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박한 ‘고공의 땅’에도 새해는 찾아왔다. 2014년 마지막 날을 보내는 세 하늘의 표정은 조금씩 달랐다. 씨앤앰 비정규직 노동자 임정균·강성덕씨는 서울 광화문 광고탑에서 내려와 50일 만에 착륙했다. 경북 칠곡 스타케미칼 굴뚝과 경기도 평택 쌍용자동차 굴뚝은 45m와 70m 하늘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맞았다. 220일째와 20일째 ‘하늘살이’로 그들의 2015년은 시작됐다. 2014년 12월31일 두 고공의 신년회 현장을 이 함께했다.
#오후 1시30분~ 칠곡 스타케미칼 굴뚝 농성장의 송년 준비는 세수로 시작했다. “서울서 노숙하고 낯짝을 안 씻어가꼬.” 민주노총 금속노조 결의대회에 참석하러 상경했다 돌아온 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의 박준호(상황실장)씨와 홍기탁씨가 얼굴부터 씻었다. 박준호씨에게 경찰의 전화가 걸려왔다. “오늘 뭐 별거 안 하니까 경찰차 막 몰고 올 필요 없소. 그냥 비닐하우스에서 쏙닥쏙닥 앉아서 이야기나 할 거니까.”
오전부터 오후까지 스타케미칼 굴뚝 위로 함박눈이 내렸다. 한동안 포근했던 날씨가 눈을 동반하며 추워졌다. 굴뚝 위에서 까만 점 하나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차광호 해복투 대표가 219일째(12월31일 기준) 하늘에 있었다.
눈이 그치자 대학생 한 명이 찾아왔다. 집에 내려온 중앙대 학생 강나루씨였다. 차 대표에게 올려줄 비타민과 손편지를 들고 왔다. 지지방문을 애타게 기다리는 땅 동료들은 고마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20여 명이 둘러앉은 조촐한 상이 차려졌다.
#저녁 7시 평택 쌍용자동차 굴뚝 아래 조합원들의 손놀림이 바빴다. 거센 바람에 천막 비닐이 차이고 젖혀졌다. 평택 굴뚝에선 ‘송년회’ 대신 ‘신년회’란 표현을 썼다. 스물여섯 명의 동료를 떠나보낸 그들에게 ‘송’이란 글자는 너무 아린 탓이다. 김정우 전 지부장이 나무를 패서 군고구마통에 넣었다. 군고구마통은 굴뚝 지원천막의 유일한 난방기구이기도 했다. 이 작은 온기가 신년회에 모인 사람들의 추운 몸을 덥히고, 저 멀리 굴뚝 위까지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는 도끼질을 했다.
#저녁 8시 칠곡 ‘안주연대’가 떴다. 성정미 숲치유센터 대표가 오징어무침을 준비해왔다. 그는 전화 통화로 차 대표의 심리안정을 돕고 있다. “치유도 중요하지만 먹는 것도 중요하다. 잘 먹어야 마음도 안정된다.” 최근 코오롱과의 10년 투쟁을 마무리한 해고노동자 김경옥씨가 오징어를 무치는 데 손을 거들었다. 아픔과 아픔이 오징어를 무치며 연대했다.
‘스타 송년회’가 시작됐다. 모두의 새해 소망은 같았다. 차광호 대표가 내려오는 것. 공장으로 돌아가는 것. “다른 곳에 비해 이슈화가 덜 돼 힘들다. 힘든 건 괜찮은데 (해결되는) 보람이 없을까 두렵다. 내년에는 정말 끝났으면 좋겠다.” 홍기탁씨의 부인 이정윤씨가 소망했다.
#저녁 8시 평택 해고자 가족, 노동자, 시민, 대학생 등 각지에서 온 300여 명이 모여 앉았다. “시작할까요? 굴뚝 준비됐어요?” 사회를 맡은 지구지역행동네크워크 활동가 나영씨가 소리치자 굴뚝에서 불빛이 반짝였다. 해고자 자녀들로 구성된 ‘와락 어린이 난타팀’이 율동으로 오프닝을 열었다. 부모와 참석자들이 같이 노래하고 춤췄다. 8시40분께 가수 이수진씨는 김정욱 사무국장이 굴뚝에서 신청한 노래 를 불렀다. 신년회는 흥겨운 축제로 진행됐다.
밤 9시. 이창근 실장의 부인 이자영씨가 단상에 올랐다. 그는 남편에게 쓴 편지를 읽었다. “여보, 무섭고 힘들다. 당신이 안전하게 내려왔으면 좋겠어. 당신도 내 인정과 사랑이 필요하잖아. 나도 당신의 칭찬이 필요해. 당신 방도 정리할게. 책 읽다 글 쓰다 할 수 있게 만들어놓을게. 제대로 짝이 되어 살자. 같이 웃고 같이 아파하자. 주강이가 아빠랑 볼링 치고 싶대.”
밤 10시10분. 사람들이 외쳤다. “이창근, 김정욱, 목소리를 들려줘요~.” 전화기를 연결한 확성기에서 이창근 실장이 응답했다. 그는 “이 싸움의 끝이 어떨지 상상하거나 규정하지 않겠다. 억눌리고 짓밟혔던 모든 것을 위한 날을 만들겠다”고 했다. 김정욱 국장도 말했다. “내년에도 우리는 ‘우리’를 이야기할 수밖에. ‘함께’라는 단어를 이어가기를.”
#밤 11시20분 칠곡 해복투 노동자들과 연대자들이 ‘타종 행사’를 위해 공장 남문으로 이동했다. 하늘을 향해 이름을 불렀다. “광호 형~.” 그들은 남문 벽에 스크린을 설치했다.
밤 12시. 지상파 방송들이 타종 행사를 전하기 시작했다. 일행들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구미지회에서 지원받은 빔프로젝터를 연결해 남문 벽에 타종 화면을 비췄다. 땅의 동료들이 불꽃을 하늘로 쏘아올렸다. 박준호씨가 하늘로 외쳤다. “형, 미안하고 고맙데이. 우리한텐 형이 제일 우선이다. 알제?”
불이 모두 꺼진 구미공단 까만 하늘 위에서 차광호 대표가 랜턴을 밝혀 불빛을 내려보냈다. 춥고 깜깜한 밤. 굴뚝과 땅 사이의 거리 45m. ‘서로’의 존재가 보이지 않는 허공을 사이에 두고, ‘서로’의 빛을 올려보내고 내려보내며,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서로’가 됨을 확인했다. 그 힘으로 2014년을 버텨온 그들은 그 힘으로 2015년을 맞서갈 것이었다.
#밤 11시40분 평택 징을 쳤다. 징징징…. 징이 울었다. 희생된 이들의 이름이 하나씩 호명되며 27차례나 무겁게 울었다. 26번은 희생자들을 가슴에 묻고 떠나보내기 위해 울었고, 1번은 남겨진 모두를 위해 울었다. “죽음의 그림자를, 올해의 액운을, 이 징소리에 흘려보내자”며 참석자들은, 징징징, 징을 쳤다.
십, 구, 팔, 칠, 육, 오, 사, 삼, 이, 일.
2015년이 되는 동시에 모두는 를 불렀다. 동지를 믿고 김정욱·이창근은 굴뚝에 있고, 김정욱·이창근을 믿고 동지들은 굴뚝 아래에서 힘을 낸다. 그렇게, 그들 앞에, 2015년이 왔다. 행사를 마친 뒤에도 사람들은 새벽까지 자리를 뜨지 않고 굴뚝 밑을 지켰다. 칼바람 추위 속에서 가장 많이 주고받은 말은 ‘희망’ ‘우리’ ‘함께’였다.
#1월1일 아침 8시30분 칠곡 차광호 대표에게 새해 떡국이 올라갔다. 떡국을 올린 동료들은 노래 을 틀고 연을 날렸다. 송년회 내내 내다보지 않던 회사 경비가 밖으로 나와 하늘 높이 떠오르는 연을 쳐다봤다. 노동자들의 공장 진입을 막기 위해 배치된 경찰들도 연을 바라봤다. 그들과 같은 연을 해고노동자들과 연대자들이 올려다봤다. 굴뚝에서 차 대표도 같은 연을 보고 있을 것이었다.
“하늘 높이 날아라. 내 맘마저 날아라. 고운 꿈을 싣고 날아라~.”
지난하고 오랜 싸움을 끝내고 차 대표가 어서 내려올 수 있길 기원하며 동료들은 연을 떠나보냈다.
“한 점이 되어라, 한 점이 되어라, 내 맘속에 한 점이 되어라~.”
그들의 소망을 담은 연이 실을 끊고 날아가 한 점이 되었다.
칠곡=강예슬·정인선 인턴기자, 평택=이수현 인턴기자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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