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처음으로 퀴어문화축제 퍼레이드에 참여했다. 처음 참가한 그때, 두근거렸고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이 멋지고 품위 있는 사람들이 퍼레이드 땐 얼마나 신나게 놀까. 이날 하루 행사에 참여하며 받은 기운으로 1년을 살아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니 얼마나 대단할까. 퍼레이드 시간이 다가왔고 두근거림이 커질 때 이른바 ‘빤스’ 복장으로 돌아다니는 사람들과 마주쳤다. 사진으로만 봤던 복장으로 축제 행사장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퍼레이드 행사를 진행하는 공공장소에서 ‘빤스’ 차림이라니, 이 얼마나 품위 있고 멋진가!
존재함에도 온전히 인지되지 않았던나의 느낌과 달리, 팬티 복장은 올 6월7일 서울 신촌에서 진행한 퀴어문화축제 퍼레이드 행사에서 소수의 기독교 교회가 ‘빤스 카퍼레이드’라고 부를 정도로 논란의 핵심이었다. 유명한 인터넷 게시판의 게시글에서도 ‘빤스’ 복장은 적잖이 논란의 대상이었다. 퀴어 퍼레이드는 지지하지만 ‘굳이 팬티만 입어야 하느냐?’란 의견이 의외로 많았다. 특히 공공장소라 어린아이도 볼 수 있는데 ‘빤스’ 차림은 문제가 있고, 그런 복장이 퀴어 인권 증진에 무슨 도움이 되느냐란 의견이 상당했다. 스스로를 퀴어나 LGBT(레즈비언, 게이, 바이, 트랜스젠더)의 구성원으로 설명하는 사람 중에서도 일부는 이런 의견을 지지했다. 그리하여 이번 퀴어문화축제를 둘러싼 이야기는 ‘기승전빤스’였다.
솔직하게 말해서 ‘빤스’가 논란의 중심이 될 줄 몰랐다. 적어도 내가 퍼레이드에 참여한 이후 ‘빤스’ 복장의 참가자가 없었던 적이 없었다. 내가 참가하기 전에도 그랬다. ‘빤스’ 복장은 늘 있었다. 그런데도 이것이 올해 들어 논란의 중심, 모든 이슈를 잡아먹는 주제가 되었다. 물론 예전에도 복장을 둘러싼 논란은 있었지만, 퀴어문화축제를 ‘빤스’로 치환하는 수준은 올해가 처음인 듯하다. 그리고 ‘빤스’가 논란을 일으켜서 기쁘기도 했다. ‘빤스’ 복장은 정말 중요한 정치학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퀴어의 몸, 혹은 비규범적 존재의 몸을 공공장소에서 공공연히 드러내는 행위가 어떤 의미인지 생각할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퍼레이드 행사 당일을 제외하고, LGBT 혹은 퀴어가 자주 모인다는 서울 종로나 이태원 등 몇 곳을 제외하고, 퀴어가 스스로를 퀴어라고 공공연히 드러낼 수 있는 곳이 얼마나 될까? 거의 없다. 자신이 퀴어임을 전시하고 다닐 수 있는 공간은 사실상 없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자신이 퀴어임을 티 내면서 활보해도 많은 경우 이 행동은 사람들에게 인식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나는 요즘 나 자신이 트랜스젠더라고 밝히는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데 티셔츠의 글귀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직 없었다. 타인의 티셔츠에 적힌 글귀를 신경 쓰지 않는 태도가 만연해서기도 하지만, 그 글귀를 읽었다고 해도 그 의미가 온전히 독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머리 모양과 복장 등 몇 가지 코드를 통해 자신이 레즈비언임을 공공연히 드러내지만, 이 코드를 읽어내고 이해하는 사람 역시 별로 없다. 한국 사회가 퀴어에 관대한 분위기여서가 아니라 퀴어는 인식의 영역 주변부에서 배회하기 때문이다. 특정한 순간엔 퀴어를 분명하게 인지해 때때로 혐오 폭력이 발생하지만, 그 외의 시간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 풍경이 이성애-비트랜스젠더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는 뜻이다. 모든 사람을 이성애-비트랜스젠더로 가정하기에, 퀴어의 몸은 이 사회에 분명하게 존재함에도 온전히 인지되지 않는다.
적대자들에게 핵심은 ‘빤스’가 아니다기본적으로 퀴어 퍼레이드 행사는 바로 이런 사회적 맥락에서 의미가 발생한다. 모든 사람을 이성애자로, 비트랜스젠더로 가정하는 사회에서 퀴어의 몸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행위는 그 자체로 퀴어운동의 시발점이 되고 급진적 저항운동의 가능성을 만든다. 퍼레이드는 퀴어를 가급적 인식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회적 태도를 거스르는 행동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퍼레이드 행사에 불편함을 느끼며 “퀴어건 뭐건 너네끼리 조용히 지낼 것이지 꼭 밖으로 나와야겠니?”라고 ‘조언’한다.
‘빤스’ 복장은 불편함을 가중하는데, 이것은 퀴어를 성적 존재로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 태도와 관련 있다. 예를 들어 인터넷 게시판 등에서 떠드는 게이의 이미지 중 하나는 남성이라면 가리지 않고 좋아하며 섹스를 하려 드는 과잉 성애화된 존재다. 하지만 방송에 등장하는 게이 연예인은 자신의 성생활 혹은 연애생활을 거의 밝히지 않는다. 대신 성공한 사업가의 모습, 동네 주민이 좋아해주는 모습을 주로 재현한다. 두 가지 이미지는 모순이 아니다. 성적인 실천을 공공연히 떠들 수 있는 존재는 그가 상대적 권력 우위를 점할 때다. 그렇지 않은 존재, 혹은 비규범적 존재는 과하게 성적이라는 이유로 비난받는 동시에 성적인 것을 부정당하고 성적이지 않은 존재로 살 것을 요구받는다.
‘빤스’ 복장은 바로 이런 요구를 거부한다. 퀴어 퍼레이드 맥락에서 ‘빤스’ 복장은 이성애 중심 사회가 퀴어의 모습 중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모습을 공공연히 전시한다. 그러니 이 모습이 어떤 사람들에게 불편한 것은 당연하다. 극소수의 기독교 교회가 퀴어 퍼레이드를 ‘빤스 카퍼레이드’라고 부르는 이유도 이것이다. ‘빤스’ 복장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면, 그토록 우리를 비난한 소수의 몇몇 교회가 퀴어 퍼레이드에 우호적으로 반응하거나 ‘이제 괜찮다’며 용납할까? 아니다. ‘빤스’는 그냥 우리를 비난하는 행위를 정당화할 핑계에 불과하다. ‘빤스’를 안 입으면 그다음엔 퍼레이드 차량을 포기하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은 실제, 지난 퍼레이드 때 있었던 일이다. 당시 퍼레이드를 방해한 집단은 우리가 차량만 포기한다면 길을 내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럼 그다음엔? 아마도 퍼레이드 자체를 포기하라고 요구할 것이다. 그다음엔? 글쎄… 1년 365일 내내 퍼레이드를 진행하는 것도 아니고 1년에 단 하루뿐인데도 이렇게 거부 반응을 보이는데, 즉 단 하루 떠드는 우리의 목소리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데, 그다음엔 무엇을 요구할까? ‘빤스’는 매우 중요한 정치적 행위지만, 또한 퀴어 혹은 LGBT를 적대하는 이들에게 핵심은 ‘빤스’가 아니다.
불편함을 야기할 수 있길 바란다‘빤스’ 복장이 일부에게 불편함을 준다고 해서 퀴어나 LGBT가 자중할 일은 아니다. 자중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다. 그 행위를 불편하게 받아들이는 이성애 중심 사회, 모든 몸을 이성애-비트랜스젠더의 맥락으로만 혹은 ‘(상대적) 권력자’의 맥락으로만 독해하는 인식을 점검해야 한다. 나는 이런 사회와 인식이 당장 바뀔 것이라고 믿진 않는다. 그래서 이성애 중심 사회를 끊임없이 인식할 수 있도록 어떤 불편함을 계속 생산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내년, 내후년, 그 이후에도 ‘빤스’ 복장을 원하는 더 많은 사람이 ‘빤스’ 차림으로 퍼레이드에 참여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빤스’가 더 이상 불편함을 야기하지 않는다면 또 다른 무언가로 불편함을 야기할 수 있길 바란다. 이것은 나의 소박한 바람이다.
루인 트랜스/젠더/퀴어 연구소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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