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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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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애, 더 복잡하게 세상을 읽게 하다

이성애와 동성애 사유와 인식에서 누락된 양성애
그들의 인식론에서 세상을 다시 보게 한 <바이웹진>
등록 2014-05-23 15:04 수정 2020-05-03 04:27

LGBT는 동성애자의 다른 이름이 아니다. 퀴어는 동성애자의 영어식 발음이 아니다. LGBT 이슈는 동성애자의 이슈가 아니며 퀴어 정치는 동성애자의 정치가 아니다. LGBT, 즉 레즈비언(Lesbian)·게이(Gay)·바이섹슈얼(Bisexual)·트랜스젠더(Transgender)의 두문자어는 동성애자·양성애자·트랜스젠더를 포괄적으로 지칭하기 위해 사용하는 용어이자, 이들을 통합해서 사유하겠다는 정치적 선언이다. 퀴어는 동성애자의 영어식 발음이거나 세련된 표기법이 아니라 급진적 (성)정치를 지향하는 정치적 태도다. 따라서 동성애자나 동성애 이슈만 다루면서 LGBT 운동이라고 표기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은 방식이며, LGBT를 설명한다면서 동성애자만 다루는 것 역시 부적절하다.

아무것도 사유하지 않았다

지난 3월15일 (bimoim.tistory.com, 이하 ) 첫 호가 발간됐다. 그동안 동성애나 레즈비언, 게이를 다룬 종이 간행물과 웹진, 트랜스젠더 이슈를 중심으로 논한 웹진, LGBT 이슈를 포괄적으로 다룬 종이 간행물이나 웹진은 여럿 있었고 일부는 지금도 나온다. 하지만 양성애 특집호가 아니라 양성애의 맥락에서 잡지를 기획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간행물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곳에서 양성애는 논란의 대상으로 등장할 뿐, 기존 인식을 재구성하는 밑절미로 등장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LGBT나 퀴어란 용어를 빈번하게 사용하면서도 양성애는 사유와 인식에서 늘 누락되고 있다. 나 역시 이런 분위기에 공모했다. 양성애와 관련해서 ‘아무것도 사유하지 않았다’는 에 실린 글을 읽을 때 더욱 자명해진다.
LGBT/퀴어의 중첩하는 범주로 자신을 설명하건 하지 않건 동성애자 되기 서사, 트랜스젠더 되기 서사는 그리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미디어에서 자주 반복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동성애자 서사는 다음과 같다. 어릴 때 나와 같은 성별인 사람을 좋아했고, 남자인데 여성스럽거나 여자인데 남성스러우며, 내가 잘못된 것일까 고민했지만(고민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 내가 동성애자임을 확신한다. 트랜스젠더 되기 서사는 다음과 같다. 어릴 때 나와 성별이 같다고 여기는 사람을 좋아했고, 내게 요구하지 않거나 내가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다른 성별의 역할을 선호하며, 내게 문제가 있나 고민했지만(고민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 사람들의 인식이 문제지 내 잘못이 아님을 깨달으며 트랜스젠더임을 확신한다. 물론 이런 서사는 동성애자나 트랜스젠더 내부의 엄청난 다양성을 깡그리 무시한다. 모든 동성애자나 트랜스젠더가 자신을 이렇게 설명하지도 않는다. 그저 많은 사람이 익숙하게 떠올리는 어떤 서사가 있다는 뜻이다.
그럼 양성애자는? 이 사회에서 공유하는 양성애자 되기 서사는 사실상 없다. 예를 들어 비트랜스젠더 여성이 37살까지 남성과만 연애를 하고 결혼하며 잘 살다가, 이후 여성을 좋아하고 여성과만 연애 관계를 맺는다면? 현재의 (지배적) 설명에서 이 사람은 뒤늦게 진정한 레즈비언 정체성을 찾은 경우다. 혹은 어릴 때부터 남성과만 연애한 비트랜스젠더 게이가 부모의 강요로 이성애 결혼을 한다면? 이 사람이 파트너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때도 대개 이성애 결혼에 강박인 사회의 피해자로 그려진다. 이런 설명 어디에도 양성애자는 없다. 이성애 중심인 사회의 피해자거나 뒤늦게 동성애 정체성을 깨달은 사람만 존재한다.
에 실린 글들이 날카롭게 지적하듯, 양성애 이슈는 동성애 이슈와 결코 뭉뚱그릴 수 없다. 결혼을 둘러싼 논쟁을 살펴보자. 2013년 가을, 김조광수-김승환 커플은 국내 최초의 동성 간 공식 결혼 행사가 아님에도 ‘최초’란 수식어로 동성결혼식을 진행했다. 이 행사의 진행 방식, 결혼제도 자체의 문제에 비판적 논의가 존재했지만, LGBT(!) 인권 신장에 중요한 일이라는 식의 우호적 평가가 다수였다. 동성결혼 이슈는 현재 많은 국가에서 중요하게 다뤄지고, 성적 소수자의 인권 신장에 꼭 필요한 일로 평가된다(나는 이런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

파트너 성별로 성적 지향 설명하라?

그럼 양성애자의 결혼은? 양성애자(여성)-양성애자(남성)의 결혼이건, 양성애자와 이성 파트너의 결혼이건 양성애자의 결혼은 인권 신장이 아니라 ‘예정된 배신’이거나 ‘이성애 특권을 탐하는 기회주의’로 이해된다. 더 심하게, 양성애자는 이미(!) 배신할 사람이기에 믿을 수 있는 연애 상대가 아니라고 이해된다. 물론 동성애자의 결혼과 양성애자의 결혼을 동일하게 논할 순 없다. 문제는 다르게 논하는 방식이다. ‘진보’ 정치의 맥락에서, 동성결혼은 결혼제도 자체를 유지하는 매우 문제적인 형태일 때도 진보운동으로 이해되고, 동성애자의 이성애 결혼은 이성애 중심 사회의 피해로만 재현된다. 이성애자의 결혼은 결혼제도가 문제라고 비판해도 개인을 문제 삼지는 않는다. 양성애만, 오직 양성애자의 결혼만 비난받는다. 이것은 비난이지 비판적 개입이 아니다. 양성애자의 결혼이 정확히 어떤 의미고, 기존의 결혼 개념을 어떻게 불안하게 만드는지 사유하지 않으면서 이성애를 무조건적 특권으로, 동성애자를 피해나 저항의 상징으로만 재현하는 언설은 비판적 개입일 수 없다.
이성애나 동성애를 파트너의 성별로 설명할 수 있고 알 수 있다는 말 역시, 양성애자에겐 골칫거리다. 이것은 의 필진들이 공통으로 지적하는 부분이다. 이제까지 사귄 남성과 여성의 비율이 같거나 한 번이라도 이성 혹은 동성과 사귄 경험이 있어야만 양성애자인가? 많은 이성애자는 동성과 연애한 적이 없을 때도 자신이 이성애자란 점을 의심하지 않고 주변에서도 의심하지 않는다. 일군의 동성애자는 이성과 연애한 적 없음에도 자신이 동성애자란 점을 의심하지 않는다. 유독 양성애자만 연애 상대의 성별 비율이 어떤가라는 주변의 심문을 받는다. 이것은 양성애를 성적 지향 혹은 정체성으로 인정하지 않는 태도와 다르지 않다. 문제는 파트너의 성별로 성적 지향을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성별이 달라 보이는 사람이 연애를 하고 있다면 대개 이성애 관계로 통한다. 성별이 같아 보이는 사람이 연애를 하고 있다면 대개 동성애 관계로 통한다(물론 한국에서 동성애 관계는 친밀한 우정으로 더 많이 독해된다). 그럼 양성애자는? 양성애자가 이성 파트너와 연애를 하면 주변에선 이성애 관계로 인식한다. 양성애자가 동성 파트너와 연애를 하면 주변에선 동성애 관계로 인식한다. 연애 상대의 성별로 성적 지향을 알 수 있다는 언설은 관계를 상상하는 방식에서 양성애를 염두에 두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은폐하고 추방한다. 다른 말로, 파트너의 성별로 성적 지향을 설명하는 방식 자체를 바꿔야 한다.

나의 위치가 흔들리는 기쁨을 맛보라

레즈비언 트랜스젠더인 나는 을 읽으며 내가 얼마나 무지하고, 더 많이 배워야 하는지 조금은 감지할 수 있어(고작 이 정도로 뭔가를 알았다고 할 수 없다) 기뻤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이 을 읽기 바란다. 기존 지식으로 재단하거나 판단하지 말고, 양성애 인식론으로 세상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지 배우며, 다른 사람도 자신의 위치가 흔들리는 기쁨을 만끽하면 좋겠다.

루인 트랜스/젠더/퀴어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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