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설턴트가 가방에서 펜과 까만 잉크를 묻힌 롤을 꺼냈다. “손을 펴보세요.” 손가락 지문을 새까맣게 칠하고 손바닥은 롤로 문질렀다. “검사 결과는 다음주에 나옵니다.” 몇 분 만에 검사가 끝났지만 강한 잉크 냄새는 몇 시간 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지난 11월19일 ‘지문적성검사’를 받았다. 지문을 분석해 자신의 타고난 재능과 성향을 파악해 진로를 탐색하는 것이다. 지문이 두뇌 부위와 연관돼 있어 이런 분석이 가능하다고 한다. 검사비는 9만원이었다.
일주일 뒤 서울 강동구 천호동에서 컨설턴트를 다시 만났다. ‘한국다중지능적성 평가 결과’를 건네며 그가 말했다. “성격이 굉장히 특이해요. ‘낭만적 감성형’과 ‘실제적 성취형’이 공존합니다. 겉으로는 차분한데 내면의 욕망이 큰 사람이죠.” 의아하다는 표정을 잠시 짓더니 말을 이었다. “평가 결과를 보면 밝고 활달한 사람인데 겉모습은 그렇지 않아 이상하죠.”
결과 보고서에는 지능별로 점수가 매겨져 있었다. 자기이해·음악·언어지능은 A, 대인관계·공간·자체조작·신체·자연관찰지능은 B+, 논리수학·도상지능(시각예술의 상징을 해석하는 능력)은 B 등이었다. ‘내가 수학과 논리 문제에 약하긴 하지.’ 결과 보고서를 보며 생각했다. 각 손가락과 두뇌 부위, 다중지능이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도 설명돼 있었다. 자기이해·언어·음악지능은 오른손 검지와 약지, 왼손 약지의 지문과 연결돼 있다. 논리수학·도상지능은 오른손 검지와 왼손 새끼손가락의 지문에 나타난다.
“직업으론 영업직이나 교직이 적합한데 선생님은 너무 늦었네요. 현재로는 자동차 판매원이 가장 좋습니다. 현대자동차 같은 곳에 들어가면 잘할 거예요. 들어가기가 힘들겠지만.” 힘든 건 나도 안다. “동기부여 할 수 있는 책을 많이 읽으세요.” “혹시 같은 책요?” 내가 물었다. “그렇다”고 반가워했다. 은 주제가 뻔하고 허황돼 내가 얼마 전 중고 서점에 판 책이다. 컨설턴트는 내 성향을 다 파악했다는 듯 이제 외모를 조언한다. “너무 ‘컨추리 스타일’이야. 이마를 보여야 자신감 있어 보이지.” 내 앞머리를 만지더니 갈색 재킷을 가리켰다. “이런 옷도 입지 마. 밝은색 계열의 옷이 잘 어울려. 안타깝네.” 그의 말투가 어느새 반말로 변해 있었다.
그날 밤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지문적성검사의 실체’를 다룬 MBC 를 봤다. 20년 경력의 아나운서가 검사를 받았더니 언어지능이 최하위 등급으로 나왔다. 청소년 테니스 선수의 신체운동지능도 매우 낮았다. 신뢰도가 이렇게 떨어지는데도 취업준비생들은 채용박람회에서 지문적성검사를 받으려고 길게 줄을 선다. 노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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