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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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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을 먹고 자라는 송전탑 <반대>

함께 싸웠지만 합의에 내몰리면서 서로 등 돌린 이웃들…
행정대집행 뒤에는 “이제 마 희망마저 없어졌다”는 한탄만 남고
등록 2014-08-08 15:17 수정 2020-05-03 04:27
대학독립언론네트워크 기자들이 16일 오후 경남 밀양시 산외면 골안마을 콩밭에서 김매기를 하고 있다. 밀양/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대학독립언론네트워크 기자들이 16일 오후 경남 밀양시 산외면 골안마을 콩밭에서 김매기를 하고 있다. 밀양/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학생들 뭐하러 왔노? 우리 동네 사람 아이지(아니지)?”

지난 7월15일 오후. 중요한 회의가 열린다기에 찾아간 괴곡마을회관(경남 밀양시 산외면)에는 주민 30여 명이 모여 있었다. 대학생 기자 2명이 마을회관 한쪽 구석에 앉기도 전에 주민 몇 명이 “나가라”며 소리쳤다. “서울서 왔담서 여기 뭐하러 들어오노? 일손 도와주러 왔으면 조용히 일손이나 도와주다 갈 것이제.” 일순간 화난 목소리들이 쏟아져나왔다. 내쫓기듯 마을회관을 나와 주변을 서성였다. 밖에까지 들릴 정도의 고성이 몇 차례 이어졌다.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는 골안마을 주민 안영수씨는 회의 중간에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지난겨울 괴곡리 송전탑 찬성 쪽 주민 일부가 한국전력의 마을 보상금 중 7억5천만원으로 마을에서 8km 떨어진 단장면에 토지를 샀다. 주민들의 반발로 그들은 땅 산 돈을 다시 환수해야 했다. 땅을 판 사람에게서 자금 전부를 돌려받는 일이 차일피일 늦어지자, 이들은 최소한의 이자를 쳐서 원금을 돌려받는 조건을 회의 안건으로 올렸다. 이날 안건은 찬성 28명, 반대 4명으로 무난히 통과됐다. 돈을 돌려받고 일을 빨리 마무리짓자는 의견이 우세했다고 한다.

‘합의 안 하면 공동 기금으로 쓴다’며 압박

안영수씨가 마을회관을 뛰쳐나온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송전탑 찬성 주민들이 농활 온 대학 기자들의 골안동사(골안마을 경로당 겸용) 숙소 사용을 금지하자는 안건을 올리려던 순간이었다. 괴곡리 주민 32명이 모였지만 송전탑 건설에 합의하지 않은 주민 대부분은 이날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참석자 중 실질적으로 골안동사를 사용하는 골안마을 주민도 6명뿐이었다. 안영수씨는 골안마을로 올라가는 내내 “그기 우리 마을 회관인데 왜 지네들(양리 주민들)이 결정해요?”라며 언성을 높였다. 회의 이튿날 괴곡마을회관에는 ‘외부 세력은 물러가라’는 플래카드가 붙었다.

골안과 양리, 양리와 골안. 이들은 원래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며 함께 싸웠다. 하지만 송전탑에서 1km 반경 이내에 위치한 골안마을과 상대적으로 먼 양리마을 간의 온도차는 컸다. 양리마을에선 한전의 가구별 개별 보상이 시작되자 합의하는 주민이 늘어났고 결국 100% 합의했다. 골안마을에는 아직 17가구가 합의하지 않고 남아 있다.

한전은 집집마다 돌며 개별 보상을 해준다고 합의를 촉구했고, ‘몇 날 며칠까지 합의하지 않으면 보상금이 마을 공동 기금으로 쓰인다’고 압박했다. 많은 주민들이 보상금을 아예 받지 못하게 될까 갈등하다가 결국 합의로 돌아섰다. 현재 한전은 유일한 미합의 마을인 고답마을에서도 마을 대표들을 선정해 서명을 받고 다닌다.

송전탑이 찢어놓은 갈등이 괴곡리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 박정식씨는 말했다. “경찰보다 밑(양리마을)의 놈들이 더 밉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꼬. 화해는 하고 싶은데, 그래도 우리가 ‘죄송합니다, 데모 안 하겠습니다’라고 할 수는 없잖아. 보기만 해도 (속이) 부대낀다.”

행정대집행(6월11일) 이후 한 달이 지난 7월15일에도 골안마을 주민들은 아침 6시와 오후 2시면 송전탑 공사현장으로 향하는 한전 쪽 차량을 막았다. 자주 경찰이 출동했다. 상황이 악화되는 날엔 한전 쪽 차량이 올라갈 수 있도록 경찰 병력이 주민들을 길 옆으로 ‘치웠다’. ‘30분 데모’라고 해서 오후 2시부터 30분 동안만 한전 차량을 늦추는 시위도 했다. 반대 주민 대다수는 80대 노인이다.

지난해 8월 골안마을 주민들을 설득하려고 방문했던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국가가 왜 불필요한 돈을 들여가며 국책사업을 하느냐? 이 사업의 정당성을 입증할 자료를 달라”는 박정식씨의 요구에 “그러겠다”고 답했다. 1년이 지난 지금까지 장관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다.

“국가가 이래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꺼.”

매일 새벽마다 공사장 진입로를 막으러 나서는 아들이 안쓰러워 여든다섯 살 어머니는 지팡이를 짚고 따라나선다. 육군 중령으로 28년을 근무해 “국가관이 투철하다”는 박정식씨도 송전탑 건설 과정이 합리적이지 않아 동의할 수 없다고 말한다. 여전히 싸움을 포기할 수 없는 골안마을 주민들의 송전탑 건설 반대 이유는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송전탑을 끝까지 막아야 한다는 생각만큼은 아직 흩어지지 않고 있다.

마을에서 소수가 돼버린 반대 주민들은 6월11일 이후 더욱 힘겨워졌다. “(행정대집행 이전까지는) 그래도 어떻게든 막고 있으면 해결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갖고 있었는데 이제 마 희망마저 없어졌다”고 안영수씨는 말한다. 한전은 합의하지 않은 골안마을 주민들을 찾아다니며 개별 보상금을 받아가라고 다시 손을 내밀고 있다.

저 거대한 ‘국책사업’이란 것은 밀양만으로 만족할 줄 모른다. 가지를 뻗고 끝끝내 경북 청도(각북면 삼평리)에까지 닿아 밀양에서처럼 뿌리를 드리운다. 한전은 “합의와 상관없이 공사는 진행될 것”이라고 공언한다. 청도에서도 송전탑은 주민들의 삶과 공동체를 파괴할 모양이다. 같은 일이 장소만 달리해 되풀이되고 있다.

유지영 국민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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