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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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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멸과 아득함만 남을지라도

절박한 청춘들의 취업박람회·설명회 순례기
발품도 말품도 화려한 스펙 앞엔 무용지물이더라
등록 2013-11-27 14:07 수정 2020-05-03 04:27
지난 9월3일 서울 성동구 한양대 올림픽체육관에서 잡페스티벌이 열려 대학생들이 채용 상담을 하고 있다.한겨레 김태형

지난 9월3일 서울 성동구 한양대 올림픽체육관에서 잡페스티벌이 열려 대학생들이 채용 상담을 하고 있다.한겨레 김태형

이나연(23·가명) ‘바캉스를 가지 못한 취준생을 위한 속 시원한 취업 특강’. ‘아이스 아메리카노 무료 제공’. 푹푹 찌던 8월 초 스터디룸에 광고가 붙었다. 나는 여름휴가를 가지 못했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 처음이다. 공부하랴, 인턴 하랴 친구들이 도저히 시간을 내지 못했다. 에어컨 바람이라도 쐬려고 8월15일 서울 강남역 근처로 취업 바캉스를 떠났다. 참가비 2천원을 냈지만 커피값이라 생각했다.

설명회는 이미 한창 진행 중이었다. 대기업 신입사원인 강연자는 ‘공모전 다관왕’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학벌도, 영어 성적도 별로지만 80회가 넘는 공모전 수상 경력 때문에 대기업에 취업했다고 했다. 공모전 입상으로 상금을 받은 것은 물론 해외여행도 다녀왔단다. “상금 4억원짜리 공모전에서 2등 했습니다. 3천만원밖에 못 받아 아쉬웠어요.” 취미가 공모전 준비라서 직장에 다니면서도 지원한다고 했다. 다관왕의 비결은? “절대 연애 금지입니다.” 농담인 줄 알았는데 진지했다. “대학생 때부터 철칙입니다. 30대 중반인 지금까지 지키고 있습니다. 연애하면서 망가지는 애들 많이 봤어요.” 취업설명회를 도와주는 어린 스태프들을 가리키며 덧붙였다. “내가 얘네들도 연애 못하게 해요.”

“절대 연애는 금지입니다”

그의 자랑이 끝날 무렵 종이 한 장이 무릎에 놓였다. ‘공모전 프로그램 신청서’. 매주 3시간씩 공모전 성공 비결을 4회 듣는 데 16만원이라고 적혀 있다. “매 기수별 사전예약제로 환불할 수 없습니다.” 기업 공모전 도전 방법이나 성공 노하우는 돈을 낸 사람에게만 들려주겠다는 얘기다.

쉬는 시간, 목이 말랐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달라고 하니 3천원이란다. “무료 제공 아니에요? 광고에서 그랬는데.” “모르겠는데요.” 농락당한 기분이지만 어디 따질 곳도 없다.

이은미 벌써 20분째다. 고수도 봤고 김수현도 봤다. 고소영·서인영도 지나갔다. 그런데도 CJ 계열사의 수많은 광고는 끝날 줄 모른다. 9월3일 서울 동작구 흑석동 중앙대 강당에서 열린 채용설명회. ‘채용설명회는 언제 시작할까.’ 강당은 꽉 찼고 바닥에 주저앉은 사람도 있다. 1시간이 지나 CJ푸드빌 직원이 마이크를 잡았다. 누리집에 가면 다 얻을 수 있는 정보를 새로운 것처럼 읊어준다. 그리고 ‘꿈의 직장’을 자랑한다. “CJ는 모든 사옥에 수면실과 안마기가 있어요. 입사 1년 후에는 제주도 나인브릿지골프장에서 휴식 시간을 갖습니다. 인재는 10년 만에 임원으로 승진합니다.” 옆에 앉은 지선이 말한다. “저 남자 되게 부럽다.”

“전공이 보건관리학? 아무래도 경쟁력이…”

인사팀 여직원이 채용 과정을 설명한다. 하나 마나 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나만의 스토리를 만들어야 해요. 적성검사 전에는 무엇보다 컨디션 관리가 중요해요. 국가보훈대상자나 장애인은 우대해요.” 반응이 시큰둥하자 신입사원 연봉을 꺼냈다. “기본급과 성과급을 합해 3800만원 수준이에요.” “오~.” 강당 안이 술렁였다.

50여 개 대기업이 부스를 차려놓은 취업박람회로 발길을 돌렸다. CJ 부스의 줄이 가장 길다. 20분을 기다려도 차례가 오지 않아 두산 부스로 갔다. 자리에 앉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뭇거렸다. 왁스로 머리를 잔뜩 올린 남자 직원은 빤히 내 얼굴을 바라본다. “인사팀을 지원하려는데 전공이 보건관리학이에요. 문제가 될까요?” “아무래도 힘들죠. 경쟁력이 떨어집니다.” 수많은 두산 로고가 날 부끄럽게 한다.

효성 부스에선 안내책자가 동났다고 했다. “안타깝네요.” 단발머리 여자 직원은 과장된 표정을 지었다. 지선이 먼저 상담받고 있는 한화 부스를 찾아갔다. 상반기에 입사했다는 통통한 남자 신입사원에게 물었다. “한화는 학벌을 중요시한다고 하던데요.” “예전에는요. 하반기부터는 자기소개서 비중을 높였어요. 인·적성 시험을 과감히 뺐거든요. 핵심 가치를 자기소개서에 잘 녹여보세요.” 취업박람회장을 빠져나온 뒤 지선에게 말했다. “한화가 이제 학교를 안 본대.” “아니야, 나랑 상담했던 직원은 학교별로 정해진 점수가 있다고 했어.” 누구 말을 믿어야 할까. 취업박람회·채용설명회를 다녀온 뒤 안개가 더 짙어졌다.

노민호(27·가명) 발걸음에 힘이 풀렸다. 9월11일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수원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취업박람회에서 부스를 차린 기업은 80곳이 넘는데 대부분 이공계열만 선발한다. 거의 다 기계를 다루는 일이라서 기계·전자·전기 관련 자격증이 필요하다. 인문계열을 뽑는 곳은 손에 꼽힌다. ‘기계 다루는 자격증이라도 따야 하나.’

그래도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학습지 회사에서 교사를 뽑는단다. 관심을 보이자 반가운 기색이다. 다른 곳은 ‘그냥 또 왔나보다’ 하는 반응인데 기분이 좋다. 현장에서 이력서를 쓰라고 내밀었다. 40대 후반쯤 된 아주머니가 이력서를 받았다. 이력서 항목을 줄줄이 채워갔다. 이름, 휴대전화 번호, 주민등록번호…. 옆 아주머니가 당혹스러워한다. “주민번호도 꼭 써야 하나요?” “겁이 왜 그렇게 많아요?” ‘나는 이력서나 자기소개서에 얼마나 많이 내 ‘민증’을 깠던가.’ 묵묵히 이력서를 쓰며 생각했다. 아주머니는 나를 보며 말을 걸었다. “학생 뭐 이렇게 열심히 써. 난 쓸 것도 없다.” 깔깔 웃는데 웃기지 않다.

“자신을 잘 파악하세요, 중요한 거예요”

취업전략설명회의 청중은 대부분 내 또래다. 몇몇 40대도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강사는 취업을 준비할 때 중요한 것은 기업 분석이라고 강조했다. “여러분, 세리 알아요? 요술공주 세리 말고요.” 내가 대답했다. “삼성경제연구소(SERI)요.” 그는 SERI 누리집을 자주 들락날락하라고 했다. “기업 통계 분석도 하고 직무적성 검사도 하면서 자신을 잘 파악하세요. 아무도 안 알려주는 중요한 거예요.” 청중의 박수가 쏟아졌다. SERI가 취업 보증수표란 말인가.

이나연/노민호/이은미

“인정하세요, 좋은 학교 간 것도 능력이에요”

황당했던 멘토 토크콘서트

이은미 컵라면과 핫식스를 받고 방청석의 맨 앞자리에 앉았다. ‘청춘, 스펙에 변명하지 마라’. 무대에 걸린 현수막이 커다랗게 보인다. 오후 3시, 방청석은 이미 꽉 찼다. 주로 20대다. 진행요원들이 의자를 추가로 구해온다. 비가 쏟아진 9월11일, 서울 서대문구 창전동 현대백화점 신촌점에서 멘토 토크콘서트가 열렸다. 최일구 전 앵커, 김상현 국대떡볶이 대표, 방송인 홍석천이 강연자다. 성공한 사람들이다. ‘스펙을 뛰어넘을 수 있는 무언가를 말하지 않을까. 하다못해 자기소개서에 인용할 만한 한마디쯤은 건질 수 있지 않을까.’

“토익 점수 등 스펙은 기업을 향한 배려라고 생각해요.” 김상현 대표가 말했다. “숫자는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보여주는 지표예요. 스펙 없이 날 봐달라고 할 수는 없는 거죠.” 최일구 전 앵커의 강연 때 끊임없이 터져나오던 청중의 웃음은 사라졌다. “인정하세요, 세상은 1등만 기억해요. 좋은 학교에 간 것도 능력이에요. 이런 세상이 전 좋아요.” ‘청춘, 스펙에 변명하지 마라’는 ‘청춘, 스펙을 높여라’의 동의어였다. 무언가 뜨거운 것이 목구멍으로 차올랐다.

오후 6시께 강연장을 빠져나왔다. 주최 쪽이 나눠준 컵라면과 핫식스를 품은 채로. 나는 컵라면·핫식스를 싫어한다. 하지만 청춘은 컵라면을 먹고 핫식스를 마시며 밤새 토익과 자격증에 파고들어야 한다고 우리 사회는 말한다. 그것이 청춘의 삶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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