓴다는 것 자체가 이 사회가 ‘일자리’ 아니면 사람을 품을 여지가 없다는 한계를 말한 거예요.” 해고노동자들이 “해고는 살인”이라고 싸움에 나서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사회안전망이 잘 보장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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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기자는 ‘취업 OTL’ 기획 때 해외 사례를 취재했던 경험을 언급했다(제992호 취업 OTL 6회 ‘어두운 터널 밖 햇빛 세상을 꿈꾼다’ 참조). 덴마크와 독일 등에서는 청년들이 취업하지 못했을 경우 실업수당 같은 의미의 주거비·생활비 등을 지원한다. 청년실업자가 ‘벼랑 끝’에 몰리지 않도록 최소한의 물질적 토대를 지원하는 것. “일종의 ‘기본소득’을 보장해 절벽으로 굴러떨어지지 않을 ‘밑자락’을 깔아주는 거죠. 우리나라는 ‘밑자락’이 전혀 없기 때문에 청년들이 정규직에 목을 맬 수밖에 없어요.”
그는 “취재를 할수록 내가 담지 못한 수많은 이야기가 더 있겠구나” 느낀단다. 비정규직 기획 때는 설문조사 응답을 상당 부분 이미 조직화된 노조를 통해서 얻었다. 기사에 담지 못한 ‘다른 이야기’가 아른거린다. 감정노동 기사를 내보낸 뒤에도 댓글이나 전자우편으로 자신이 겪었던 아픔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다음 뉴스펀딩 ‘우리 엄마의 감정노동 이야기’ 참조). 황 기자는 “누군가 목숨을 버린 뒤에야, 비로소 그들의 삶이 세상에 알려지는 악순환이 반복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홍연 교육연수생 afternuuun@naver.com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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