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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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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덜한 마음 깁는 ‘연대’라는 바느질

전국에서 모여든 연대자들과 함께 둘러앉아 밥을 먹고, 정을 나누고,

이야기를 하는 용회마을 사랑방 터줏대감들의 여름날
등록 2014-08-08 17:23 수정 2020-05-03 04:27
지난 7월18일 용회마을(경남 밀양시 단장면) 사랑방을 꽉 채운 주민·대학생·연대자들이 밥상에 둘러앉아 점심 식사를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지난 7월18일 용회마을(경남 밀양시 단장면) 사랑방을 꽉 채운 주민·대학생·연대자들이 밥상에 둘러앉아 점심 식사를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어서 오이소. 와서 밥 자시고 가이소.”

7월17일 점심시간이 되자 마을 주민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밭일을 하던 아주머니도, 밀양을 찾은 학생들을 위해 강의를 준비하던 퇴직 교장 선생님도, 할머니가 병원에 입원해 혼자 밥해먹기가 버거운 할아버지도, 작은 힘을 보태려 마을을 찾아온 연대자들도, 농활을 하던 학생 기자들도 모두 상에 둘러앉았다. 널찍이 펴진 상엔 연대자들이 가져온 각종 반찬과 이날 사랑방 당번인 김옥희(61)씨가 끓인 된장찌개가 올랐다. 그렇게 오늘도 용회마을 사랑방은 만원이다.

<font size="3">밀양에서 가장 사랑방다운 사랑방 </font>

용회마을 사랑방(6월28일 개장)은 잘 쓰지 않던 쉼터의 개·보수를 거쳐 만남의 장으로 거듭났다. 사랑방 개장은 6월11일 행정대집행 이후 지속 가능한 싸움을 위해 ‘밀양 765kV 송전탑 반대 대책위원회’가 내놓은 아이디어다. 용회마을 주민들은 대책위가 마을마다 지급하는 ‘사랑방용’ 컨테이너를 마다하고 이미 있던 마을 쉼터를 정비한 뒤 부엌을 새로 붙였다. 그 덕에 대다수 마을 주민들이 사랑방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있다. 31가구 중 3분의 1에 해당(9가구)하는 독거 할머니들도, 경운기 사고로 장애를 갖게 된 할아버지도 여기서 밥을 먹는다. 이렇게 늘 복작대다보니 어느새 용회마을 사랑방은 밀양에서 가장 ‘사랑방다운’ 사랑방으로 자리잡았다.

“우리 원래 이렇게 안 친했거든. 만나면 가볍게 목인사만 하고 그랬어. 여서 밥 묵고 얘기도 하면서 친해진 거지.”

사랑방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며 ‘전우’가 되었다는 주민들은 매일 서너 명씩 당번을 정해 사랑방을 ‘지킨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 식사 전까지 사랑방에 머물며 밥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파수꾼 역할을 하는 것이 당번들의 일과다. 시장에 내다팔지 못하는 작은 감자나 찢어진 깻잎들을 모아 사랑방에서 반찬을 만들기도 한다.

사랑방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봉우리 사이로 헬기가 끊이지 않고 날아다녔다. 송전탑 공사 자재를 실어나르는 헬기의 굉음에 주민들은 사랑방 문 앞으로 나와 하늘을 올려다봤다. “합의문에 (공사에) 협조 딱 해야 한다고, 그래 써 있다 안 카나!” 한국전력은 보상금 ‘계좌이체거래 약정서’에도 ‘본 신청서를 제출함과 동시에 한전에서 시행하는 765kV 송전선로 공사에 대하여 일체 방해하지 않겠다’는 문구를 넣었다. 울상이 된 한 주민은 하늘에 큰소리를 쳐보지만 분풀이는 이내 메아리로 돌아와 땅에 꽂혔다. 속이 상한 주민들은 하늘에서 눈을 떼고 말 없이 깻잎 묶는 일을 계속했다.

“학생 이거(바지) 어데서 샀어? 요새 (학생이 입고 있는) 냉장고 바지가 유행이데.”

밭에서 따온 깻잎을 판매용으로 묶으면서 한 주민이 말했다. 그는 “내일 장 서는데 냉장고 바지나 사러 가야겠다”며 웃었다. 깻잎을 받친 보자기 옆에 둘러앉아 주민들은 이야기꽃을 피웠다. 기자가 깻잎 묶기에 거듭 실패하자 방법을 가르치다 지쳐버린 할머니는 “다 배울 때까지는 서울 못 간다”며 겁을 줬다.

사랑방 한켠에선 반찬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요새 정구지(부추)가 부들부들하니 좋다. 정구지에 식초, 간장, 설탕을 넣어 조물조물 무치면 그래 맛있대.”

<font size="3">신입 연대자 경계하다가도 함께 숟가락을 들고</font>

사랑방이 현재의 모습을 갖춘 데는 고준길(72)·구미현(66)씨 부부의 역할이 컸다. 주방을 만들고, 냉장고를 들이고, 싱크대와 가스레인지를 설치하고, 쌀과 각종 먹거리를 가져다놓자 그럴싸한 사랑방이 됐다.

“행정대집행 뒤 일주일이 지날 때까지 잠을 제대로 못 잤거든예. 외상후 스트레스라는 게 이런 건가 하고 많이 힘들었어예. 그런데 (사랑방) 꾸미는 거에 몰두하면서 힘든 걸 잊어버리기 시작했지예. 안정을 찾았다고 해야 하나.” 구미현씨는 “사랑방이 나를 치유했다”고 했다.

마을 입구에 자리잡은 용회마을 사랑방은 사면이 투명한 유리창이다. 사랑방에서 상주하는 주민들은 누가 마을에서 나가고 들어오는지 가장 먼저 알아챈다. 외부 차량이 마을 주변에 들어오면 “저거 한전 차 아니가”라며 경계의 눈초리를 보낸다. 한전 쪽 차량은 번호판을 외워두었다가 대입해보기도 한다. 실제로 대학 기자들이 용회마을에 머문 4박5일 동안 경찰 차량 2대와 한전 차량 1대가 마을 입구를 순회했다

여전히 싸움은 진행 중이기에 낯선 사람들에게 보내는 의구심 어린 눈초리는 일종의 통과의례가 돼버렸다. 지난 7월17일 대구에서 온 신현기씨가 사랑방을 방문하자 마을 주민들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을 건넸다. “아저씨 대구서 온 게 확실합니까? 또 경찰 아이가?”

계명문화대학교의 컴퓨터학부 겸임교수라고 자신을 소개한 신현기씨는 경북 청도에서 송전탑 반대운동을 함께하고 있다고 말했다. “거게도 그럽니꺼.” 강순자(84) 할머니는 밀양에서 겪은 일을 격앙된 목소리로 풀어나갔다. 경찰들이 팔에 상처를 입힌 일, 한전이 마을 공동체를 파괴한 과정, 한전의 보도자료만 받아쓰는 앵무새 같은 언론 등. 신씨는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점심시간이 되자 주민들은 신현기씨와 함께 밥을 먹었다.

“왔나~. 어여 와 앉아라.”

사랑방은 전국에서 찾아온 연대자들의 집합소이자 쉼터이기도 했다. “연대자들이 우리 싸움의 원동력”이라는 주민들은 그들을 반갑게 맞아 밥상 앞에 앉힌다.

매주 금요일이면 젊은 엄마들이 사랑방을 찾는다. 어린이책시민연대 회원들이다. 어린이책시민연대는 2012년부터 밀양 주민들의 싸움을 지지하며 꾸준히 마을을 방문하고 있다. 사랑방 개장 이후에는 바리바리 반찬도 싸들고 온다. 7월18일 회원들은 오이소박이와 유부초밥을 상에 내놓았다. 얼마 전부터 바느질 수업도 시작했다.

“오늘은 작은 수를 놓을 겁니다. 2주에 걸쳐서 만들 거예요.”

야생화 자수를 놓은 휴대전화 손가방을 만들 계획이란 선생님의 말에 주민들은 하나둘 돋보기안경을 꺼냈다. 어떤 꽃을 수놓을까 고민하며 자수책을 뒤적이는 그들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왜 하필 바느질일까. 어린이책시민연대 회원 이복순씨는 설명했다.

<font size="3">“연대란 서로 밥을 같이 먹는 것” </font>

“아직 상처가 남아 있는 주민들이 혼자 남게 되면 억울한 일들을 계속 떠올릴 수밖에 없어요. 우리랑 있는 시간만큼은 이야기도 하고 바느질에 집중하게 되잖아요. 그러면서 찢긴 마음도 기워졌으면 하는 거지요.”

송전탑 싸움이 용회마을 사람들에게 남긴 상처는 깊다. 한밤중 송전탑의 시뻘건 불빛은 용회마을도 예외 없이 찔러댔다. 경찰에게 끌려나가다 실신한 사람, 몸싸움 끝에 지워지지 않는 흉터가 남은 사람, 끝내 구속된 사람도 있다. 합의한 일부 주민들은 집 앞에 폐회로텔레비전(CCTV)을 달았다.

사랑방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사랑방에서 밥을 먹으며 웃고 떠드는 동안 주민들은 서로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돼가고 있었다. 고준길·구미현씨 부부는 사랑방을 꾸미던 지난 시간을 떠올리며 말했다.

“연대란 서로 같이 밥을 먹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예. 자꾸 만나서 얼굴을 보면 (합의문에) 도장 찍으라고 해도 못 찍을 거 아입니꺼. 밥을 같이 묵고, 정을 나누고, 이야기하는 시간을 만드는 것. 사랑방의 출발은 거기에 있지예.”

황윤정 기자·서혜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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