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아이가 깁스를 한 다리를 끌고 작대기를 짚으며 철둑길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 다리를 하고 어디 가니?” 동네 아주머니가 묻자 아이가 대답했다. “형 찾으러 갈랍니다.” 아이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아주머니는 여비로 쓰라며 500원을 주었다. 아이는 돈을 받아 주머니 깊숙한 곳에 찔러넣고는 익숙한 듯 도둑기차를 탔다.
그들이 낚아챈 ‘거리의 아이들’아이는 3년 전 충남 천안의 어느 고아원을 도망쳐나올 때 형과 헤어졌다. 춥고 배고픈 9살 꼬마아이에게 형은 중요하지 않았다. 게다가 형은 다리를 심하게 절어서 뛸 수도 없었다. 아이가 6살 때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지자 엄마는 집을 나갔다. 그 뒤 형제는 줄곧 고아원과 고아원 사이를 부랑하는 운명이었다. 아이는 10살에 이미 5개의 고아원을 거쳤고 2년 전 서울 소년의 집을 도망쳐 떠돌다가 충북 옥천까지 왔다. 동네에서 유일하게 TV가 있었던 집에 들어가 농사일을 도왔고 이제 막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그 집의 막내아들도 키웠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는 경운기에 치여 다리를 다쳤다. 한 달이 지나도록 증세가 호전되지 않자 주인집 형님이 병원에 데려가서야 뼈가 부러졌음을 알았다. 깁스를 하고 돌아와 구들장을 지는 신세가 되자 이내 주인집 아주머니가 구박하기 시작했다. 한 달 넘게 다친 다리를 끌고 고통을 참으며 일했던 서러움이 밀려오자 아이는 미치도록 형이 보고 싶어졌다. 모진 수모를 당할 때마다 그가 울면서 부를 수 있는 이름은 형밖에 없었던 것이다.
옥천을 벗어나 이곳저곳을 떠돌던 아이가 부산역에 내렸을 때였다. 역 대합실을 빠져나오자마자 두 사람이 아이를 낚아채서는 차에 태웠다. 이른 오후였고 차에는 5명이 더 타고 있었다. 어느 사무실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잡혀온 이들의 사진을 찍고 머리를 깎았다. 그리고 발가벗긴 몸에 호스로 물을 뿌리며 전염병이 있는지 확인했다. 집에 보내달라며 울먹이던 여자아이가 무자비한 구타를 당했다. 눈칫밥 잔뼈가 굵은 아이는 이곳이 여느 고아원과는 차원이 다른 곳임을 대번에 눈치챘다. 그곳은 1975년의 형제복지원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이는 그곳에서 형을 만났다. 형 역시 동생을 찾기 위해 고아원을 도망쳐 떠돌던 중에 이곳으로 잡혀온 것이다.
1979년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밤, 아이를 포함한 9명이 복지원의 담을 넘어 산으로 내달렸다. 2년 전 그는 ‘하늘이 도와’ 가덕도의 어느 고아원으로 보내졌으나 1년이 지났을 즈음 다시 그곳을 도망쳤다. 형이 보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아이는 부산역까지 와서도 여전히 갈등하고 있었다. ‘그 생지옥을 내 발로 돌아갈 것인가.’ 세 바퀴를 돌 때까지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그 순간 형제복지원 단속반이 그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아이는 그렇게 다시 복지원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형은 그곳에 없었다.
소처럼 부리고 개처럼 두들겨패다가9명이 산을 내려왔을 때 순찰을 돌던 방범대원들과 마주쳤다. 호루라기 소리가 온 산을 울렸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아이는 지나가던 트럭을 잡아 사상역 근처의 후미진 길에 자신을 내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눈을 떴을 때는 사상역이 코앞에 보였고 ‘어!’ 하는 순간 이미 서너 명이 튀어나오더니 트럭을 에워쌌다. 아이는 그렇게 다시 복지원으로 돌아왔다. 하룻밤 만에 8명이 붙들려왔다. 그날 아이는 ‘빳다’를 맞고 허벅지가 ‘나갔다’. 달아난 1명은 6개월 뒤 잡혀왔다.
1980년 여름, 아이는 또다시 9명과 함께 복지원을 탈출했다. 이번에는 철수를 앞둔 낚시공장 사장님과 미리 모의해두었다. 사장이 아이들의 거처를 마련해놓은 것이었다. 아이들은 그곳에서 6개월 동안 숨어 살다시피 지내며 낚싯바늘을 묶었다. 어느 날 찬거리를 사러 국제시장에 나갔던 1명이 복지원 단속반에 붙들렸다. 나머지 아이들은 부리나케 짐을 싸서 도망치듯 서울로 올라왔다. 그때 아이의 나이는 열여덟이었다.
1년 뒤 아이는 엄마와 형을 찾았고 형제원에서 함께 지냈던 친구를 동생으로 입적시켰다. 그러나 지옥에 내동댕이쳐졌던 형제는 끝내 엄마와 화해하지 못했고 동생이 된 그의 친구는 우울증과 피해망상으로 자살했다. 올해 초 형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엄마에게도 이해받지 못했던 고통을 나누어가졌던 세상에 둘도 없는 동지를 떠나보내고 아이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세월호 참사 이후 “국가는 없었다”는 비탄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왔을 때 오십이 넘은 그를 만났다. 살면서 이토록 생생하고 구체적인 국가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느껴지는 강력한 힘은 마치 ‘가위’ 같았다.
작고 왜소한 아이의 뒤를 경찰과 공무원이 집요하게 뒤쫓았다. 그들이 합동작전을 펼쳐 아이들을 한곳으로 몰아가면 아가리를 한껏 벌린 형제복지원이 그들을 집어삼켰다. 가족과 공동체가 무너진 폐허 위에서 울고 있는 아이들이 주된 표적이었다. 박인근(형제복지원장)은 수천 명의 사람들을 철창 속에 감금한 채 채찍을 휘두르며 소처럼 부리고 개처럼 두들겨패다가 노리개처럼 가지고 놀았다. 투견처럼 서로 물어뜯게 하여 죽고 죽이는 것을 관망하다가 사체 은닉을 지시했다. 이것은 과장도 은유도 아니다. 12년간 2만여 명이 가혹하게 인권을 유린당했고 513명이 사망했다.
교도소 같기도, 아우슈비츠 같기도, 시베리아 형무소 같기도 한 이 생지옥의 더 끔찍한 비극은 수용인들을 짓밟고 고문하고 살해한 이들이 나치도, 교도관도, 악랄한 고문기술자도 아닌, 이곳에 잡혀온 또 다른 수용인들이었다는 것이다.
아이는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한쪽이 짧은 제 다리 따위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달리고 또 달렸다. 죽을 수도 있다는 걸 모르지 않으면서도 철창의 틈이 조금이라도 벌어지는 때를 놓치지 않았다. 저 먼 곳을 향해서가 아니라 오직 이곳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동물적 탈출. 아이는 살기 위해 죽음을 무릅썼다.
국가가 그곳에 있었다. 작은 아이의 뒷덜미를 낚아채는 유능한 경찰의 손아귀에 국가가 있었고, 아이를 인계한 뒤 성실하게 쌓여가는 공무원의 승진 가산점에 국가가 있었다. ‘갱생’을 외치면서 아이들의 월급을 착복하는 사회사업가의 금고 안에 국가가 있었고, 사라진 아이들이 어디로 갔는지 묻지 않는 사람들의 태연한 일상 속에 국가가 있었다.
잠잘 때도 칼을 품고 자야 했던1987년 형제복지원의 인권유린 실상이 세상에 알려진 뒤 27년이 지났다. 박인근은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복지원은 그 이름만 바꾸었을 뿐 건재하다. 제대로 처벌받지 않은 그가 여전히 생존자들을 쫓아다니고 있다. 많은 이들이 악몽 같은 기억과 싸우느라 정신병원에서 생활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7년 전 자살했던 아이의 친구 역시 박인근이 자신을 잡으러 온다며 자전거에 방망이를 싣고 다니고 잠을 잘 때도 칼을 품고 잤다. 이제는 작은 공장의 사장이 된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박인근은 자신이 이 사회에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먹여주고 재워줬다고 주장했어요. 나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았어요. 그러지 않으면 박인근의 방법이 결국 옳았다는 걸 증명하는 거니까요.” 그 역시 박인근에게 쫓기며 살아온 셈이다.
이들의 고단한 달리기가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하는가. 힘없는 아이들을 야비하게 뒤쫓던 국가는 언제쯤 그들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할 것인가. 형제복지원 진상 규명과 피해자 지원을 위한 특별법이 국회에 상정돼 있다. 조속히 통과되길 바란다.
홍은전 노들장애인야학 교사*‘마이너리티 리포트’ 연재를 마칩니다. 그간 사랑해주신 독자 여러분과 수고해주신 필자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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