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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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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겹 겨울 점퍼를 벗고 봄옷으로

빈곤한 단체가 공동으로 마련한 공간인 아랫마을에 사는 최씨와 박씨
일상이 큰 성취인 이들에게 ‘재활’과 ‘가족 재결합’은 ‘당연’한 일일까
등록 2014-05-08 15:36 수정 2020-05-03 04:27
2014년 설에 모여서 음식을 나누는 ‘아랫마을’ 사람들. 이들에게 ‘정상’ 가족과 시설에서의 생활만 강요하는 것이 올바른 일일까. 홈리스행동 제공

2014년 설에 모여서 음식을 나누는 ‘아랫마을’ 사람들. 이들에게 ‘정상’ 가족과 시설에서의 생활만 강요하는 것이 올바른 일일까. 홈리스행동 제공

우리 단체는 ‘아랫마을’이라는 공간에 자리하고 있다. ‘아랫마을’은 주로 반(反)빈곤 운동을 하는, 그래서 빈곤한 단체들이 함께 공동으로 마련한 공간이다. 지은 지 40년도 더 된, 차가 들어올 수도 없는 후미진 골목에 있지만 우리의 활동을 지탱해주는 고마운 공간이다. 한편 이곳은 거리·쪽방·고시원 등지에서 살아가는 홈리스들의 사랑방, 정자나무 같은 곳이기도 하다. 딱히 재밌는 구경거리도, 푼돈 벌이 될 만한 소일거리도 없지만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아랫마을엔 홈리스들의 이야기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대단할 것도, 특별할 것도 없지만 한 번쯤 이들의 이야기가 아랫마을의 대문을 넘어섰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아니, 이들의 ‘이야기’보다는 ‘이들’을 알리고 싶었다.

고시원 문을 나서면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최 아저씨를 처음 만난 건 올해 초, 한 지방에 있는 요양병원에서다. 한 노숙 동료로부터 그가 강제적으로 병원에 입원했으니 구출해달라는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병원 원장과 면담을 하고서야 그와 면회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와의 의사소통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의 표현력이라야 똥, 밥, 담배 따위의 몇 단어를 계속 나열하는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비자발적 입원 여부를 확인하는 것은 포기하고, 그를 퇴원시키기로 했다. 장애가 있어 보였지만 동료에 따르면 평소 그는 요양이 필요한 정신·노인성 질환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참 동안 원장과 원무과와의 실랑이를 거쳐 그를 퇴원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기초생활수급 신청 과정에서 그가 1급 지적장애인이란 사실, 연고 없이 평생을 부랑인시설(현 노숙인요양시설)을 떠돌았음을 알게 되었다. 현재 그는 기초생활수급자로 지정되었건만 여전히 거리를 근거로 생활하고 있다. 매월 거르지 않고 고시원비를 내면서도 그의 잠자리는 공원이거나 공공역사 추녀 밑이다. 고시원에서 생활하실 것을 늘 당부하지만 그 혼자 밥해먹고, 빨래하고, 위생을 관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고시원 문을 나서서 다시 찾아가는 것도 불가능하리라. 아마 그렇기에 그는 일상을 챙겨줄 동료와 함께 살 수 있는 거리를 선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항상 이렇게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에게도 일상생활에 필요한 도움을 공적 체계를 통해 받고, 거리가 아닌 적절한 주거에서 살아갈 기회를 줘야 한다. 하나, 그를 만난 날부터 노숙인·장애인 지원체계를 수소문하고 있지만 지금껏 오리무중이다. 그렇다고 다시 시설로 가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최 아저씨 본인도 거부할뿐더러 가족과 집이 없고, 중증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사회와 단절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평생을 시설과 요양병원의 폐쇄병동에 갇혀 있던 그를 다시 그 굴레에 가두는 것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엊그제 최 아저씨와 아랫마을 화장실에서 목욕을 했다. 두 달의 설득 끝에 얻은 결실이다. 세 겹 겨울 점퍼를 벗고 비록 남이 입던 옷이지만 봄옷으로 갈아입었다. 이것이 지금 그가 누릴 수 있는 인간다움의 전부다. 많은 이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상이 그에게는 큰 성취여야 하는 비극은 아직 끝을 짐작할 수 없다.

대개는 15분이면 족한 거리지만 박 아저씨의 걸음이 아랫마을에 닿기까진 거의 1시간이 걸린다. 목 디스크로 인한 후유증 때문이다. 부친의 가업을 이어받아 평생 가구공장을 운영했지만 6년 전 해당 지역 가구제조업이 공동 붕괴되며 그의 공장도 문을 닫았다. 일을 구해봤지만 오십 줄을 넘긴 그에겐 녹록지 않았고, 가장이라는 지위에서 자유롭지 않았던 그에게 이런 상황은 큰 스트레스였다. 결국 도로에 나가 교통정리를 하는 등 정신분열 증세를 보여 병원에 입원하면서부터 그는 무너졌다. 퇴원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인은 그에게 약간의 돈이 든 통장을 주며 이혼을 요구했다.

15분 거리를 1시간 걸려… 열심히 걷는다

그럴 수는 없었다. 그때도 지금도 그는 다시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조금만 더 좋아지면 경비직 같은 일은 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꼭 붙들고 있다. 그는 이혼 대신 사라지는 쪽을 선택했다. 그러나 부인에게서 받은 돈으로 틀니를 해넣으니 통장은 바닥이 났고 결국 지난해부터 노숙을 하게 되었다. 초짜 노숙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만만치 않았다. 며칠 지나지 않아 일자리를 소개해주겠다는 명의범죄 브로커에게 속아 대전으로 끌려갔고 결국 수천만원에 이르는 대포차, 바지사장 피해를 입었다.

우여곡절을 거쳐 그는 지금 기초생활수급자가 되었다. 그 덕에 거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가족으로 복귀하겠다는 그의 계획은 점점 더 희미해지는 듯하다. 부인과 자녀가 살던 옛집에 찾아갔으나 이미 그곳은 재개발돼 아파트가 들어섰다. 어렵사리 그의 아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들은 이미 부모의 이혼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그의 아버지가 다시 생계를 책임지고 어머니와 재결합하는 일은 불가능하리라 여겼다. 5년이라는 시간은 자녀와 부인의 가족 개념을 바꿔놓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오늘도 박 아저씨는 열심히 걷는다. 나무젓가락같이 뻣뻣한 다리로 고시원에서 아랫마을을 오가고, 아랫마을 주위를 돌고 돈다. 이렇게 걷다보면 몸이 나아지리라, 빼앗긴 ‘가장’의 역할을 되찾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그에게도 그의 가족에게도 생계를 아버지 아닌 다른 가족 구성원이 책임지는 가족은 상상할 수 없다.

‘아랫마을’ 앞마당에는 여럿의 최씨와 박씨가 있다. 많은 이들과 정부는 노숙인의 ‘시설 입소’ ‘자활’ ‘가족 재결합’을 노숙인 정책의 목표로 꼽는다. 노숙 생활을 일탈 내지 비정상적 상태로 규정하고 정상화하는 게 사회의 몫이라는 사고다. 그러나 정부와 정책이 이야기하는 ‘정상’은 과연 올바른 질서일까? 거리에서 사는 것보다는 시설 생활이 더 인간적이며, 아버지라면 가족의 생계를 부양하는 것이 의심할 여지 없이 당연한 일일까?

당연하고 올바른 질서 너머

홈리스 상태가 인간다움을 담보하지 못하는 상태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 처하는 것은 불운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인구의 일정 부분을 항상 홈리스 상태로 내모는 질서, 홈리스 상태에서 벗어나도록 손잡는 지원책이 멀기만 한 현실을 바꾸지 않은 채 ‘정상’을 이야기하는 것은 공허하다. 비단 가족이 아니더라도 사회에서 유대를 찾을 수 있고, 시설 아닌 주거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 당연시되는 사회, 주제넘지만 이런 사회가 더 ‘정상’에 가깝지 않을까?

이동현 홈리스행동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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