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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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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은 인권, 우리에게도 무상급식을

‘눈물 젖은 밥’을 논하기에는 ‘갑 중의 갑’인 노들야학 학생들,
세상의 밥상을 다 차리기 위해 현장수업에 나서다
등록 2014-07-17 15:00 수정 2020-05-03 04:27
노들장애인야학은 지난 6월26일, 7월3일 두 차례 서울시청 앞에서 현장수업을 진행했다. 단 한 끼 인간다운 ‘밥’을 먹기 위해 깨우쳐야 할 사람이 너무 많다.  노들장애인야학 제공

노들장애인야학은 지난 6월26일, 7월3일 두 차례 서울시청 앞에서 현장수업을 진행했다. 단 한 끼 인간다운 ‘밥’을 먹기 위해 깨우쳐야 할 사람이 너무 많다. 노들장애인야학 제공

지난 7월3일 노들장애인야학은 서울시청 앞에서 현장수업을 진행했다. 1교시 음악시간에는 를 연주하고 2교시 미술시간에는 청사 앞마당에 그림을 그렸다. 그림 속 시장님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밥은 인권이다.”

‘데모가 반’인 수업치고는 더없이 예의 바르다고 생각했으나 경찰들은 전기를 차단하고 출입문을 막아섰다. 근엄한 표정의 그들을 향해 초청가수 야마가타 트윅스터가 에 이어 을 불러주었다. “흰밥 쌀밥 볶음밥~ 현미 유기농 현미~ 찹쌀 찹쌀 찹쌀떡~ I wanna more, I wanna more~” 센스 넘치는 선곡. 이날의 학습 목표는 ‘노들야학 무상급식 쟁취’였다.

“흰밥 쌀밥 볶음밥~ I wanna more”

밥. 장애인의 밥. 이것은 아주 오래된 이야기다. 어쩌면 이동권이나 탈시설, 교육권보다 더 오래된 문제. 자신이 남들과 다른 존재임을 가장 서러운 방식으로 깨달았던 순간 그들 앞에 밥이 있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자와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인생을 논하기에 노들야학 학생들은 갑 중의 갑, 슈퍼갑들이다. 그들에게 ‘당신이 경험한 최고로 서러웠던 밥상’에 대해 물었다.

“장애인시설 직원은 나에게 밥을 조금밖에 안 줬어요. 똥 싼다고. 똥 싸면 자기가 치워야 하니까. 국도 없이 장아찌에 밥만 줬지요. 그것마저도 깨끗하게 안 먹는다고 엄청 구박받았죠.”

“10살 때 시설에 들어갔는데 보리밥에 새우젓과 김치만 나왔어요. 여름에는 밥에서 냄새가 났고요. 반찬이 너무 맛이 없어서 밥에 라면 수프를 뿌려서 먹었어요. 아버지는 그런 요양원에 나를 보내기 위해 3천만원을 갖다줬대요.”

“나는 혼자 밥을 먹을 수 있었어요. 그런데 원장은 나에게 자원봉사자들이 먹여주는 걸 얌전히 받아먹으라고 했어요. 그래야 후원이 끊기지 않는다면서요.”

“동생 결혼식이 있었는데 엄마가 5만원을 주면서 식장에 오지 말라고 신신당부 했어요. 나는 오기가 생겨서 10만원을 달라고 했죠. 그거 받고도 분이 안 풀려서 결혼식장에 찾아갔어요. 엄마가 나를 보고는 놀라서 얼른 나가라고 했죠. 쫓겨나듯이 식장을 나와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먹었어요. 도저히 넘어가지 않더군요.”

물론 노들야학이라 해서 이들을 서럽게 만드는 현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야학에서 잔치가 벌어졌던 날 너무 배가 고팠는데 장애인들만 놔두고 (비장애인) 자기들끼리 처먹고 있는데 나는 쳐다만 보고 있었어. 그날 이후 나는 야학에서 ‘잔치한다’ 그러면 아예 안 와.”

“수업이 끝난 뒤 너무 배가 고파서 교사들한테 밥을 같이 먹자고 했는데 바빠서 안 된다고 하면 집에 가서 엄마한테 욕을 한 바가지 먹고 나서 밥을 얻어먹어야지 뭐. 집까지 가기 전에 정 못 참겠으면 빵 하나 사서 먹기도 하는데 (나는 손을 못 쓰니까) 입으로 먹는 모습을 사람들한테 보여주기 싫어서 구석진 데 가서 몰래 먹어.”

가장 건네기 어려운 인사 “식사하셨어요?”

방청객 아르바이트처럼 시종일관 고개를 주억거리고 ‘아~!’ 하는 공감의 탄식을 보내다가도 이어지는 내부 고발 앞에서는 금세 평정심을 잃고 표정 관리에 실패한다. 그날 그들을 그토록 서럽게 만든 사람이 혹시 내가 아니었을까.

2007년 이전에 노들야학은 광진구에 교실이 있고 종로구에 별도의 사무국을 둔 구조였다. 상근 교사들이라 해도 일주일에 두세 번 수업 시간에만 학생들을 만났기 때문에 그저 반가운 마음으로 그 시간에 최선을 다했다. 교실과 사무국이 합쳐지면 ‘밥도 같이 먹고 텃밭도 가꾸자’며 좋아했던 것도 그들이었다. 그러나 2008년 대학로에 새 공간을 얻고 매일 만나게 되었을 때 그들의 핑크빛 기대가 산산이 깨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노들야학에는 짧은 복도가 있다. 그것을 사이에 두고 교실과 사무실이 마주 보고 있다. 교실은 학생들의 공간, 사무실은 상근자들의 공간이다. 학생들은 출근도장을 찍듯 야학에 일찍 나와서 하루 종일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마치 벽에 걸린 액자처럼, 책장이나 소파처럼 같은 자리에서 미동조차 없었다. 시설과 집 안에서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던 것일까. 상근자들이 복도를 지날 때마다 마주쳐야 했던 이 정물 같은 사람들은 참으로 불편했다.

2008년 중증장애인이 받을 수 있는 활동보조서비스 시간은 한 달 최대 180시간, 하루 평균 고작 6시간이었다. 학생들은 ‘귀한’ 활동보조서비스 시간을 야학에서 쓰지 않았다. 사람들은 ‘활동보조인이 없는 시간’, 그러니까 제때 밥을 먹을 수 없고 제때 화장실에 갈 수 없는 시간을 야학에서 보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불편하게 마주 선 복도는 그들의 ‘함께 살기’가 전면전에 돌입했음을 의미했다. 복도에서는 ‘밥’과 ‘화장실’ 활동보조를 둘러싼 국지전이 매일매일 벌어졌다. 장애인은 비장애인을 애타게 찾아다니고 바쁜 비장애인은 장애인이 보낸 시선을 애써 뭉개며 복도를 피해 뛰어다녔다.

밥 문제는 조금 더 곤혹스러웠다. 이 번화한 동네에도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는 식당은 거의 없었다. 물론 돈도 없었다. 도시락을 싸서 다니기도 어려웠다. 싸줄 사람도 없었고 먹는 것을 도와줄 사람도 없었다. 그러니 김밥이나 빵,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거나 ‘밥 먹듯이’ 밥을 굶었다. 그 분야에선 도통한 사람들이었다. 활동보조인이 없는 사람은 밥을 굶었고, 활동보조인이 있는 사람은 밥을 먹었다. 상근자들은 도둑질이라도 하는 듯 몰래 숨어서 밥을 먹었고 누구는 그 불편함 때문에 아예 야학에서 밥 먹기를 포기했다. ‘식사하셨어요?’라는 질문은 가장 건네기 어려운 인사가 되었다.

인간의 밥상, 짐승의 밥그릇이 아니다

그러니 ‘활동보조서비스 생활시간 보장’을 요구하며 투쟁하는 노들야학의 비장애 활동가들에게 그것은 연대가 아니었다. 자신들의 평화로운 밥상을 위한 것이었다. 소박한 밥상에 둘러앉아 그저 죄책감 없이 저녁 식사를 하고 싶었다. 같이 밥 먹기에 실패한 사람들은 그 불편함을 에너지로 함께 싸웠고, 6년이 지난 2014년 현재 활동보조서비스 시간은 한 달 최대 500시간을 훌쩍 넘어섰다.

이제 남은 과제는 돈이었다. 노들야학은 지난 4월부터 유상급식을 시작했다. 밥값은 시중 가격의 절반이지만 그마저도 내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고 적자는 계속 누적되고 있다. 시급 6천원의 활동보조인에게도, 잘해야 최저생계비 60만원 수준을 받는 장애인에게도, 집 바깥에서 매끼 밥을 해결하는 것은 큰 부담이다. 철학자 고병권 선생님은 노들야학에 대해 “학교로 이동하기 위해서라도 세상을 이동시켜야 했고, 단 하나의 지식을 깨우치기 위해서라도 세상을 깨우쳐야 했던 사람들”이라고 표현했다. 밥 한번 같이 먹기 위해 세상의 밥상을 다 차려줘야 하고 단 한 끼의 인간다운 밥을 짓기 위해 깨우쳐줘야 할 사람이 너무 많아서 노들야학은 오늘도 현장수업에 나섰다.

“얻어먹을 힘만 있어도 주의 은총”이라는 저 유명한 꽃동네의 망언을 아직도 당당하게 설파하고 다니는 사람들은 ‘인생 좀 아는’ 노들야학 학생들의 이 피 같은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인간의 밥상은 짐승의 밥그릇이 아니다. 우리가 원하는 건 가난해도 좋으니 평등하고 평화로운 인권의 밥상이다.

홍은전 노들장애인야학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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