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를 위한 서울 광화문역 농성장에 8개의 영정이 들어섰다. 2년 전 이곳에 자리잡을 때만 해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더구나 그중 3명은 이 농성장에서 서명운동을 펼치던 사람들이었다. 지병이 있었던 것도, 돌연한 교통사고를 당한 것도 아닌 그들이 한 해에 한 명씩 저쪽 죽은 자들의 자리로 건너갔다. 삶과 죽음의 거리 고작 3m. 그러나 나는 그 거리를 실감하지 못했다. 그 죽음은 나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뇌병변 장애인이 아니므로 가벼운 화재쯤 재빨리 피할 수 있고, 돈 30만원이 없어서 맹장이 터진 것을 끌어안고 있다가 복막염으로 키우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가족에게서 버려진 지적장애인이 아니므로 사회사업가를 사칭한 어느 미치광이 손에 평생을 능멸당한 것도 모자라 죽은 뒤에까지 차가운 냉동고에 갇혀 12년이나 방치될 가능성이 없으며, 나는 간질 장애인도 아니므로 장애등급 심사에서 ‘장애인이 아닌 것’으로 판정받았다고 생계비 지원이 중단돼 자살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전형적인 장애인의 죽음이다. 바쁘게 지나가는 비장애인들이 저리도 무심한 것을 나는 쉽게 이해해버린다. 사람들은 어쩌면 제단 위의 저 죽음이 당연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니까 저들은 이 사회의 ‘안녕’을 위해 바쳐지는 제물 같은 존재라고.
이 사회의 ‘안녕’을 위해 바쳐지는 제물경기도 안산 세월호 희생자 합동분향소 300여 명의 영정 앞에 섰다. 이렇게 압도적인 죽음 앞에 서본 것은 광주 5·18 묘역 이후 처음이다. 나는 단지 ‘300’이라는 숫자의 무게뿐 아니라 그들 삶과 죽음 사이의 거리가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는 사실에 압도당했다. 그 짧은 거리가 거대한 음모와 주도면밀한 탐욕으로 끊어져 있음을 영화처럼 생생히 보고야 말았다.
세월호.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아마 이즈음 나는 그 배를 탔을 것이다. 분명 그랬을 것이다. 1년 동안 하던 작업이 마무리되면 꼭 배를 타고 제주로 여행을 가리라 다짐하고 배편을 검색하기도 했었다. 지난해 10월 10만 권의 책을 싣고 강정으로 가는 세월호를 타지 못해 아쉬워했던 기억도 생생하다. 그러니 저 영정 하나에 내 얼굴을 넣어보는 것은 대단한 과대망상도 아니다. 그 앞에서 한참을 울고 있는 나에게 누군가가 묻는다.
“당신은 혹시 ‘죽음’이 아니라 ‘아이들’의 죽음이 슬픈 것은 아닌가? 나머지는 ‘감수할 수 있는 정도’의 ‘숫자’인 것은 아닌가? 생명은 중요한가? 몇 사람부터 그러한가?”
그제야 나는 광화문 농성장의 영정들을 떠올렸다. 7개의 영정이 이제 막 8개로 늘어났을 때였다. 나조차 광화문의 저 많은 영정들을 ‘남의 죽음’ 보듯 했음을, 장애인의 죽음은 ‘감수할 수 있을 정도의 숫자’로 보고 있었음을 안 것은 그때였다. 내 순서는 오지 않을 줄 알고 죽음의 행렬을 관조하고 있던 나는 별안간 배가 뒤집히고 순번이 흐트러져버리자 당황하고 있었다. 나의 안전이 위협받고 나서야 깨달았다. 아… 당신들에게 이 사회는 늘 참사였구나. 당신들은 평생을 세월호에 갇혀 구조되길 바랐구나.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와 싸우느라 생을 다 써버린 사람들이 스스로 죽음의 바다에 뛰어들었던 거구나. 나는 또 누군가에게 미안해서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새로운 삶을 갈망하며 제주로 이주하려던 사람들이, 인생의 황혼을 자축하던 사람들이, 이제 막 터지기 직전의 꽃봉오리 같던 아이들이,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던 노동자들이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또 한 사람. 감옥 같은 시설을 박차고 나와 자유의 땅으로 이주해온 사람이, 인생의 황혼은 그저 사람답게 살고 싶었던 사람이, 한 번도 흐드러지게 피어보지 못한 인생이, 매일매일 낯선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분투하던 사람이 새로 산 옷을 몇 번 입어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장애등급심사센터 찾아 도움 호소했지만…2014년 4월16일 전남 진도 앞바다에서 수백 명의 생명이 시시각각 스러져가고 있을 때, 서울 어느 병원의 중환자실에서 한 남자의 목숨도 서서히 꺼져가고 있었다. 그 역시 구조되지 못한 대한민국호의 승객이었다. 대한민국호는 침몰하기 전에 이미 이렇게 한 명씩 한 명씩 제물처럼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만 골라 바닷속으로 밀어넣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지도 못할 만큼 배가 조금 기울었을 때 균형을 잡기 어려운 그들이 가장 먼저 검은 바다 속으로 던져졌다.
3개월 동안 야학 활동을 쉬었다가 며칠 전부터 다시 한글 수업을 시작했다. 출석부에 그의 이름이 남아 있다. 송국현. 사고가 나지 않았다면 나는 그의 이름을 살갑게 부르고 내 이름은 홍은전이라고 나를 소개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아직 다 익히지 못했다는, 그가 집에 가기 위해 환승해야 할 ‘동대문 역사문화공원역’을 함께 써보았겠지. 그러나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건 그의 장례식장에서였다.
송국현. 25살에 사고를 당해 장애를 입었고 4년 뒤 시설에 입소했다. 감옥 같은 생활이 싫어 도망쳐본 적도 있으나 갈 곳이 없었다. 그토록 달아나고 싶었던 그곳에서 그는 24년이나 지나서야 나올 수 있었다. 지난해 10월의 일이었다. 청년은 어느새 머리가 희끗희끗한 50대가 되었다. 낯선 세계가 두렵고 사람 많은 곳이 불안했던 그는, 아이처럼 동료들의 옷자락을 꼭 붙들고 다니면서도 사람들과 어울려 노래방도 가고 벚꽃놀이도 할 수 있는 이곳의 삶이 좋았다.
그는 혼자 걷기 어렵고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활동보조서비스 지원 대상이 아닌 ‘장애 3급’ 판정을 받았다. 밥 짓고 빨래하고 이동하는 일을 혼자 할 수 없었던 그는 4월10일 장애등급심사센터에 찾아가 도움을 호소했지만 경찰에 가로막히며 문전박대를 당하고 돌아서야 했다.
지난 4월13일 원인을 알 수 없는 불길이 그의 집을 덮쳤다. 불덩이가 떨어져내리는 침대 위를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던 그는 “안에 사람이 있느냐”고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를 듣고도 ‘살려달라’는 응답조차 하지 못했다. 한가로운 일요일 오전이었다. 함께 살던 이가 외출한 직후였고 교회에서 그를 데리러 오기로 한 사람들이 도착하기 바로 직전이었다. 그 짧은 사이에 그가 불에 갇혔다. 전신에 화상을 입은 그는 4월17일 새벽,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서러운 생을 마감했다. ‘사고가 나서’가 아니라 ‘사고가 나도록 방치돼서’, ‘불이 나서’가 아니라 ‘달아나지 못해서’ 죽었다.
삶을 막아선 그들 죽음 앞에서도 무례했다‘장애등급제’라는 그를 죽인 범인을 똑똑히 알고 있는 동료들은 보건복지부 장관이 그 책임을 인정할 때까지 장례를 치르지 않겠다고 했다. 경찰은 오래전 연이 끊긴 가족을 재빨리 찾아내 가족장을 치르도록 종용했다. 삶을 막아서던 놈들은 죽음 앞에서도 끝내 무례했다. 지난 4월20일 ‘장애인의 날’ 경찰은 그의 영정을 든 사람들을 향해 최루액을 난사하고 저항하는 사람들을 잡아가뒀다. 동료들은 27일 동안 그의 주검을 붙든 채 장례식장을 지키고 시민분향소를 차리고 장관의 집 앞에 찾아가 촛불을 밝혔다.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이렇게 위험한데도 시설 바깥의 삶이 좋은 건가요?” 나는 단호하게 “그렇다”고 말한다. 수학여행을 가다가 배가 뒤집혔다고 수학여행 잘못은 아니잖아요. 그는 그저 사람답게 살고 싶었을 뿐입니다.
인간답게 살고 싶었던 당신의 여행길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인간 송국현을 잊지 않겠습니다. 부디 편히 쉬십시오.
홍은전 노들장애인야학 교사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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