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강의가 있다. ‘자신의 생을 송두리째 바꿨다’는 평가와 ‘강의를 듣는 내내 불편했다, 전체 학생이 필수로 들어야 할 수업이 절대 아니다’라는 평가가 공존한다. 쌍용그룹 등 기업의 직무적성 계발 노하우를 토대로 2004년 국민대에 들어선 ‘인생설계와 진로’(이하 인설진)라는 선택교양 과목은 2013년 필수교양 과목으로 ‘승격’됐다. 한 달 전 국민대 독립언론 이 인설진의 문제를 취재·보도했을 때 메워지지 않는 평가의 간극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왜 어떤 학생들은 ‘인설진을 통해 자아를 찾고 대기업에 합격했다’는 성공 사례를 내세우며 강의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반면, 어떤 학생은 이 수업이 ‘한국판 인생게임 같다’며 ‘비전 혹은 꿈 없는 인생을 비참한 인생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고 혹평했을까. 필수교양 과목을 둘러싼 논란은 비단 국민대만의 것은 아니다. 논쟁의 결은 오늘날 한국 대학이 처한 현실과도 꼭 닮아 있다.
총장님 지시로 온라인으로 배우는 리더십다른 교양 과목과 달리 필수로 이수해야 졸업할 수 있는 ‘필수교양’ 과목은 예전엔 글쓰기, 영어, 채플 등으로 다소 한정된 편이었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 이후 대두된 글로벌·리더십 혹은 자기계발 열풍과 만나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최근 여러 대학에서 리더십과 자기계발은 물론 회계까지 ‘대학생들이 반드시 갖춰야 할 필수적인 교양’으로 지정되면서 과목의 종류와 영역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을 거쳐온 학문적 흐름에 따라 생겨난 과목들과 달리 대학의 필요에 따라 급조된 성격이 짙다.
2007년 “한양대가 어떤 대학이냐고 묻는다면 올바른 CEO를 길러내는 대학”이라고 말했던 김종량 총장(현 이사장)의 의지에 따라 한양대 리더십센터가 개설한 리더십 프로그램 ‘HELP’(Hanyang Essential Leadership Plus)는 매해 논란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교육 내용을 정하는 기준부터 온라인 강의 방식에서 발생하는 잦은 오류까지 빈번하게 학생들의 입길에 오른다. 사람 간의 관계를 통해 조금씩 배워나가야 할 리더십을 사람과 전혀 접촉할 수 없는 온라인 강의로 풀어내는 강의 방식에 학생들은 불만을 제기한다. 한 학생은 말했다.
“강의에서 학교 역사, 에티켓, 비즈니스 예절, 양복에 어울리는 나비넥타이 종류 등을 배운다. 리더십 향상을 위해 도입된 수업이라는데, 과연 온라인 강의로 리더십이 얼마나 향상될지 의문이다. 한마디로 강의가 부실하다.”
2013년 이화여대에 도입된 ‘나눔리더십’도 학생들로부터 문제를 지적받는다. 누가 더 나눔을 잘 베풀었는지, 누가 더 리더십이 뛰어난지를 두고 옆자리 학생과의 학점 경쟁에서 이겨야 하는 모순을 헤쳐나가야 한다. 이화여대 학생 ㅅ(23)씨는 “나눔리더십을 우리는 줄여서 ‘개나리’라고 부른다. 나눔을 실천해 지식을 나누는 사람이 되자는 취지의 필수교양인데, 상대평가로 이뤄진다. 얼마나 멋진 나눔을 실천했는지를 두고 학생들끼리 학점 경쟁을 벌여야 한다”고 토로했다.
학생들은 필수교양 과목이 제시하는 리더십의 내용과 요구하는 인간상에 따라 획일적으로 길러진다. 지식 습득에 목적을 둔 기존 강의와 달리 이 과목들은 학생들에게 ‘특정한 인간형’이 될 것을 요구한다. 예술계열 학생 전체를 대상으로 회계학을 가르치는 중앙대가 대표적이다. 회계에 능통하고, 국제적이며, 리더가 되기 위해 자기계발 하는 삶을 표준형 인간의 특성이자 소양으로 제시하는 듯하다. 취업을 하기에 용이한, 기업이 원하는 인재상과 다르지 않다. 인문학은 하나의 도구로 취급될 뿐이다.
“학문으로서 창의성이나 비판적 사고 능력보다는 기업문화에 대한 적응을 중점에 두고 있다. 기업 친화적이라는 비판이 일자 인문학적 내용을 원래 있던 필수교양 과목에 더 넣겠다고 하더라. 강의가 요리인가. 기업문화 한 스푼 넣고, 싱거우면 인문학 한 스푼 넣게.” 한양대 학생 ㅊ(22)씨는 지적했다.
“연세대는 채플, 중앙대는 회계”현재 대학들의 필수교양 과목 선정은 한국 사회의 지배적 담론을 대학들이 적극 수용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박용성 중앙대 이사장은 ‘회계와 사회’를 필수교양 과목으로 선정하면서 “연세대는 채플, 성균관대는 유교가 특성화된 것처럼 중앙대의 경우 회계 과목을 통해 실용적인 특성을 보여주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누구나 회계를 다룰 줄 알아야 한다는 그의 철학은 곧 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누구나 화이트칼라의 사무직 노동자가 될 수 있거나 되어야 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기업의 최고경영자 혹은 유명 동문을 초청해 그들의 성공 스토리를 듣는 강의 역시 그들의 삶이 현재 2014년을 살고 있는 대다수의 대학생이 실제 도달할 수 있는 것과는 낙폭이 크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여자대학으로서 여성 리더의 문화적 봉사정신 등의 소양을 강조하며 2009년에 생겨난 성신여대 필수교양 과목 ‘글로벌 문화와 성신 리더십’(현재 ‘성신인’) 또한 여성 리더로서 ‘특정한 모델’을 상정한다. 성신여대 학생 ㄱ(24)씨는 말했다.
“강사는 기업에서 강연하다 온 사람이었다. 여성 리더를 조사해 발표하는 과제가 있었는데, 강사의 선호도를 감안해 학생들이 MCM 김성주 회장이나 애경 장영신 회장 등 여성 기업인을 조사해왔다.”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대학을 정의할 수 있겠지만, 수업과 강의는 대학의 존재 이유를 말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다. 전공이든 교양이든 학생들은 강의를 듣고 수업을 하는 과정에서 대학이 요구하는 인간형으로 학습되고 훈련된다. 한 신입생이 대학에 입학한 뒤 갖춰야 할 자질로서 ‘지속적으로 제시받고 교육받는 필수적인 교양’의 내용은 그들이 세상과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오늘날 대학과 그 대학이 양산하는 학문은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종류의 요구에 직면해 있다. 고고한 척 지식의 전당을 자처할 게 아니라 사회가 원하는 잣대에 정확히 부응하라는 요구다. 대학생이 반드시 갖춰야 할 교양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은 글로벌과 리더십이란 ‘시대적 요구’ 앞에서 침묵을 강요받을 뿐이다. 현재 대학이 처한 현실이 무분별한 필수교양 과목의 토양이다.
학문과 배움 숭상하던 대학의 원형을 잃고우리는 어쩌면 학문과 배움을 최우선으로 숭상하던 원형의 대학으로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사회가 대학에 요구하는 덕목이 달라졌고, 취업률을 잣대로 들이대는 구조조정의 칼날을 거부한 채 대학은 생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근대적 교양과 교육의 메카’로서 대학과 작별을 고하는 마지막 세대일지 모른다.
유지영 국민대 기자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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