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고전’ 목록에서 이제 E. H. 카의 는 좀 빼자. 그 책의 유명한 구절, 즉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는 마치 구구단 같다. ‘역사란 무엇이냐’는 질문에 누구나 그 말을 초들지만, 사실 무슨 말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물며 알아도 쓸 일은 별로 없다. 카의 는 역사인식론의 몇 가지 차원들, 이를테면 개인과 사회, 우연과 필연, 과학과 도덕의 관계 등을 흥미롭게 다루고는 있으나, 한때 유행하던 ‘과학적 역사학’의 인식론과 관련한 추상 범주를 혼란스럽게 다룬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이미 1960년대 이후 역사학의 수많은 이론적 성과에 묻혀 빛을 잃었다. 또 그것은 21세기 역사의 복합적 현실을 해명하는 데도 더 이상 유용하지 못하다.
‘디스’의 이유
물론 카는 탁월한 역사가였다. 그러나 역사이론가로서 그는 조악했으며 옛 소련 옹호자로서 그는 고루했다. 국내의 많은 사람들이 격찬하는 카의 를 이렇게 ‘디스’하는 이유는 그것이 오랫동안 역사 이해를 협소한 방향으로 이끌며 더 의미 있고 중요한 역사 인식의 길을 저해했다는 생각 때문이다. 역사란 카가 에서 다룬 것처럼 그렇게 인식론적 범주로 빠져들어 개념적 이해로 축소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는 무엇보다 사람들의 핏빛 절규와 집단적 참화의 연속이었다. 역사는 한편으로 끈질긴 인간적 가능성과 저항의 결기로 찬연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문명 단절과 생명 파괴의 굴곡으로 비틀거렸다. 특히 20세기 현대사는 지구 곳곳에서 처참한 정치폭력과 국가범죄 및 그것에 맞선 파릇한 인간적 고투로 넘쳤다. 역사에 대한 개념적 이해에도 이젠 폭력과 고통 그리고 그것의 극복 노력이 중심 범주여야 하지 않을까?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파시즘의 인종 살해, 공산주의 체제와 개발독재의 인권유린 및 정치 억압과 소수자 배제의 실상은 일부 법정 기록을 빼면 주로 과거 청산을 목적으로 하는 ‘진실위원회’의 활동 성과로 보고되었다. 정치폭력과 국가범죄의 진실을 밝히는 것은 과거사 정리의 출발이자 근간이었다. 민주국가는 억압적 부정의나 폭력 범죄를 규명하고 확정하기 위해 기존 국가기구나 법적 절차 바깥에 새로 ‘진실위원회’를 만들어 진실 규명에 나섰다. 1983년 아르헨티나와 1984년 우간다에서 처음 선보였던 국가 차원의 독립적인 조사기구는 1990년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진실화해위원회’로 국제적 명성과 문명적 지위를 얻었다. 그 흐름은 곧 칠레, 엘살바도르, 아이티, 과테말라, 페루, 가나, 동티모르, 한국, 라이베리아 등지로 확산되었다.
‘진실위원회’가 따로 필요한 이유는 충분했다. 먼저 기존 국가기구는 과거 범죄에 깊이 연루돼 있고 심지어 가해자 집단이었기 때문에 조사 주체가 되기에 부적절했다. 다음으로, 광범한 부정의와 폭력 범죄를 정해진 시기 내에 포괄적이면서 효과적으로 조사하려면 기성 국가기관 외부에 독립적인 조사기관을 둘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진실위원회는 보고서 등의 조사 결과물을 통해 ‘확인된 범죄’를 공동체에 널리 알리고 사후 조치를 집행 내지 권고할 수 있었다. 물론 진실위원회의 활동이나 보고서 발표를 통해 모든 진실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에, 지속적인 조사와 학술적인 연구가 가능하도록 따로 조치할 필요가 있었다.
진실위원회 활동과 관련해 가장 큰 성과를 보인 곳은 아무래도 남아공이었다.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라는 백인 소수 정권의 오랜 인종주의 탄압과 정치 억압은 1980년대 후반 탈냉전의 정세 변화와 민주화운동 세력의 견고한 투쟁으로 인해 종말로 치달았다. 1989년 취임한 국민당 정권의 백인 통치자 프레데리크 데클레르크 대통령은 곧 민주화 시대로의 전환을 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넬슨 만델라 석방과 저항운동세력 해금 및 흑인에 대한 선거권 부여를 중심으로 한 개혁정책이 등장했다. 1994년 4월 모든 인종이 참여하는 첫 총선거의 결과로 아프리카민족회의가 집권했고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이 되면서 인종주의의 장기 독재에 종지부를 찍었다.
새로운 과거 청산의 길 연 남아공 진화위평화적 정권 교체였기에 정권 교체 뒤에도 경제나 군부 및 치안 병력의 상당 부분은 여전히 소수 백인의 손 아래 놓여 있었다. 그렇지만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잔혹한 폭력과 범죄의 진상이 밝혀지고 정의가 구현되어야 한다는 요구도 높았다. 1995년 ‘국민통합과 화해증진법’을 통해 남아공 정부는 ‘진실화해위원회’(이하 진화위, 위원장 데즈먼드 투투 대주교)를 설치해 새로운 방식의 과거 청산의 길을 열었다.
남아공 진화위는 1960년 3월1일에서 1994년 5월10일 사이에 발생한 중대 인권침해 사건의 양상과 원인을 밝히고 피해자 상황을 조사했다. 진화위의 소위원회였던 인권침해위원회와 사면위원회는 공개청문회를 개최했다. 그것은 1996년 4월15일부터 1997년 8월15일까지 총 76회에 걸쳐 진행되었다. 2만1200명 이상의 증인이 참석해 증언했다. 공개청문회를 통한 조사와 증언 과정은 다중 언어로 생중계됨으로써 남아공 내외에서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진화위는 진실 규명에 작지 않은 성과를 올렸고, 지역사회와 국가공동체가 피해자의 피해 사실과 고통에 귀기울이도록 조치했다.
공개청문회는 법정과 달랐다. 피해자들과 희생자 가족들은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진술할 수 있었다. 길든 짧든, 문법에 맞든 안 맞든, 그들은 그들의 언어와 몸으로 말했고 누구도 그들의 말을 중단시킬 수 없었다. 아울러 사후 전문위원회가 따로 검토하더라도 그들의 증언은 일단 모두 진실로 간주되었다.
여기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진화위의 진실 개념이었다. 진화위는 진실을 ‘사법적 진실’에 한정짓지 않았다. 진화위는 법률상 증거에 한정되는 사법적 진실을 넘어 피해자와 희생자들의 주체적 경험에 기초한 ‘서사적 진실’을 독자적으로 인정했고 폭력의 사회적 기제에 대한 ‘정치적 진실’과 공동체의 피해 회복을 위한 ‘공동체적 진실’ 영역 또한 따로 존재함을 인정했다. 폭력이 발생한 뒤 이미 증거 자료가 상당 부분 소멸한 뒤였고 가해자가 불명료하거나 오랫동안 국가 권력이 직접 조장하고 자행한 집단적 망각과 피해자에 대한 기억 억압의 세월을 고려한 다양한 차원의 진실 개념이었다. 생경하고 협애한 법률적 증거주의를 넘어서야만 피해자의 관점을 보장할 수 있고 총체적 인권유린의 체계가 밝혀지는 것임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그렇게 조사를 끝낸 진화위는 피해자들에게 인간 및 시민으로서 존엄성을 회복하게 하며 적절한 보상이 이루어지도록 정부에 권고했다. 물론 남아공의 경제 상황 악화로 인해 끝내 피해자들에게 충분한 보상이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그렇더라도 피해자에 대한 재정적 보상을 국민적 합의로 추구했다는 점은 인상적이다. 1998년 10월 진화위는 활동을 마무리하면서 만델라 대통령에게 3500쪽에 달하는 다섯 권의 보고서를 올렸다. 2003년에는 두 권의 보고서를 추가로 발간했다. 한 권은 진화위의 활동에 대한 보고였고 다른 한 권은 피해 내력의 약술을 포함한 희생자 명부였다.
그런데 남아공 진화위의 과거 청산은 인권침해 ‘가해자가 사실을 전면적으로 밝히는 조건으로 사면을 받는’ 방식이었다. 진화위가 구성되기 전에 남아공 정부와 시민사회에서는 (나치 전쟁범죄를 다룬) 뉘른베르크 재판 모델을 따라 철저한 법적 처벌과 응징을 통해 과거사를 제대로 정리해야 한다는 주장도 강했다. 하지만 만델라와 투투를 비롯한 신생 정부의 핵심 인물들은 가해자들에게 처벌이 아니라 오히려 사면을 전제로 한 진실 고백의 길을 열어주었다. 당시 남아공 정치 지도자들은 사면을 하지 않으면 과거의 권력자이자 여전히 실질적으로 사회적 힘을 지닌 백인 엘리트들과 공존하기 어렵고 인권유린 범죄자들의 반발로 평화로운 권력 이양과 체제 전환이 어렵다고 보았다.
원인이 제거될 때 비로소 정리되는 과거사게다가 사면을 통한 과거사 정리 방식은 우선 정치 상황과 권력관계를 고려한 것이기도 하지만 ‘서로의 용서와 화해를 통한 공동체의 복원’이라는 ‘우분투’(ubuntu) 정신에 근거한 것이기도 하다. 사실 사면을 신청한다는 것은 무죄를 주장하는 게 아니라 그 반대였다. 자신이 중대한 인권침해에 해당하는 범죄를 저질렀음을 피해자와 공동체에 고백하고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한편 해방운동 진영에 속하면서 테러 행위를 했던 이들도 죄를 고백함으로써 사면받는 절차를 밟았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과거 청산은 가해자와 관련해서 한계가 뚜렷했다. 국가권력 기구의 책임자 전력을 지닌 대다수 백인 가해자들은, 당시의 일은 ‘통치행위’였으며 개인이 책임질 일이 아니라고 우겼다. 가해 행위를 인정하고 사면을 신청한 사람의 80%가 흑인이었다. 백인 독재정권의 말단 행동대원으로 참여한 흑인들이 주로 인권침해 행위를 고백하고 사면을 받았다, 정작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를 만들고 살해 명령을 직접 내렸던 ‘큰고기’들은 아예 사면을 신청하지도 않았고, 변명과 변호를 일삼거나 부인과 증언 거부 내지 기억상실을 강변함으로써 만델라와 투투가 내건 우분투 정신을 침해했고, 남아공 과거 청산 모델이 결국 반쪽짜리 성과임을 드러냈다.
‘그 후’에도 남아공의 사회·경제 현실은 여전히 인종주의적 불평등과 차별이 사라지지 않았음을 드러냈다. 독일 철학자 아도르노는 ‘과거사의 원인이 제거될 때에만 비로소 과거사가 정리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남아공의 인종주의적 불평등 현실이 극복되지 않는다면 남아공 진화위의 과거사 정리 작업은 그저 미완일 뿐이다.
그럼에도 남아공 진화위와 보고서는 그 뒤 여타 국가와 지역의 진실위원회 활동의 모범으로 간주되었다. 그 이유는 남아공에서 진화위의 보고서는 사회 곳곳에서 수용되었고 국가공동체의 공식 기억이자 인권 교과서로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 모든 한계와 초기의 일부 저항에도 불구하고 진화위의 작업이 정치공동체에 깊게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다. 보고서는 학교 도서관과 공공기관에 우선적으로 보급되었다. 심지어 아동용 도서도 개발돼 모든 이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조치되었다. 증언록을 비롯한 진화위의 모든 기록물은 국민 누구나 쉽게 열람할 수 있다. 역사박물관 건립과 역사 기념 및 추모 사업도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다. 같은 참화가 반복되지 않으려면 지난 일들이 누구에게나 항상 정보로 공개되고 사회의 집단적 기억으로 확산되고 세대를 이어 전승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다시 보면 남아공의 진화위는 인류의 폭력 극복 역사에 매우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전쟁과 학살, 억압과 참화를 뺀다면 역사는 공허하고 기만적이다. 또 20세기 후반부터 인류가 정치폭력을 극복하며 이루어낸 평화와 인권의 정치적 노력과 학문적 성취를 무시한다면 역사는 한낱 호사가의 취미 대상이거나 미학적 부스러기의 집합으로 전락한다. 그렇기에 정치폭력의 다양한 양상, 가해자의 변호와 범죄 부인, 피해자의 고통과 트라우마, 사법적 처벌과 제도 개혁, 화해와 용서, 공동체의 책임과 기억 그리고 ‘역사문화’를 통한 전승의 문제를 중심으로 가 새롭게 쓰여야 할 것이다. 그 주제를 체계적으로 다룬 ‘역사이론서’ 또는 ‘인문학 고전’이 아직 없다면, 일단은 각종 ‘진실위원회’의 보고서들이라도 찾아 읽는 것은 어떨까? 그 보고서들이야말로 진정 ‘인문학 고전’ 목록의 앞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인간 삶과 문명에 도저한 이 정치폭력의 문제를 외면하고서야 어찌 인문학을 논할까 망연하다.
진실‘들’은 어디로 사라졌나?그런데 지난 시기 그 많던 한국의 과거사위원회가 남긴 보고서는 다 어디로 갔을까? 누가 과연 그 보고서들을 읽어보았을까? 또 법적 실증성의 틀에서 인정받지 못한(이른바 ‘진상 규명 불능’) 피해자들의 ‘서사적 진실’과 공동체의 ‘역사적 진실’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이 피해자 기억의 배제와 집단적 망각의 나라에서 ‘세월호 진상조사위원회’는 또 어떻게 될까? 물음만 겹겹이 쌓인다. 마지막 물음, 이 정치폭력과 사회참화의 시대에 과연 ‘역사란 무엇인가?’
이동기 강릉원주대 사학과 교수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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