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와줄 맘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도움을 받아야만 할 때의 모멸감은, 인생에서 가장 비참한 순간 중 하나일 것이다. 네가 너무 귀찮아, 그리고 넌 너무 하찮아, 라는 메시지를 온몸으로 뿜어내면서 ‘이렇게 저렇게 해보면 안 될까요’ 내가 절박하게 제안하는 것마다 간단히 일축해버리는 꼴을 보는 심정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 눈 밖에 나면 그나마 길도 없다는 걸 알 때의 그 아득함은,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고 겪어보면 평생 잊기 어려운 수치다.
아일랜드가 한창 살기 힘들던 20세기 초, 아기들을 대규모로 미국에 입양 보내던 시절, 미혼모 필로미나는 수녀원이 운영하는 보호소에서 노예처럼 일하며 아기를 키운다. 그러나 아기는 어느 날 뺏기다시피 미국에 입양돼버리고, 필로미나는 50년 동안 이를 비밀로 묻는다. 사연에 흥미를 느낀 기자의 도움으로 마침내 아들의 행방을 찾아나서지만, 몇 년 전 화재로 수녀원의 모든 서류가 불타서 아무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어째서 모든 서류는 다 타버렸으면서, 하필이면 아이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겠다고 서명한 서류만 멀쩡히 남아 있는 걸까 기자는 궁금해하며 수소문을 해보니, 아이는 이미 오래전 젊은 나이로 죽었다고 밝혀진다. 그러나 아이 생전의 비디오에는 몇 년 전 바로 그 수녀원을 방문한 기록이 있지 않은가? 엄마를 찾는 아이와 아이를 찾는 엄마에게, 우린 아무것도 모르고 찾을 길이 도저히 없다는 거짓말을 하면서 수녀원이 지키려고 한 것은 자신들의 거짓 명예였다. 비리와 죄가 밝혀질 일이 두려웠던 것이다.
비극을 안고 있으되 발랄하고 사랑스런 할머니, 특종 휴먼 스토리에 욕심냈으되 점점 할머니에게 진실한 우정을 느끼는 기자, 서로 평생을 그리워한 모자의 사랑과 아름답고 처연한 아일랜드 풍광 등 감상 포인트가 많았지만, 가장 뇌리에 남은 것은 교양 있고 다정한 말투의 젊은 원장 수녀였다. 이해하는 듯 말하고 위로하는 척하지만 실은 그야말로 영혼 없는 리액션. 전혀 도와줄 맘이 없고 빨리 이 민원인을 돌려보내는 것만이 목표인 민원 담당자의 전형적인 반응이 그대로 드러난다. 남의 깊은 슬픔도 내 뾰루지 하나만 못하고, 내 손가락 하나를 움직이면 한 생명 구할 수 있대도 그게 번거로워 안 하는 게 인간임을, 그런 인간을 만나면 생사의 기로에서도 도저히 길이 없음을 은 말해준다. 일은 결국, 수세에 몰린 수녀원이 어쩔 수 없이 진실을 고백하면서 해결된다. 알고 보면, 일이 되는 방식은 실은 너무나 간단하다. 해주면 되는 것이다. 그 일을 진정 해결해줄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진심으로 해주려고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영화 제목처럼, 거의 기적 같은 일인가보다.
오은하 회사원·영화진흥위원회 필자 1010호 주요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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